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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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민통선 근처까지 차를 몰고 간 수빈은 약초를 넣은 가방을 들고, 전날 카메오 촬영을 하기 위해 왔을 때 미리 봐뒀던 기가 충만한 산으로 올라갔다.
'DMZ에 가까이 가면 효과가 더 좋겠지만 가는 동안 군인들 검문도 심하고 근처 주민들의 의심을 받기도 쉬워. 지금은 이 정도로 만족해야지.'
사람이 지나다니지 않는 산 중턱에서 나뭇가지를 한 아름 주은 수빈은 조심스럽게 환상미로진(幻像迷路陣)을 치기 시작하였다.
진법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의 방향감각을 착각하게 만들어 특정 지역을 둘러서 지나가게 만드는 진법이다.
"행여 사람이 지나가더라도 발견이 안되게 기본적인 조치는 취해놔야겠지."
잠시 후 진법이 완성된 후 제대로 작동이 되는지 확인을 해본 수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대로 작동하는군. 이제야 전생에서 배운 걸 써먹어보네."
환상미로진을 역으로 해체한 후 수빈은 약초를 이용하여 환상미로진 안쪽에 조심스럽게 수기집결진을 치기 시작했다. 그런 후 수기집결진 한가운데에 반쯤 찬 생수 통 하나를 올려놓고선 뒤로 물러났다.
뒤로 물러나 수기집결진 바깥쪽에 환상미로진까지 조심스럽게 설치를 다 끝마친 수빈은 긴장한 탓에 이마에 줄줄 흐르는 땀을 닦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3일 정도면 약초의 기운이 합쳐진 기가 생수통 안에 모여들겠지. 그럼 그때 그걸 마시면 효과를 제대로 볼 수 있을 거야."
기가 풍부한 약초 덕분에 조만간 세맥 단계를 끝내고 소주천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진 수빈은 밝은 얼굴로 산을 내려와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다음 날 아침 수빈은 연습실에서 마빈을 만났다.
"수빈아. 내가 물어볼게 있는데.."
"그래. 말해. 뭐가 궁금한데?"
"후우. 너 말처럼 내가 정말 그쪽 집 자식일까?"
"유전자 검사 결과를 모르니 나도 확실하진 않지. 단지 여러 가지 정황으로 봐서 미루어 짐작할 뿐이야."
"난 아직도 얼떨떨하다. 이러다 나중에 사실이 아닌 걸로 판명 나면 어떡하지?"
"아니면 아무 일 없고 좋은 거지. 널 노리는 사람도 없어지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면 되는 건데 뭘 걱정하냐? 그리고.."
"그리고?"
"우리 집안에 내려오는 가훈 같은 건데 말이야. [일오(一誤) 이우(二遇) 삼의(三疑) 사비(四備)] 라는 말이 있거든."
"뭔 소리냐?"
"어떤 일에 대해 정보를 분석할 때 하나는 잘못된 정보일 수도 있고, 둘은 우연히 일치할 가능성도 있지만, 셋 정도가 되면 그런 게 아닌가 의심을 하여야만 하고, 넷 정도 되면 그게 사실이라고 믿고 반드시 준비를 해야만 된다는 뜻이지.. 지금까지 너 주위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모아서 생각해보면 설사 나중에 네가 그 집 자식이 아니라고 결론이 나더라도 지금은 맞는다고 믿고 준비를 해야만 된다는 뜻이야."
"후우. 수빈이 넌 한 번씩 말을 너무 어렵게 해."
"그런가? 그럼 그냥 간단하게 유비무환이라고 해두자고."
"유비무환이라.. 그럼 난 지금부터 뭘 준비를 해야 되는 거야?"
마빈의 걱정 어린 말에 수빈이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나랑 같이 연기 연습을 해야지."
"응? 연기 연습을?"
"그래. 내가 각본을 다 짜놨지. [냉장고를 처리해] 프로그램에 나가서는 우리가 특별히 할게 없어. 그냥 작가가 적어준 대본대로 하면 되지만 그전에 우리끼리 준비를 해야 될게 있거든."
