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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 연예인이 되다-31화 (31/236)

#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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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쏜살같이 흘러 하이유에게 곡을 주기로 약속한 날로부터 벌써 열흘이 흘렀다.

오늘 아침 일찍 수빈은 드라마 촬영을 위해 수원시 팔달구 인계동에 있는 KBC 수원센터에 도착했다.

KBC 수원센터는 디지털 TV 드라마 제작의 메카로서 드라마 제작센터, 특수촬영장, 오픈세트장 및 각종 편의 시설이 갖춰져 있는 국내 최대의 종합영상 제작 단지이다.

현재 수빈은 드라마 제작센터 한쪽 구석에서 움직이지 않고 마네킹처럼 가만히 서있는 상태다.

[특별수사본부]라는 드라마에 협찬된 여러 의상을 담당 코디가 부지런히 수빈의 몸에 맞춰보고 있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어머어머 하며 자신의 몸에 옷을 가져다 댈 때마다 연신 멋있다는 감탄성을 터뜨리는 코디의 호들갑을 말없이 지켜보다 수빈은 선채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제대로 된 드라마는 옷 하나 정하는 것도 이렇게 오래 걸리나 보군. 벌써부터 진이 빠지는 느낌인걸. 후. 마치 여우에게라도 홀린 기분이야. 그날 액션 스쿨에서 성선배를 만난 지 겨우 열흘 만에 내가 여기에서 KBC 드라마를 찍게 될 줄이야..'

수빈은 열흘 전 그날의 기억을 찬찬히 되살려 보았다.

열흘 전 그날 액션 스쿨 도장에서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가까이 다가간 수빈은 자신이 맞게 봤다는 걸 확인했다.

'성강호 대선배 맞군. 요즘 다른 영화 촬영 때문에 바쁘시다더니 오늘 시간 내서 온 모양이네.'

사람들 사이에 서서 한동안 성강호의 액션 연습을 지켜보던 수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액션 자체가 엄청 뛰어난 건 아니지만 묘하게 사람의 시선을 잡아 끄는 게 있네. 저런 게 천만 배우의 관록이라는 거겠지.'

그때 휴식을 취하려고 연습을 마친 성강호가 수빈을 발견하였다.

"어이. 너. 수빈이 맞지?"

성강호가 자신을 알아보고 부르는 소리에 살짝 놀란 수빈은 앞으로 한발 나서서 허리를 숙이면서 인사를 했다.

"네. 맞습니다. 성강호 선배님. 안녕하십니까? 이렇게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영광은 무신.. 암튼 반갑다. 이놈 이거 들은 데로 정말 잘생겼네."

"아닙니다 선배님."

"뭘 아냐. 인마. 잘생겨서 잘생겼다고 하는 건데.. 내가 니 오늘 연습하러 온다길래 마침 시간이 비어서 보러 왔다."

자신을 만나러 왔다는 예상치 못한 성강호의 말에 수빈이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절 말입니까?"

"그래. 일단 사무실로 가서 나랑 이야기 좀 하자."

잠시 후 사무실에는 대배우 성강호와 일행인 중년의 남자, 정도홍 무술감독 그리고 수빈 등 합쳐서 총 4명이 함께 자리했다.

자리에 앉아서 가볍게 인사를 나눈 후 성강호는 한참 동안을 아무 말없이 수빈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만 보았다.

자신의 얼굴을 계속해서 쳐다보는 성강호를 보면서 궁금증이 생겼지만, 이럴 때는 조바심을 내지 말고 상대방이 입을 열 때까지 기다려야만 유리한 고지를 차지할 수 있다는 걸 군사시절부터 익히 알기에, 수빈은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차분히 참고 기다렸다.

결국 기다리다 지쳤는지 성강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수빈이 너. 내가 관상 관련해서 공부 좀 한거 아나?"

"아. 예. 알고 있습니다. 영화 [관상가] 때문에 직접 관상 대가에게 찾아가서 배우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그 영화 때문에 제법 배웠지. 내가 말이야. 요즘 영화판에 돌고 있는 니 소문을 듣고서 좀 의아해했었거든. 예전에 너에 관해서 오다가다 들은 게 좀 있어서 말이지."

성강호는 잠시 하던 말을 멈추고 수빈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내 나이 정도 되면 사람의 본성이란 게 그렇게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걸 경험으로 잘 알고 있거든. 그래서 잘못된 소문이라고 생각했지. 그런데 이렇게 지금 직접 만나서 니 관상을 보니깐 그 소문이 맞는 거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어떤 소문 말씀이십니까?"

"니가 천재라는 소문."

