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사 연예인이 되다-26화 (26/236)

#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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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빈은 제기동 약재시장을 천천히 걸으면서 약재상들을 하나하나 꼼꼼히 살펴보았다.

상점 밖의 전시대에 수많은 약초가 올려져 있었지만 그중 제대로 기가 담겨있는 약초는 보이지 않았다.

규모가 크고 괜찮아 보이는 상점 안으로도 몇 번 들어가 보았지만 상점 안에 있는 약초들도 매한가지였다.

인삼, 홍삼, 장뇌삼, 구기자, 감초 등등 여러 약초들이 보기에만 괜찮아 보일뿐 실제로 거기에 담겨있는 기는 보잘것없었다.

'건강 관리에는 도움이 되겠지만 내공을 올리기엔 별 효과가 없는 것들뿐이군. 그렇다고 약재상들이 나 같은 초행자에게 몇백 년 묵은 산삼을 덥석 꺼내서 사라고 보여줄 것도 아니고.. 하기야 그런 물건들은 흔하지도 않겠지.'

나름 기대를 품고 약재시장에 나왔지만 제대로 된 약초가 없다는 것에 실망하고 돌아서려는 찰나였다.

그때 수빈은 어디선가 제법 충만한 기가 대기 중으로 흐르고 있는 것을 느끼고 깜짝 놀라서 주위를 살펴보니, 웬 가마니에서 기가 흘러넘쳐 나오고 있는 걸 발견했다.

가마니 밖으로 약초가 삐져나와있는 걸로 보아 약초가 가득 담긴 걸로 보이는 큰 가마니가 한 약재상 전시대 옆쪽 구석에 마치 쓰레기처럼 처박혀 있었고 거기에서 기가 잔뜩 풍겨져 나오고 있었다.

깜짝 놀란 수빈은 가마니로 가까이 다가가 주둥이를 살짝 열고 자세히 살펴보았다.

'하수오, 갈근, 더덕, 도라지.. 산에서 구할 수 있는 약초가 이것저것 다 섞여있군. 하기야 나에겐 약초 종류가 중요한 게 아니지. 기가 얼마나 담겨있는가가 중요한 건데... 이 정도면 제대로 효과를 볼 수 있겠는걸. 한국 땅에서 아직도 이렇게 기가 충만한 약초들이 날수 있나? 놀랍군,'

상점 안으로 들어간 수빈은 주인으로 보이는 나이가 지긋한 남자에게 물어보았다.

"사장님. 저기 큰 가마니에 여러 가지 섞여있는 약초들은 가격이 얼마나 합니까?"

"가마니? 아. 그거 안 파는 건데."

"안 파신다고요? 왜요?"

"그거 못쓰는 약초야."

"네? 제가 보기엔 괜찮아 보이던데요. 왜 그런 거죠?"

"저게 중국산인데.. 농약을 친 약초라네."

"아. 중국산이었군요. 근데.. 요즘 중국은 약초에 농약도 칩니까?"

"흠. 이야기하자면 긴데.."

"괜찮습니다. 제가 관심이 가서 그러니깐 설명 좀 부탁드립니다."

"저 약초들은 원래는 북한 사람들이 북에서 힘들게 캔 약초라고 하더구먼. 그걸 돈이나 식량으로 바꾸기 위해 중국에다 내다 팔았던 건데.. 중국 쪽에서 해충방제라는 명목으로 약초에다 농약을 잔뜩 친 모양이더라고. 말은 해충방제지만 중국 쪽 약재시장을 지키려고 일부러 그런 거겠지. 더 자세한 사정은 나도 모르고..."

'어쩐지 기가 충만하더라니 북한에서 자란 약초였군. 그쪽은 아직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산들이 제법 있어서 괜찮은 약재가 있을 가능성이 높지.'

"아. 그렇군요. 근데 그런 약초가 왜 여기 있습니까?"

"어제 중국에서 약재를 수입했는데 그때 어떻게 가마니 하나가 잘못 딸려온 모양이야. 그래서 물건을 건네준 쪽에다 저건 뭐냐고 물어봤더니 설명을 해주더라고.. 그러면서 자기들도 필요 없으니깐 알아서 좀 버려달라고 부탁하더구먼."

주인의 설명을 들으면서 수빈은 가마니 안에 담긴 약초들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못쓰는 쓰레기에 불과하지만 자신에게는 특별한 인연이 닿은 좋은 물건이라는 생각에 속으로 흥분하였다.

하지만 행여나 자신이 그런 티를 내면 주인이 가격을 비싸게 올려 받을까 봐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렇군요."

"생각을 해보게. 사람들이 자신의 건강을 지키기 위해서 약초를 찾는 건데 농약이 듬뿍 묻은 약초를 누가 사겠나? 모른 척 그냥 팔았다가 문제라도 생기면 내가 경찰에 바로 잡혀갈걸세. 그래서 조만간 갖다 버리려고 거기다 처박아 둔 거야."

"그럼 그냥 저한테 파시죠. 제가 사겠습니다."