마빈에게 자신이 짠 각본을 자세히 설명해 주며 연기 연습을 시킨 수빈은 자신도 각본에 맞춰 연기 연습을 시작했다.
수빈은 액션 스쿨, 연기 연습, 신곡 준비, 오디션 준비, 권법 수련, 녹음장비 매뉴얼 공부 등 정신없이 바쁜 일정을 소화하는 가운데에서도 마빈에게 행여 위험이나 돌발 상황이 발생하지 않을지 유심히 지켜보았다.
다행히 마빈 스스로도 조심을 하려는 듯 회사와 집 이외에는 돌아다니질 않았고 그래서 그런지 특별한 사건은 발생하지 않았다.
어느덧 이틀이 지났다.
수빈은 일요일 저녁 집에서 자신이 출연한 [문제적 인간] 모니터링을 하려고 냉장고에서 맥주 1캔을 꺼내들고 거실 소파에 앉았다.
맥주를 몇 모금 마셨을 때 [문제적 인간] 방송이 시작되었다.
평상시 방송에서 출연진들이 하나둘 스튜디오 안으로 걸어 들어오는 일반적인 오프닝과 달리 검은색 바탕 화면에 탁~타닥 하는 타자치는 소리가 들리면서 한자 한자 글자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걸 지켜보며 수빈은 느긋하게 맥주를 마시면서 생각했다.
'방송심의위원회에서 경고라도 받은 건가? 사과 공지라도 띄우는 모양인데.'
[잠시 후 문제적 인간 방송 역사상 레전드 편으로 기록될 {천재를 만나다} 편이 방송됩니다. 금일 방송하는 프로그램에는 어떠한 조작이나 사전 연출도 없었음을 미리 알려드리는 바입니다.]
어떤 내용의 자막인지 읽어보던 수빈은 입에 머금었던 맥주를 뿜고 말았다.
"이 양반이 미쳤나! 저따위로 자막을 내보내면 나보고 뒷감당을 어떡하라고.."
급히 핸드폰을 집어 든 수빈은 [문제적 인간] 담당 피디인 황피디의 전화번호를 찾아서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았다.
여러 번 전화를 걸다가 결국 포기한 수빈은 일단 방송을 지켜보기로 했다.
먼저 자신의 학생 시절 받았던 처참했던 성적표와 그 당시 방황했던 이야기들이 별다른 편집 없이 방송이 되었다.
"이건 내가 출연 이전에 미리 계획한 대로 잘 나왔네."
그리고 문제를 푸는 장면이 나오기 시작했다.
준비된 다섯 가지 문제 중 첫 번째 문제인 다잉 메시지와 두 번째 문제인 뮤지컬 문제를, 진행자가 출제된 문제를 미처 다 읽기도 전에 정답을 외치며 손을 드는 수빈의 모습이 연속해서 방송으로 나갔다.
중간중간 황당해 하는 패널들의 얼굴과 약간은 벙찐 황피디의 얼굴이 잡혔다.
"뭐 내가 좀 빠르긴 했지만.. 이 정도로는 별문제 없을 거 같은데."
뒤이어 세 번째로 출제된 스도쿠 문제를 10초 만에 푸는 수빈의 모습이 보였다. 다른 패널들의 경악한 얼굴이 교차 편집되며 강조되었다. 그리고 효과음으로 패널들과 스태프진들의 신음 소리가 곳곳에 들어가 있었다.
모니터를 하고 있던 수빈은 머리를 쓸어올리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후우. 이거 황피디가 대놓고 편집을 이런 식으로 한거 같은데."
네 번째 숨은 그림 찾기 문제는 출연자들이 돌아가면서 정답을 말하는 문제라 별다른 특이점 없이 진행되었다.
"이건 별 문제 없고.."
마지막 다섯 번째 퍼즐 맞추기 문제가 출제되었다.
난이도가 높기로 유명한 WPC(World Puzzle Championship)에서 출제된 퍼즐 문제를 푸는 순서였다.