"아닙니다. 선배님. 그건 과장된 소문 같습니다. 제가 천재라니요."

"이마가 빛이 나고 눈이 맑고 초롱 하며 인중이 뚜렷하고 입술이 붉고 윤기가 도는 게 관상학적으로 머리가 총명한 수재의 상(相)이 맞아. 내가 반 관상쟁이거든. 이래 봬도 내가 제법 잘 본다고.."

뜬금없이 자신을 치켜세워주는 성강호의 말에 수빈은 속으로 의아심을 가졌지만 일단 겸손하게 대답했다.

"제가 천재는 아니지만 그래도 관상이 좋다니 다행입니다. 칭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수빈아."

"네. 선배님."

"니 이참에 악역 한번 해볼래?"

"악역요?"

"그래. 지금 KBC에서 중국 CCTV랑 한중 합작 드라마가 계획 중이거던. 준비단계가 거의 끝나서 곧 촬영에 들어갈 거다. 나도 드라마는 첫 출연이라서 나름 이것저것 알아보고 고른 작품이야. 각본도 이미 다 나와있는데 잘 빠졌어. 드라마 제작피디나 다른 출연자들도 빵빵해."

"한중 합작 드라마요? 지금 중국 쪽 분위기가 한한령(限韓令) 때문에 안 좋은 걸로 알고 있는데요."

"조만간 중국에서 한한령이 풀어질 거다. KBC나 CCTV나 둘 다 국가가 주도하는 공영방송인데 그런 정보도 없이 드라마를 제작하려고 하겠냐? 한한령이 풀어지는 거에 맞춰 상징적으로 드라마를 방영할 계획이야. 일종의 징표 같은 거라 볼 수 있지. 한중관계가 다시 정상화됐다는.."

"아니 그런 중요한 작품에서 갑자기 저에게 왜 역할을 맡기시려는지 이해가 안 됩니다. 곧 촬영에 들어가신다면서요? 그럼 배역은 이미 다 정해져있지 않습니까?"

수빈의 질문에 슬쩍 옆자리에 앉아 있는 남자를 쳐다본 후 성강호가 대답했다.

"이건 비밀인데.. 원래 그 역할을 하기로 한 배우가 조만간 검찰 수사를 받기로 돼있다."

"네? 검찰 수사요?"

"그래. 대마를 피웠다고 들었다. 그 썩을 놈이.. 우리도 이틀 전에야 겨우 알았어. 조만간 뉴스에도 나올 거다. 이제 막 드라마 선전을 시작할 예정이었는데 말이야. 지금 그놈 때문에 스케줄이 다 꼬였어. 암튼 그래서 지금 그놈이 하기로 한 역할이 공중에 붕 뜬 상태란 말이지. 촬영 날짜는 코앞으로 다가왔는데.."

"그런 일이.. 근데 왜 그 역할을 저에게? 저 말고 검증된 다른 훌륭한 배우들도 많을 텐데요."

"흠. 먼저 배역 설명을 간단하게 해주마. 이 배역은 화교 출신으로 어렸을 때부터 중국 권법을 익힌 고수야. 그래서 젊은 나이에 그 실력을 인정받아서 중국 상해 쪽 흑사회에서는 중간 간부를 맡고 있고 한국 인천에서는 조폭 두목을 하고 있다는 설정이다. 평상시 중국 쪽에서 마약을 들여와서 한국에다 팔아먹는 나쁜 놈이지."

성강호는 여기까지 수빈이 이해를 했는지 확인을 하는 듯 잠시 수빈을 쳐다보자 수빈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러자 성강호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러다 우연히 핵탄두 개발에 관련된 첨단 기술을 중국에서 빼돌려서 그걸 한국으로 몰래 가지고 들어와. 그런 다음 비밀리에 북한과 접촉해서 그 기술을 팔아먹으려고 하는 역할이지. 그걸 한국과 중국의 특수부에서 의기투합하고 서로 협동해서 검거한다는 게 드라마의 주요 줄거리야. 한마디로.. 한국과 중국이 서로 친하게 잘 지내요라고 자국 국민들에게 홍보하는 게 주요 골자라고 볼수 있겠지."

"그렇군요. 그럼 드라마 장르는 액션 수사물 아니면 첩보물이라고 볼 수 있겠네요."

"그렇지. 이 배역이 악역이고 조연이지만 중국과 한국을 왔다 갔다 하면서 드라마 줄거리를 이끄는 나름 중요한 배역이거든. 그래서 이 배역을 제대로 소화하려면 몇 가지 필수 조건들이 있어."

말을 하다 성강호는 허리를 살짝 숙이며 오른손 손가락을 꼽기 시작했다.

