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사 연예인이 되다-24화 (24/236)

#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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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빈은 녹음실에 있던 두꺼운 매뉴얼 책들을 챙겨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수빈은 컴퓨터를 켜고 인터넷을 이용해 빠른 속도로 뉴스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수빈은 열심히 뉴스를 검색하면서 좀 전 녹음실에서 했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Do you trust me?"

마빈은 수빈의 뜬금없는 질문을 받고 잠시 망설였다가 대답했다.

"예전의 너라면 당연히 못 믿겠지만.. 지금의 너라면 어느 정도는 믿을 수 있다."

"고맙군. 그럼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주의 깊게 들어줬으면 좋겠다."

수빈은 며칠 전 삼겹살집에서 일어났던 일을 차분한 목소리로 마빈에게 자세히 설명해줬다. 조용히 듣고만 있던 마빈은 수빈의 말이 끝난 뒤 되물었다.

"믿기 힘든 이야긴데.. 정말로 누군가 나를 노리고 있다고?"

"믿기 힘들겠지. 나도 그랬으니깐. 나나 너나 끽해봐야 인기 좀 있는 아이돌 그룹 멤버에 불과할 뿐이잖아? 뭐 어린 친구들이야 겉으로 보이는 것만 보고 아이돌이 대단한 존재인 걸로 착각하지만.. 우리들은 다 알잖아. 이 사회에서나 이 바닥에서나 힘없는 을(乙)의 존재에 불과할 뿐이라는걸."

"그렇지. 뉴스라도 한 줄 잘못 터지면 그날로 매장되는 게 아이돌인데.. 그래서 다들 그런 일을 막아줄 힘 있는 기획사에 들어가려고 기를 써고 노력하는 거고."

"그래서 너에게 말을 하지 않았던 거야. 너를 노려서 얻을만한 이득이 딱히 없어 보였거든. 그래서 나도 반신반의를 하고 있었는데.. 좀 전에 왔던 제니라는 애의 행동을 보고 확신을 가졌다."

"제니? 제니가 왜?"

"너 좀 전에 제니가 가고 나서도 머리를 계속 만졌었지?"

"음. 그랬지."

"아파서 그랬겠지. 내가 생각한 게 맞는다면 말이야. 제니가 너 헤어스타일이 맘에 든다면서 손으로 쓰다듬을 때 머리카락이 좀 뽑혔을 거야."

"맞아. 너무 세게 쓰다듬어서 머리카락이 좀 뽑혔어. 너희들이 보는 앞이라서 차마 제니에게 화를 내지는 못했지만 많이 아팠다고."

"그럼 생각을 한번 해보자고. 제니가 너의 머리카락을 왜 뽑아갔을까? 제니가 불로장생을 위한 연단법(鉛丹法)을 알고 있어서? 아니면 납을 금으로 바꾼다는 연금술을 할 줄 알아서? 그것도 아니면 혹시 부두교를 믿고 있어서?"

"말도 안 되는 소리 같은데.."

"당연히 그렇겠지. 남은 건 딱 하나야. 누군가 유전자 분석을 하기 위해 너의 머리카락이 필요한 거라고. 제니는 그 부탁을 들어줬을 뿐이고."

"나의 유전자 분석을 하려고 한다고?"

"그래. 그리고 이런 일련의 일들이 일어나려면 반드시 한가지 전제조건이 필요하단 말이지."

"어떤 전제조건?"

잠시 틈을 둔 수빈은 마빈을 따스한 눈빛으로 쳐다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너 입양아지?"

수빈은 검색 도중 흥미로운 뉴스를 발견하고 회상을 중도에 멈췄다.

[한호 그룹 이영호 회장. 심장마비로 쓰러지다.]

"지피지기면 백전불태라. 이번 일의 배후를 찾아내는 게 가장 시급한데.. 그러려면 마빈이 누구 핏줄인지를 알아내는 게 제일 간단하단 말이지. 요 며칠 새 일들이 연달아 발생하는 걸로 봐서 최근에 죽거나 쓰러진 유력인사 중에 있을 가능성이 높아."

수빈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면서 스크롤을 내려 관련 뉴스를 읽었다.

"어디 보자. 날짜를 보니 열흘 정도 전에 쓰러졌군. 향년 82세에 급성 심장마비로 갑자기 쓰러져 입원했고 슬하에 자식은 아들 둘에 딸 하나를 뒀다라.."