"저걸 자네가 산다고? 안돼. 자네를 어떻게 믿고 저걸 넘기나. 저걸 들고 가서 모르는 사람들에게 제대로 된 약초라고 속여서 팔면 나중에 그 죄를 내가 다 뒤집어쓸 거 아닌가?"

안 판다는 약재상 주인의 말에 잠깐 고민을 한 수빈은 입을 열었다.

"그럼 그냥 약초를 다 동강 동강을 내서 제가 사람들에게 돈을 받고 팔수 없을 정도로 만든 다음에 넘기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제가 수고비는 좀 더 쳐드리겠습니다."

"흐음. 도대체 자네는 저걸 어디다 쓸려고 사겠다는 건가? 저건 사람이 먹으면 안 되는 물건이야."

"제가 전시 미술 작품을 하나 만드는데 쓸려고 그럽니다. 작품 가까이 다가가면 약초 향(香)이 풍기는 그런 작품을 하나 만들려고요. 사람이 먹을게 아니니깐 안심하시고 파시죠.. 어차피 버리실 거면 제가 10만 원에 사겠습니다."

'날이 갈수록 거짓말만 느는구나.'

잠시 후 수빈은 가마니에 가득 담겨 있는 동강 동강난 약초를 차 트렁크에 싣고 집으로 출발했다.

수빈은 집에 도착해서 욕실에 있는 커다란 고무 대야에 물을 절반 정도 받은 뒤 약초를 가마니째로 쏟아부었다. 받아놓은 물속에 약재가 고루 퍼지도록 양손으로 휘이 저으면서 중얼거렸다.

"아무리 내가 직접 먹을 건 아니라고 해도 일단 농약을 좀 씻어 내야겠지. 이 정도로 질 좋은 약재를 구하다니 운이 좋았어. 이걸 잘만 이용하면 세맥까지 금방 끝내고 조만간 소주천을 할 수도 있겠는걸."

손을 닦고 욕실에서 나온 수빈은 잠시 뒤 박실장에게서 온 전화를 받았다.

"네. 실장님."

[수빈군. 어제 자네가 부탁한 거 다 구해놨다네. 지금 사무실로 올수 있나?]

"벌써요?"

[구하는데 큰 돈이 드는 것도 아니고 찾기가 어려운 것도 아닌데 오래 걸릴 이유가 뭐가 있겠나.]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찾아뵙겠습니다."

잠시 후 YK 사옥에 도착 한 수빈은 박실장을 만나러 사무실로 찾아갔다.

"어서 오게. 수빈군. 어제 자네가 한 말이 맞았어."

응접실 소파에 앉으며 수빈이 대답했다.

"그렇습니까?"

박실장에 손에 앨범처럼 보이는 두꺼운 책들을 들고 소파로 와서 앉았다.

"나도 구하자마자 확인해 봤다네. 자네도 직접 보게나."

박실장의 말에 수빈은 두 권의 앨범을 집었다.

"제가 88년 연제대 경영학과 졸업앨범만 구해서 저한테 전해달라고 부탁드렸는데.. 한 권이 더 있네요."

"84년 경인 고등학교 졸업앨범이라네. 이왕 구하는 거 고등학교 꺼까지 같이 구했네."

"괜히 저 때문에 구하시느라 고생하셨겠습니다."

"내 나이에 이 정도 지위에 올라서면 명문고, 명문대 출신 사람들은 주변에 널렸다네. 어제저녁에 전화 몇 통 돌린 게 다야. 그거 구하느라고 특별히 고생한거 없으니 걱정 말고 어서 보기나 하게."

잠시 뒤 수빈은 앨범에서 한 남자의 젊은 시절 사진들을 쳐다보면서 입을 열었다.

"그냥 좀 닮은 정도가 아니군요. 이건 완전히.."

"빼다 박았지? 옛말에 씨 도둑질은 못한다더니.. 마빈이랑 그 양반 젊었을 때랑 얼굴이 완전 판박이야. 그 사진을 보고서 나도 깜짝 놀랐다네."

"흠. 이러면 제가 세운 가설이 정확히 맞아떨어지는군요."

"가설? 어떤 가설? 자네가 앨범을 구해달라는 게 마빈이랑 죽은 그 양반이랑 부자지간이라는 걸 확인해 보기 위해서 그런 거 아니었나?"

"그런 이유도 있긴 하죠. 제가 인터넷에서 찾아본 이십몇 년 전 뉴스에 나온 그분의 조그만 흑백사진은 화질이 나빠서요. 물론 그걸로도 그분이 마빈 아버지란 걸 충분히 유추할 수가 있었지만 한가지 더 확실하게 알아볼게 있었거든요."

"어떤 걸 말인가? 궁금하니깐 빨리 말해보게."

수빈은 박실장을 쳐다보며 빙그레 웃으면서 질문을 던졌다.

"박실장님. 박실장님 생각에 한호 그룹 이영호 회장이 마빈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고 생각하십니까?"