"이건 별문제가 없을 거야. 아무래도 내가 너무 혼자 독주하는 거 같아서 문제를 풀다가 마지막 부분에서 더 이상 안 풀고 중지했으니깐. 그럼 총 다섯 문제 중에서 세 문제를 내가 풀은 게 되나... 그 정도 선에서 방송되면 괜찮을 거 같긴 한데.."
수빈은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나름 안심을 한 상태로 맥주를 다시 마셨다.
다섯 번째 문제가 출제되고 설명이 끝나자 화면 상단에 시간이 등장하며 카운터가 시작되었다.
그런 후 수빈과 다른 패널들의 얼굴들이 차례차례 화면에 잡히더니 각 패널들과 수빈의 책상에 설치된 문제풀이용 모니터가 7분할되어 화면에 나타났다.
그런 후 수빈의 문제풀이용 모니터 화면이 크게 가운데 잡히고 그 주위를 다른 패널들의 문제풀이용 모니터 화면이 둘러쌓다.
일필휘지로 문제를 푸는 수빈의 모습이 잠시 잡혔고 카운터를 한지 15초 만에 문제를 풀다가 중단하는 모습이 잡혔다.
그런 후 다시 문제풀이용 모니터 화면이 다시 잡혔다. 수빈의 모니터는 여러 숫자와 기호들이 가득하였지만 다른 패널들의 모니터는 거의 공백인 상태로 나타났다.
그리고 그때 친절하게 누구나 볼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란 크기의 자막이 한 줄 지나갔다.
[15초 만에 문제를 거의 다 풀었지만 다른 패널들을 위해서 정답을 외치지 않고 있음]
다섯 번째는 풀다가 말았기 때문에 별문제가 안될 거라는 수빈의 예측을 비웃듯 담당 피디의 멋들어진 편집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그 자막을 본 수빈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손에 들고 있던 맥주캔을 구겨버렸다.
"젠장.. 황피디가 나를 위하는 건지 나를 엿 먹이려는건지 구별이 안 가는군. 이런 식이면 애초에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방송 내용이 너무 과하게 나갔는데.."
[문제적 인간]이 시청률은 그리 높지 않지만 충성스러운 골수팬들이 많은 프로그램이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수빈은 급히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시청자들의 반응을 알아보기 위해 [문제적 인간] 홈페이지에 접속을 하려고 하는 순간 수빈의 핸드폰으로 깨톡이 계속해서 도착하기 시작했고 벨 소리가 끊임없이 울리기 시작했다.
다음 날 아침 수빈은 박실장과 면담을 하였다.
"수빈군. 어제 잘 봤네. 역시 대단해. 천재야 천재.."
"후우. 그거 때문에 지금 죽겠습니다. 황피디가 무슨 심보로 그런 식으로 편집을 해서 내보냈는지 모르겠어요. 지금 제 전화도 안 받아요."
"나랑은 이미 통화했어. 나한테 자신은 사실 그대로 편집했다고 이야기하더라고.. 더 보태지도 않았고 더 빼지도 않았다고 말이야. 그리고 자기도 지금 정신없이 바쁘다고 하더군. 어제저녁 이후로 여러 곳에서 연락이 와서 말이지."
"하아..."
"지금 우리 회사 홍보팀으로 수빈군 인터뷰 요청이랑 출연 요청이 쏟아지고 있다고 하던데.. 혹시 들었나?"
"실장님 방으로 바로 와서 아직 못 들었습니다."
"너무 부담 가지지 말게. 거짓으로 꾸민 모습이 방송에 나간 거라면 언젠가 대중들에게 들켜서 욕먹을까 봐 걱정을 해야 되겠지. 하지만 어제 방송은 자네 본 모습 그대로가 나간 거 아닌가? 그런데 뭘 걱정하나. 그리고 말이야..."
"그리고요?"
