#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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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빈은 수빈에게 가까이 다가가 약간은 걱정스러운 말투로 물었다.
"형. 어제 핑크 베리 애들한테 신곡 만든 거 들려줬다면서요?"
"엥?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았냐? 내가 걔네들보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이 바닥이 어떤지 잘 알면서 또 그런다. 형. YK에 연습생 숫자만 해도 50명이 넘어요. 연습생 중에 누가 곡을 받았다는 그런 빅뉴스가 어떻게 감춰지겠어요. 다들 데뷔에 목을 매고 있는데.. 지금쯤이면 회사 사람들 중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걸요."
"후우. 정말로 징글징글한 바닥이야.. 그랬지. 내가 직접 가이드 녹음을 떠서 걔네들한테 들려줬지. 그런 다음 멤버 개개인에게 일주일 내로 곡에 어울리는 가사 하나씩 써오라고 숙제를 내줬고."
"아 진짜.. 형! 정말로 걔네들한테 그냥 공짜로 곡을 줄 거예요?"
평상시에도 궁금한 게 있으면 절대 못 참는 성격의 경빈이 무슨 이유로 자신을 찾았는지 깨달은 수빈은 슬쩍 되물었다.
"그럼 내가 돈을 받을까? 연습생이라 돈도 못 벌고 있는 어린애들한테?"
수빈의 대답에 경빈이 답답하다는 듯 잔뜩 열을 내며 줄줄이 말을 토해냈다.
"그거야 그쪽 사정이죠. 형. 형이 몰라서 그러나 본데 연습생 애들 중에 부잣집 애들도 엄청 많아요. 예전이야 소녀 가장이니 뭐니 하지만 요즘은 그런 세상이 아니라고요. 형이 곡을 하나 만든다는 게 절대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그럼 거기에 맞는 합당한 대가를 받아야죠. 아무리 친한 사이라 해도 몇백만 원 정도는 곡비로 받는 게 맞다고요. 공짜로 준다고 걔들이 정말로 형한테 고마워할 거라고 생각하세요? 착각하지 마세요. 그건 형 혼자만의 생각이에요. 걔네들은 절대 그렇게 생각 안 해요."
속사포 랩을 하듯 마구 쏟아지는 경빈의 말을 듣고 수빈은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그럼 걔네들은 날 뭘로 생각할까?"
"호구죠 호구! 형. 얼굴 몇 번 봤다고 덥석 공짜로 곡을 주면 누가 봐도 호구에요."
수빈은 만면에 미소를 띤 채 경빈의 어깨에 손을 올려 어깨동무를 하며 말했다.
"경빈아. 네가 형 생각해주는 거 잘 안다. 혹시라도 형이 호구 잡혀서 맨날 손해만 보고 다닐까 봐 걱정돼서 지금 이러는 거 아냐? 형 말이 맞지?"
"그렇죠. 형. 이 바닥에 있는 애들이 절대 순진하지 않아요. 다들 얼마나 약았는데요. 지금은 핑크 베리 애들한테만 줬지만 나중에 다른 가수들이나 연습생들이 자기들도 친하니깐 공짜로 곡 좀 달라고 달려들면 그땐 어떡할 거예요? 계속 공짜로 줄 거예요? 아니면 너희들은 덜 친하니깐 돈 내놔라 그럴 거예요? 그 어느 쪽도 곤란해지는 건 형이라고요. 지금이라도 마음을 바꾸시는 게 좋아요."
"이놈아. 숨 좀 쉬어가면서 말해라. 그러다 쓰러지겠다. 누가 래퍼 아니랄까 봐.. 아무튼 걱정해줘서 고맙다. 그런데 형도 생각이 있어. 일단 흥분을 좀 가라앉히고 자리에 앉아봐라."
잠시 후 수빈은 경빈과 로빈을 보며 물었다.
"둘 다 내가 호구처럼 구는 거 같아 걱정되지?"
로빈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고 경빈은 큰 소리로 대답했다.
"누가 봐도 호구죠!"
수빈은 경빈의 말에 자신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 하지만 형도 생각이 있어서 그런 거야. 경빈아. 네가 보기엔 내가 성격이 우유부단(優柔不斷) 해 보이냐?"
"...저번에 거침없이 매니저 때려잡는 거나 [문제적 인간]에서 퀴즈 푸는 거 보면 그렇지는 않은 거 같아요."
"그래. 원래 내 성격이 맺고 끊는 게 분명하고 꽤 차가운 편이야. 그렇게 안 닮으려고 노력을 했는데도 아버지를 닮아버려서 말이지.. 그런데도 불구하고 내가 이러는 건 나름 계획이 있어서 그런 거야. 내일이나 모레면 하이유 선배 녹음이 시작될 거다. 작사가 거의 다 끝나간다고 들었으니.."