"첫째, 권법의 고수답게 액션 연기를 폼 나게 잘 해야 되고 둘째, 화교 출신이라 한국어 뿐만 아니라 당연히 중국어도 잘해야되고 셋째, 젊고 잘생겨야 된다. 그리고 원래 배역을 하기로 결정된 배우가 있었기 때문에 그놈이 계약한 출연료보다 더 많이 주기가 힘들어. 돈 문제라 나도 잘은 모르지만 내가 듣기론 이미 결정된 출연료를 다시 인상하려면 한중 합작이라 절차가 무지 복잡하데."

지금 이 상황이 답답하다는 듯 성강호가 한숨을 크게 쉰뒤 말을 이었다.

"그래서 요 며칠 사이에 드라마 제작진에서 초비상이 걸렸지. 촬영 시작은 며칠 안 남았는데 중요한 배역이 빵꾸가 났으니.. 환장할 노릇이지."

"그러시군요. 그런데 그런 중요한 배역을 왜 저에게?"

"내가 [우아한 세상] 영화 찍을 때부터 정도홍 무술감독이랑 친하거든. 안지가 십 년이 넘었지. 어제 하도 답답해서 정감독하고 술 한잔하면서 이야기를 털어놨더니 그 자리에서 바로 너를 강력하게 추천하더라고. 정감독 말로는 젊은 애들 중에서 액션 연기로는 니가 원탑이라고 자신 있게 말하던데?"

성강호가 질문을 던지며 그게 사실이냐는 듯 수빈을 직시했고 수빈은 잠시 마음을 정리했다.

'물실호기라.. 연예인으로서 톱클래스에 들려면 뛰어난 연기자로 이름을 날리는 게 절대적으로 도움이 되겠지. 그래서 내가 요즘 영화 쪽으로 집중하고 있는 거고. 그런 면에서 볼 때 이번 드라마는 절대 놓칠 수 없는 좋은 기회야.'

마음을 굳힌 수빈은 성강호의 눈빛을 당당히 받아내며 자신감에 가득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를 추천하신 정감독님께 일단 감사 말씀 드립니다. 그리고.. 정감독님께서 하신 그 말씀이 정확히 맞습니다. 액션이라면 대한민국에 있는 그 어떤 배우에게도 뒤지지 않을 않을 자신이 있습니다."

수빈의 결의에 찬 호기 있는 대답에 성강호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무릎을 탁 쳤다.

"자신감 있어 좋구마이. 암. 젊은 놈이 그 정도 배포는 있어야지. 그럼 액션 문제는 해결됐고.. 젊고 잘생긴 거야 누가 봐도 인정할 거고. 수빈아. 니 출연료는 아직 얼마 안 하제?"

"당연하죠. 연기 쪽으로는 제가 아직 무명인데 받아봐야 얼마나 많이 받겠습니까.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옳거니. 출연료 문제도 해결됐고.. 그럼 남은 게 중국어로 된 대사를 빨리 외어서 제대로 느낌이 나게 연기해야 되는 게 문젠데.. 수빈이 니가 요즘 영화판에 돌고 있는 소문처럼 진짜 천재라면, 중국어로 된 대사도 짧은 시간 내에 암기해서 충분히 소화가 가능할 거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냐?"

이어지는 성강호의 질문에 수빈은 자신감이 충만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谁说我不会汉语?"

(제가 중국어를 못한다고 누가 그러던가요?)

갑작스러운 수빈의 중국 말에 성강호가 깜짝 놀라며 고개를 획 돌려 옆에 앉은 남자를 쳐다보았다. 일행으로 같이 온 남자가 중국 쪽 관계자인지 눈을 동그랗게 크게 뜨며 수빈에게 급히 중국어로 되물었다.

请问是华侨吗? 汉语发音很棒.

(혹시 화교 출신입니까? 중국어 발음이 완벽한데요.)

因为是偶像, 所以在练习生时期学到了东西. 我的发音怎么样?

(아이돌이라 연습생 시절에 배웠습니다. 제 발음이 어떤가요?)

好啊. 真好.

(좋군요. 정말 좋아요.)

谢谢您的夸奖.

(칭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성강호가 수빈을 멍하니 잠깐 쳐다보더니 고개를 젖혀 호탕하게 웃은 다음 약간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이거 이거 배역이 제대로 주인을 찾았는걸. 수빈이가 중국어까지 잘할 거라고는 상상을 못했는데.. 대박이네."

그때 코디가 옷을 다 선정했는지 생각에 잠겨 있던 수빈을 깨웠다.

"수빈씨. 이제 분장실로 가셔야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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