"아침 일찍 [냉장고를 처리해] 담당 피디가 연락이 왔어. 내가 마빈과 자네의 출연 날짜를 빨리 잡아달라고 해도 바쁘다고 차일 피일 미루던 피디가 출연 협상을 하고 싶다고 아침부터 직접 전화를 해왔단 말일세. 지금 자네가 어제 방송으로 화제가 되고 있으니깐 자신들의 프로그램에 빨리 출연을 시키고 싶어서 그런 거겠지. 수빈군 계획대로 잘 돼가고 있지 않은가? 이게 다 어제 방송된 [문제적 인간] 덕분이라고.."
"후우. 네. 알겠습니다. 아무쪼록 좋은 쪽으로 생각해야겠죠."
한편 수빈과 박실장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 그 시각.
동부이촌동에 있는 한 대저택의 거실에서 중년의 미부가 전화통화를 하고 있었다.
"김실장. 검사 결과가 어떻게 나왔나요?"
[저희 쪽에서 작업을 해서 미용실에서 구한 머리카락과 사모님이 직접 구하셨다는 머리카락을 다 이용해서 각각 검사를 해봤습니다. 이미 사망하신 이정석씨의 유전자 샘플은 구하지를 못해서 대조군으로 사모님이 주신 이영호 회장님의 머리카락과 이윤석 사장님의 머리카락을 사용했습니다]
"그런 건 일일이 말 안 해줘도 나도 알고 있어요. 그래서 결과가 어떻게 나왔냐고요."
중년의 미부는 신경이 예민하게 곤두섰는지 날카롭게 반응을 하였다.
[부계 혈통 확인을 위한 고유 Y 염색체 검사 결과를 각각 했습니다. 그 결과 마빈이라는 친구는 이영호 회장의 핏줄이 아닌 걸로 나왔습니다. 당연히 이윤석 사장님과도 핏줄 관계가 아닌 걸로 나왔고요. 따라서 마빈이라는 친구는 20여 년 전에 사망한 이정석씨의 친자가 아닌 걸로 판명이 났습니다.]
"정말요? 그럼 그 남자애 얼굴이 비슷한건.."
[단순한 우연의 일치입니다. 흔히들 세상에 자신과 닮은 사람이 최소한 3명은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냥 얼굴이 닮았을 뿐입니다.]
"하아. 잘됐군요. 김실장이 고생이 아주 많았어요. 결과지를 언제 받아볼수 있을까요?"
[지금 발송하면 내일이면 받으실 수 있을 겁니다. 급하시면 제가 지금 직접 자택으로 가져다 드릴 수도 있고요.]
"그럴 필요까지는 없어요. 내일 받을 수 있도록 보내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김실장. 정말 수고 많았어요."
[아닙니다. 사모님.]
"이번 일은 이 박정숙이가 잊지 않고 꼭 기억하겠어요."
[감사합니다. 사모님.]
전화를 끊은 중년 미부는 긴장이 살짝 풀린 눈빛으로 정면을 쳐다보며 내뱉었다.
"휴우. 다행이네. 한호 그룹은 당연히 내 새끼들이 물려받아야지.."
그 시각 강남에 위치한 오성 병원 최고급 VIP실에 입원해 있는 이영호 한호 그룹 회장이 전화 통화를 하고 있었다.
"내가 일러준 데로 잘 처리했나?"
[네, 회장님. 여부가 있겠습니까. 말씀하신데로 잘 처리했습니다.]
"알겠네. 비밀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단단히 조심해야 할 거야. 만약에 이 일이 새어나가면 자네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명심 또 명심하겠습니다. 염려 안 하셔도 됩니다.]
"그래. 고생했네. 내가 또 전화함세."
전화를 끊은 이회장은 물끄러미 병실에 설치되어 있는 TV 화면을 쳐다보았다. TV 속에서는 남자 아이돌 그룹이 무대에서 힘차게 뛰어다니며 공연을 하고 있었다.
"이름이 마빈이라..."
한편 그날 저녁 수빈은 강원도로 차를 타고 가서 산중에 설치해 놓은 진법을 해체하고 생수 통을 찾아서 집으로 돌아왔다.
집안 거실에서 정좌를 하고 앉은 수빈은 생수 통을 집어 들고 단호한 목소리로 또박또박 한자 한자 내뱉었다.
"이제부터 시작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