"그래서요?"
"그럼 가까운 시일안에 내가 작곡하고 프로듀싱 한 곡을 하이유 선배가 발표하게 되겠지? 그리고 만약에 그 노래가 히트를 쳤다고 가정을 한번 해보자. 그럼 대중들이 그 곡이 히트친 이유를 뭐라고 생각할 거 같냐? 작곡가인 내가 곡을 끝내주게 잘 써서? 아니면 내가 프로듀싱을 기가 막히게 잘해서?"
"..그렇진 않겠죠."
"그래. 다들 이렇게 말하겠지. 하이유 노래는 언제나 좋아. 내 말이 틀렸나?"
"형이 한말이 맞아요. 저라도 그렇게 생각할 거 같은데요. 역시 하이유! 라면서."
"그래. 그만큼 지금 내가 음악적인 면에서 명성이 없다는 이야기지. 작곡가로서는 아예 제로라고 볼 수 있을 거고. 비록 내가 곡을 줬지만 하이유 선배한테 내가 업혀간다고 보는 게 일반적인 사람들의 시각이겠지. 하지만 그때.."
"그때?"
"핑크 베리라는 완전 무명의 걸그룹이 부른 노래가 히트를 친다고 가정을 해봐. 아니지. 그냥 히트로는 안되겠지. 빅 히트를 쳐야겠지. 그럼 그때에는 사람들이 이 곡을 누가 만들었는지 조금은 관심을 가지게 되겠지?"
"그렇겠죠."
"그럼 그 작곡가가 하이유가 불러서 히트친 노래를 작곡도 하고 프로듀싱까지 했다는 걸 뒤늦게라도 사람들이 알게 되면 어떻게 되겠어?"
"음. 형한테 관심이 집중적으로 쏟아질 수 있겠죠."
"그래. 바로 그거야. 내가 노리는 게. 어차피 하이유 선배한테 곡을 줘봐야 나의 음악적인 면에서의 존재가치가 그렇게 높이 올라갈 수는 없어. 그래서 나에겐 하이유 선배보다 오히려 핑크 베리가 더욱 중요한 거야. 나는 핑크 베리가 걸그룹으로서 히트할 가능성이 아주 높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무료라도 얘네들한테는 곡을 줘야겠다고 판단한 거야.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친해서 준게 아니라는 소리야. 그리고.."
그때 경빈이 수빈의 말을 자르고 물어왔다.
"형은 정말로 걔네들이 뜰 거라고 생각하세요?"
"그래. 내감으로 걔네들은 거의 무조건 뜬다고 본다. 내가 프로듀싱까지 하면 확실하게 뜰 거라고 난 믿고 있어. 내가 사람 보는 건 또 귀신같이 알아보거든. 그래서 곡을 준거야."
"그렇구나.."
"그리고 거기에 하나가 더 있지. 핑크 베리가 내가 준 곡으로 뜨고 난 다음에 선배인 내가 작곡비를 받지 않고 걔네들에게 무료로 곡을 줬다는 미담까지 양념으로 들어가면 어떻겠어?"
"작곡도 잘하고 인성까지 훌륭하다는 소리를 듣겠죠."
"바로 그거지. 대중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 딱 좋은 스토리 아니겠어? [새롭게 등장한 천재 작곡가, 후배들에게 무료로 곡을 주다] 아마 이런 제목으로 연예계 뉴스나 SNS로 엄청나게 많이 언급될 거다. 그럼 나의 음악적인 명성이 순식간에 부풀려지겠지?"
"그래서요?"
"난 예전의 [너와 함께 런던 나이트]나 [급작스러운 러브 모드] 같은 촌스러운 제목의 노래를 더 이상 부르고 싶지 않아. 예전처럼 케빈이 작사가로 인정받지 못하고 저작권을 못 챙기는 건 더더욱 보고 싶지 않고.. 그래서 이번 BBG 신곡은 내가 직접 프로듀싱을 할 생각이다."
"저도 그러면 좋겠다는 생각은 들지만.. 위에서 과연 그렇게 하도록 놔둘까요?"
"그래서 내가 이렇게 복잡한 계획을 세우고 힘들게 작업을 하는 거 아니겠냐. 우리 회사의 A&R 팀과 정면으로 맞붙어서 싸우려면 나도 거기에 맞는 음악적인 명성이 반드시 필요해. 착각하면 안 돼. 그쪽 인간들은 우리처럼 인기로 먹고사는 연예인들이 아냐. 자기 분야에서 오랫동안 일해온 일종의 뭐랄까.. 프로페셔널한 전문가들이라고나 할까.."