수빈은 계속해서 관련 뉴스를 찾아서 화면에 띄운 뒤 읽었다.

"이영호 회장 아들 둘 중에 55세인 큰 아들은 결혼해서 슬하에 현재 딸만 셋이라.. 오호. 흥미롭군... 그리고 둘째 아들은 20여 년 전에 33세의 나이로 교통사고로 사망했는데 사망 당시 미혼이라 자식이 없었다. 이거 이거.. 촉이 와도 너무 강하게 오는걸."

이영호 회장과 관련된 여러 개의 뉴스를 주의 깊게 읽어본 수빈은 컴퓨터 옆에 올려놔둔 스틱을 집어 들었다.

아까 녹음실에서 연습용이라 가격이 싸니깐 부담 없이 가져가라며 케빈이 선물해 준 드럼 스틱이었다.

수빈은 이번 일을 해결하기 위한 전략을 수립하기 위해 스틱을 오른손으로 들어서 왼쪽 손바닥을 천천히 두들기기 시작했다.

잠시 후 깊은 생각에 빠져있던 수빈이 깨어나며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이 정도가 최선이려나. 아무리 좋은 전략을 세우려고 해도 기본적인 양쪽 전력의 차이가 너무 심하단 말이야. 어쩔 수 없지. 일단 이걸로 밀어붙여봐야지."

잠시 후 수빈은 인터넷에서 한국 지도를 펼쳐놓고 살펴보고 있었다.

"아무리 효과가 적더라도 수기집결진을 이용해야겠지. 그러려면 DMZ 가까운 곳에 있는 집이나 땅을 구해서 진을 설치해야 될 건데.. 그런 다음 모여진 물을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차로 싣고 와서 계속 장복하면 어느 정도는 효과를 볼 수 있을 거야."

지도를 뚫어지게 쳐다보던 수빈은 마음속으로 결정을 한 듯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강원도 쪽이 좋으려나?"

이윽고 인터넷으로 해야 할 일들을 모두 끝낸 수빈은 회사에서 가져온 두꺼운 매뉴얼 책들을 들고 서재로 걸어갔다.

걸어가는 그의 얼굴엔 새로운 지식과의 만남에 따른 기대와 흥분으로 싱그러운 미소와 옅은 홍조가 드리워져 있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수빈은 YK 사옥으로 나갔다.

연습실에 도착하니 경빈만 있고 다른 멤버들은 보이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형. 일찍 나오셨네요."

"안녕. 성빈이랑 영국애들은 다 어디가고 안보이는거야?"

"성빈이는 오늘 스케줄이 있어서 회사로 안 오고 집에서 바로 그쪽으로 간다고 들었어요. 그리고 영국형들은 지금 회사 구내식당에서 아침밥 먹고 있을 거예요. 저야 집에서 어머니가 차려주시는 아침밥을 먹고 나오지만 그쪽 형들은 차려주는 사람이 없잖아요."

"그렇구나. 마빈이랑 빨리 이야기를 해야 되는데. 내가 좀 있으면 나가봐야 돼서.."

"어디를 가시는데요?"

"오늘 영화에 카메오 출연을 하기로 약속한 게 있어서 빨리 가봐야 되거든."

"그래요? 무슨 영화에 나가시는데요?"

"[유전자 변형술사]라고.. 유아영 선배님과 약속을 한 게 있어서 늦어도 점심때까지는 영화 촬영장에 가봐야 돼."

그때 마빈과 로빈, 케빈이 아침식사를 마쳤는지 다 같이 연습실로 들어왔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수빈은 마빈을 한쪽 구석으로 데리고 가 둘이서 대화를 나눴다,

"마빈. 어제 내가 한 말들 기억하지?"

"그럼. 다 기억하고 있어."

"그중 가장 중요한게 뭐였지?"

"평상시와 똑같이 행동해라. 내가 잘못해서 무슨 뱀을 건들면 안 된다고 했는데.."

"타초경사. 쓸데없이 풀을 건드려 뱀을 놀라게 하면 안 된다고. 네가 평상시랑 다르게 행동하면 저쪽을 자극할 수 있다는 뜻이야."

"알아들었다."

