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사 연예인이 되다-23화 (23/236)

# 23

8 - 2

수빈은 그동안 마음속으로 억눌러왔던 사랑을 마침내 그녀에게 고백하기 위하여 자신의 집을 나섰다.

하지만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파트 1층으로 내려가니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여인이 수빈을 기다리고 있었다.

같은 회사 사무실에서 동료로 근무하며 자신보다 한 살 어린 에리카가 입구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를 발견한 수빈은 깜짝 놀라 자신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추고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도저히 더 이상은 참을 수 없게 된 수빈이 크게 소리쳤다.

"야. 경빈아! 쓰라는 랩 가사는 안 쓰고 도대체 뭘 쓴 거야?"

조금 떨어져 수빈의 눈치를 보고 있던 경빈이가 쪼르르 달려왔다.

"왜요? 제가 쓴 스토리가 맘에 안 드세요?"

"너 같음 이게 맘에 들겠냐? 읽다가 말았다. 뜬금없이 갑자기 이게 뭐야?"

"갑자기라뇨? 형? 저 원래 랩 가사 쓰기 전에 스토리를 먼저 하나 잡고 그다음 랩 가사를 쓰잖아요."

"...그랬냐? 몰랐네. 그런데 거기에 나랑 에리카가 왜 나와?"

"어제 형이 에리카 발목을 치료해줬잖아요. 그걸 보면서.. 아하. 이번엔 두 사람을 주인공으로 스토리를 쓰면서 영감을 한번 받아보자. 그래서 쓰게 된 거죠."

"알았다. 알았으니깐 스토리 이건 앞으로 너만 봐라. 에리카가 이제 겨우 16살인데 괜히 다른 사람들한테 오해받기 싫다. 알았냐?"

"그래서 스토리에 형보다 한 살 어리다고 제가 적어 놨.."

"닥쳐! 알았냐고!"

"..네. 형."

"후우. 스토리는 대충 쓰고 신곡에 들어갈 랩이나 빨리 만들어봐."

수빈은 경빈이 쓴 스토리가 적혀 있는 핸드폰을 돌려주며 마음속으로 굳게 다짐했다.

'이전 생에서 16살이면 시집가서 애를 놓을 나이니깐 사귀어도 별문제 없겠지만 이번 생에서 만약 그랬다간 은팔찌 차고 인생 종 치는 거지. 기적같이 얻은 새 인생을 그런 일로 허망하게 끝낼 수는 절대 없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는 듯 고개를 도리도리 저은 수빈은 연습실에 모여 있는 다른 멤버들을 둘러보았다.

로빈이 자신에게 할 말이 있는지 이쪽을 쳐다보고 있는 걸 발견했다.

"로빈. 우리 신곡 작곡은 어떻게 진행되어 가고 있는지 한번 이야기를 해볼까?"

"그래. 저번에 네가 제안한 첼로를 베이스로 깔고 다시 곡을 짜봤는데. 같이 한번 들어볼래?"

"그래. 들어보자. 근데 마빈이 안 보이네? 어디 갔어?"

"오전에 화보 촬영이 있어서 갔다 온다고 들었어."

"마빈은 유독 화보 촬영이 많은 거 같은데?"

"마빈이 얼굴선이 좀 가늘잖아. 그래서 그런지 여자들에게 보호본능을 일으킨다나 뭐라나.. 연상의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은 모양이더라고. 그 때문에 여성 잡지 쪽에서 화보 촬영 요구가 자주 들어오는 편이야."

"그렇군. 부럽... 흠. 일단 우리끼리라도 한번 들어보자고. 다들 모여봐."

로빈이 핸드폰을 꺼내서 새로 작업했다는 음악을 틀었다.

귀를 기울여 듣고 있던 수빈의 얼굴이 점점 찌푸려졌다. 음악이 끝나자 모든 멤버들이 수빈을 쳐다보았다.

"로빈. 내가 보기엔 전에 보다 곡이 더 나빠졌는걸. 과유불급 모르냐? 첼로 소리가 너무 튀어서 다른 소리들이 다 묻히는 느낌인데.."

로빈이 쑥스럽다는 듯 한쪽 손으로 머리를 넘기며 답했다.

"내가 들어도 좀 그래. 첼로는 나도 잘 모르는 악기라서 일단 컴퓨터로 찍어서 작업을 해보긴 했는데 나도 맘에 안 들더라고.."

"흠. 그래? 나도 첼로는 잘 모르는데."

수빈은 다른 멤버들이 듣지 못하도록 아주 조그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비파나 얼후, 고쟁 같은 거면 자신 있는데 말이지."

잠시 생각을 정리하던 수빈이 입을 열었다.

"역시.. 이렇게 어려울 땐 부모님의 도움을 받는 게 젤 편하긴 하지."

"부모님?"

"음악의 아버지가 바흐라며?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1번 있지? 뚠뚜루루~ 딴따라라~ 하는 거."

"아. 그건 나도 아는 곡이다."