수빈은 생각을 정리하는 듯 잠시 짬을 둔 다음 다시 말을 이었다.
"내가 얼마나 일반 대중들에게 얼굴이 알려져 있는지, 내 SNS 팔로워 숫자가 몇인지, 내 팬카페 회원 숫자가 얼마인지 같은 것들은 그런 전문가들에게 별로 중요하지가 않아. 그쪽 인간들은 말이야. 자신의 전문 영역에서 어느 정도 비슷한 위치까지 올라온 사람들만 일적인 대화 상대로 인정한다고. 일종의 직업정신? 아니면 그들만의 프라이드? 아무튼 그런 게 있어. 그래서 내가.."
그때 조용히 듣고만 있든 로빈이 한마디 했다.
"그런 걸 보통 [곤조 부린다]라고 하지 않나?"
수빈은 깜짝 놀란 얼굴로 로빈에게 물었다.
"로빈이 넌 영국에서 자랐다는 애가 그런 단어는 또 어떻게 알고 있는 거냐? 보통 나이 드신 어른들이 주로 쓰는 말인데."
"나야 부모님께 들었지. 난 입양아가 아니잖아. 집에서 가끔 들어봤어."
수빈은 로빈의 말에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어갔다.
"곤조라고 단어는 어감이 너무 나쁘고.. 장인정신? 뭐 그 정도로 해두자고.. 아무튼 그래서 내가 그들과 대화나 협상을 제대로 하려면 우선적으로 내가 그럴만한 자격이 있다는 걸 증명해야만 하는 거야. 내 나름대로 계산을 다하고 핑크 베리 애들한테 곡을 공짜로 준거라고. 물론 담부터는 제대로 대가를 받아야겠지."
수빈의 말을 들고 있던 경빈이 의구심이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형. 형은 왜 항상 모든 게 복잡해요? 왜 그런 식으로 생각을 하면서 세상을 어렵게 살아가는 거예요? 난 형이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 진짜로.."
경빈의 말을 들은 로빈은 당연한 걸 왜 물어보냐는 듯 단정적인 말투로 대답했다.
"별다른 이유가 있겠냐. 수빈이 성격 탓이지.. 수빈이 쟤는 자기 맘에 안 드는 걸 보면 배알이 꼴려서 도저히 못 참는 성격이잖아. 그런걸 사람들이 보통 반골 기질이라고 부르지 않나?"
갑자기 푹 찌르고 들어오는 로빈의 말에 수빈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한참을 웃고 난 뒤 수빈은 로빈을 쳐다보며 말했다.
"로빈이가 한 번씩 날카로운 구석이 있단 말이야. 우리 아버지가 22년 만에 겨우 발견한 나의 더러운 성깔을 이렇게 짧은 시간에 파악하다니.. 대단한걸."
"아버지야 잘 몰라도 친구들끼리는 성격을 금방 파악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
로빈의 무심한 듯 가볍게 툭 던지는 말에 수빈의 얼굴에는 봄날에 피어나는 개나리처럼 천진난만한 웃음이 번져갔다.
"친구라.. 암. 친구지. 그러니 당연한 거지. 내가 이래서 이 세상이 좋단 말이야. 아무 부담 없이 편하게 이렇게 좋은 친구들을 쉽게 사귈 수 있다는 건 정말.... 축복이지."
수빈은 로빈을 따스한 눈빛으로 쳐다보며 마치 고백하듯 말했다.
"난 말이야. 능력이나 지위가 좀 있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을 깔아뭉개거나 이용해 먹는 걸 보면 기분이 아주 더러워져. 너 말처럼 배알이 뒤틀리는 거지. 그래서 남들이 좋다고 말하는 내 머리를 굴려서 어떡하든 그걸 깨부수려고 자꾸 시도를 하는 거야. 내가 성격이 그래먹은 걸 어떡하겠냐. 타고난 팔자려니 해야지."
시간이 흘러 연습실에 혼자 남은 수빈은 부채 대용으로 핸드폰을 사용해 손바닥을 탁탁탁 두들기면서 깊은 생각에 잠겼다.
'내가 최대한 빨리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는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는걸. 모레가 [냉장고를 처리해] 방영 날이고 내일 저녁이면 [정글의 규칙] 촬영 때문에 마빈은 국내를 뜰 거란 말이지. 남은 시간이 별로 없는데 큰일인걸..'
수빈은 한숨을 내쉬며 초조하고 답답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마빈이 출국하기전에 어서 빨리 결정을 지어서 정리를 해야 될 텐데..'
그때 갑자기 들고 있던 핸드폰이 울려서 수빈은 바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