"흠.. 상식적으로 생각해 볼 때 모르고 있었지 않겠나? 보통 나이가 60 중반만 넘어가도 손자 얼굴 보는 게 삶의 낙이라고들 말하는데.. 이회장이 마빈의 존재를 알고 있었으면 벌써 데리고 갔던지 무슨 수를 썼겠지. 알면서도 그냥 놔뒀을 리가 없지 않을까?"

"그렇겠죠. 이회장 나이가 82이니깐 손자가 있다는 걸 알았다면 난리가 나도 벌써 났을 겁니다. 그걸로 미루어 볼 때 이회장은 마빈의 존재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럼 마빈의 존재를 여태껏 모르는데 왜 이회장이 쓰러진 후 갑자기 며칠 사이에 이런 이상한 일들이 연달아 발생했을까요?"

"흠... 내 머리론 잘 모르겠네."

"논리적으로 생각해보면 간단합니다. 이회장이 쓰러졌습니다. 그리고 급히 병원에 실려갔습니다. 다행히 수술은 하지 않았지만 절대적으로 안정이 요구돼서 병원에 계속 입원 중입니다. 그럼 머릿속에 떠오르는 장면 같은 게 있지 않으십니까?"

"장면이라.. 어떤 장면을 말하는가?"

"재벌 회장으로 매일 일하느라 정신없이 바빴던 분이 병원에 입원해서 안정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럼 뭐 하면서 하루 종일 시간을 보내고 있을까요? 나이가 82인 양반이 스마트폰으로 게임을 하면서 시간을 보낼까요?"

"그렇진 않겠지. 보통... TV를 보면서 지내겠지."

"그렇습니다. TV죠. 제 예상은 이렇습니다. 이회장이 입원을 하는 바람에 안 보던 TV를 하루 종일 보게 되었습니다. 평상시엔 바빠서 거의 안 봤겠죠. 특히 뉴스도 아니고 음악방송이나 예능 같은 건 더더욱 안 봤겠죠. 하지만 병원에 입원하면서 달라졌겠죠. 하루 종일 특별히 할 일이 없으니까요. 그러다가..."

"그렇군! 이회장이 TV를 보다가 평생 한 번을 안 보던 음악프로 같은 곳에서 마빈이 나오는 걸 우연히 보게 된 거야. 그래서 불현듯 갑자기 예전에 죽은 둘째 아들이 생각난 거겠지. 마빈이랑 자기 아들이랑 얼굴이 닮아도 너무 닮았으니깐.."

"실장님 말이 맞을 겁니다. 제가 직접 옆에서 지켜본 게 아니라 장담은 못하겠지만.. 아마도 지금 말씀하신 거랑 비슷한 일이 일어났을 거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제 가설에는 한가지 필수적인 전제조건이 있었죠."

"마빈이랑 자신의 둘째 아들. 그러니깐 이정석씨의 젊을 때랑 얼굴이 빼다 박을 정도로 닮아야만 한다는 거겠지."

"역시 박실장님은 지혜로우십니다."

"어른을 놀리나? 자네가 설명을 다 해주니깐 아는 거지.."

"그럴 리가요. 암튼.. 이회장이 TV를 보다가 한마디 했겠죠. 저 젊은이는 젊었을 때 정석이랑 너무 닮았는데.. 그런 비슷한 류의 말을 했겠죠. 그런 후에 쟤가 누군지 좀 알아봐라.. 이런 식으로 지시를 했을 수도 있고 아니면 너무 닮았다고 이회장이 말을 하는 걸 옆에 있던 누군가가 들어서 위기감을 느꼈을 수도 있겠죠."

"그렇겠군."

"최근에 마빈에게 일어난 일들은 거기서부터 시작됐을 겁니다. 한가지 확실한 건.."

"확실한 건?"

"이영호 회장은 아직도 마빈이 누군지를 정확히 모른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앞으로 투 트랙으로 나가야 됩니다."

"투트랙?"

"자세한 건 다음에 진행되는 상황을 보고 말씀드리도록 하죠."

"흠. 알았네. 머리 좋은 자네가 알아서 잘 하겠지. 그런데.."

"네. 실장님."

"[냉장고를 처리해] 그쪽에 일단 접촉은 해놨는데.. 촬영하고 나서 방영까지 시간이 제법 걸릴 건데 그럼 비밀이 새어나가지 않겠나? 스텝부터 출연진까지 사람이 한둘이 아닐 건데.."

"그건 제 나름대로 계획이 또 있습니다. 너무 걱정 안 하셔도 될 겁니다. 담당 피디랑 만나게만 해주시면 됩니다."

"그건 어렵지 않지."

"담당 피디가 입이 무겁고 머리가 잘 돌아간다면 충분히 비밀이 지켜질 수 있도록 협상이 가능할 겁니다. 제가 세운 계획이 있으니깐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알았네."

박실장과 미팅을 마치고 나온 수빈은 집으로 돌아가서 고무 대야에 있던 약초들을 건져내서 물기를 털고 큰 봉투에 담은 뒤 다시 집을 나섰다.

'약초에서 기가 더 빠져나가기 전에 빨리 처리해야지. 강원도까지 가서 일을 마치고 오려면 부지런히 밟아야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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