"네가 어제 나에게 말한 것들을 기초로 해서 작전을 세워봤는데.. 일단 이번 일과 관련해서 공중파 쪽의 뉴스나 연예정보 프로에서 인터뷰를 하는 건 지금으로선 위험해. 상대방이 미리 알고 손을 쓸 수도 있고 오히려 그걸 빌미로 그쪽에서 먼저 우리한테 선수를 칠 수도 있어.."

"그럼 어떡하지?"

"허허실실. 상대방이 전혀 예측하지 못한 곳에서 우리가 먼저 치고 들어가야지."

"어떻게? 그러려면 내가 뭘 해야 되는 거지?"

"네가 특별히 할 건 없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깐 넌 아까 말한 것처럼 보통 때랑 똑같이 지내기만 하면 돼."

"알았어. 너만 믿고 있을게. 고맙다. 수빈이 너 일도 아닌데..."

"야! 같은 동료끼리 너 일 내일이 어디 있냐. 나만 믿어. 이래 봬도 이런 머리싸움이 내 진짜 전공이거든. 아. 그리고 하나만 물어보자. 너랑 로빈이랑 케빈이는 지금 한집에서 같이 지내는 거야?"

"그렇지. 한국에 도착해서부터 여태껏 세 명이서 쭉 같이 한집에서 살았지."

"그래? 그럼 어제 저녁에 걱정했던 문제 하나는 해결됐군."

"어떤 문제?"

"세 명이나 같이 한집에서 살면 당연히 있을 거 아니야? 냉장고 하나쯤은.."

"갑자기 냉장고는 왜? 집에 하나 있긴 하지. 음식을 매번 나가서 사 먹으니깐 안에 든 건 별로 없어도..."

"그럼 됐어, 나머진 내가 알아서 하마."

잠시 후 수빈은 강원도에 있는 영화 촬영장으로 출발하였다.

3시간을 넘게 차를 타고 달려 [유전자 변형술사] 촬영장에 도착하니 다들 점심 식사 중이라 사람들이 보이질 않았다.

수빈은 유아영 선배가 있는 대기실로 찾아갔다.

노크를 한 후 문을 열고 들어가니 영화의 여자 주인공인 유아영 선배와 남자 주인공인 마동식 선배가 여러 스텝들과 같이 도시락을 먹고 있었다.

수빈이 유아영을 발견하고 인사를 하며 아는 척을 하자 유아영이 벌떡 일어나 양팔을 벌리며 걸어왔다.

"어머. 수빈아. 바쁠 텐데 이렇게 먼 곳까지 와줘서 고맙다."

"아닙니다. 제가 강원도 쪽에 볼일도 좀 있고 해서 겸사겸사해서 왔습니다."

수빈이 인사말을 하는데 유아영이 가까이 다가오더니 수빈을 꼭 끌어 안았다.

'음? 이 아줌마가 오늘따라 왜 이러나?'

어쩔 수 없이 수빈도 유아영을 살짝 끌어 앉으며 반가움을 표시하고 있을 때 이쪽을 쳐다보고 있던 마동식과 눈이 마주쳤다.

'덩치가 어마 무시하군. 근데.. 이 사람은 왜 이렇게 나를 보는 눈빛 속에 적의(敵意)가 가득 담겨 있는 거지?'

팔뚝이 웬만한 여자 허리통 보다 굵은 건장한 체격의 마동식이 진한 적의를 가지고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자 수빈은 급히 기억 속을 더듬어 보았지만 특별히 생각나는 기억이 없었다.

그러던 중 수빈은 자신을 쳐다보는 마동식을 보고 어떤 사람이 떠올라서 자신도 모르게 활짝 웃었다.

'덩치를 보니 예전 생에서 나랑 한판 붙었던 그 사람이 떠오르는군. 석공(石工) 출신으로 녹림(綠林)에 투신하여 총표파자(總鏢把子)까지 올라갔던 입지전적인 인물이었지. 돌을 쪼던 날카로운 정과 망치를 자신의 주무기로 삼고, 성정이 폭급하고 난폭해서 꼬랑지에 불이 붙은 늑대로까지 불렸던 인물... 예정화랑(銳釘火狼) 마귀염(馬貴炎)과 비슷하군.'

그때 적의를 가지고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던 마동식이 입을 열었다.

"제대로 골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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