"그래? 그중 신곡이랑 어울릴 거 같은 몇 마디만 잘라서 베이스로 한번 깔아보자고. 볼륨을 낮추고 계속 반복시켜서 전체적인 곡의 느낌이 어떤지 한번 들어보고 다시 방향을 잡자고. 어차피 부모님 꺼 갖다 쓰는 건 공짜 아니냐?"

"...돌아가신지 오래돼서 저작권이 따로 없으니깐 공짜긴 하지."

"언제까지 가능하겠냐?"

"집에서 하면 느리겠지만.. 회사 녹음실 가서 작업하면 금방 될걸?"

"녹음실? 설마  AR실 말하는 거야?"

"아니. 거기 말고. 가수 1팀 전용 녹음실."

로빈의 말을 듣고 수빈은 자신을 자책했다.

'그동안 바빴다는 핑계로 회사 조직이나 시스템 같은 기본적인 정보 습득을 너무 등한시했는걸. 지금부터라도 정신 바짝 차려야겠다.'

"미안. 내가 정확히 잘 모르겠다. 녹음실 관련해서 설명 좀 해줘라."

"뭐 그동안 네가 관심이 통 없었으니 모를 수도 있지. 우리 회사가 제법 오래됐잖아. 그러다 보니 세월이 흘러가면서 새로운 녹음 장비나 최첨단 프로그램이 계속 들어오게 되고 거기에 맞춰서 녹음실이 하나둘씩 늘어나게 된 거지."

"그랬군. 그럼 지금 몇 개나 되는 거야?"

"총 4개지. 연습생용 하나, 가수 1팀 전용으로 하나, 가수 2팀 전용으로 하나, 마지막으로 가장 최첨단 장비 및 프로그램이 깔려있는 AR실 이렇게 있지."

"그럼 우리는 가수 1팀 전용 녹음실을 이용하면 되는 거네?"

"그렇지. 보통 제1 녹음실이라고 부르는 곳. 거기 가서 작업하면 금방 끝날 거야."

"그래? 그럼 다른 특별한 일 없으면 다 같이 거기로 가볼까?"

잠시 후 멤버들과 다 같이 제1 녹음실에 도착한 수빈은 콘솔 데스크 위에 설치되어 있는 수많은 콘솔 단자들과 모니터를 둘러보면서 감탄을 하였다.

"..멋지군!"

'이전 주인의 기억 때문에 머릿속으로는 알고 있었지만 직접 보니 정말 놀랍군. 진법 역사상 가장 복잡하다는 만상미로진(萬象迷路陣)보다 더 복잡해 보이는데. 하지만 저렇게 복잡한 것들도 결국 원리를 알면 간단하겠지.. 하아. 이 세상에는 공부할게 너무 많아서 정말 행복하군.'

남들이 들으면 돌 맞기 딱 좋은 생각을 하면서 수빈은 의자에 앉았다.

"로빈은 이것들 만질 줄 알아?"

"기본적인 것들만 할 줄 알지. 내가 전문 엔지니어도 아니고.."

"이런 건 어떻게 공부를 하지?"

"간단한 건 엔지니어에게 물어봐서 배우면 되지. 아니면 따로 공부를 하던가."

"따로 공부를 하려면?"

"글쎄. 대학을 그쪽으로 가던가 아니면 다른 엔지니에에게 일대일로 교습을 받던가 해야 되지 않겠어? 정 안되면... 책을 보던가?"

자신이 좋아하는 책이라는 소리에 눈이 번쩍 떠진 수빈이 물었다.

"책? 어떤 책을 보면 되지?"

"저기 저쪽 책상 위에 있는 책꽂이에 꼽혀 있잖아. 장비 및 시스템 매뉴얼."

로빈의 말에 수빈은 벌떡 일어나서 마치 뭐에 홀린 듯 책꽂이 앞으로 다가갔다. 백과사전 두께의 두꺼운 책 3권이 나란히 꼽혀있었다.

- Operating Manual

- System & Program Manual

- Mecahnial & Electronic Manual

"이거... 내가 빌려 가도 되는 건가? 집에 들고 가서 한번 차분히 읽어보고 싶은데."

수빈의 떨리는 목소리에 숫기가 적어 여태껏 멤버들의 대화를 듣고만 있던 케빈이 자신은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수빈아. 너 정말 그걸 다 읽어보게? 엔지니어들도 기본적인 교육만 받고 그런 건 아예 안 읽어본다고. 장비 상태가 이상하면 차라리 AS를 부르지. 누가 그런 걸 머리 아프게 다 읽어보냐."

"그런가? 난 시간 날 때 한번 읽어보고 싶은데. 암튼 내가 빌려 가도 상관은 없는 거겠지?"

"그래. 누가 뭐라 하겠냐. 그 책을 찾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건데. 빌려 가도 될 거다."

로빈의 말에 수빈은 기쁜 표정을 지으며 책을 책장에서 뽑아 들어서 다시 의자로 돌아와서 앉았다. 그때 녹음실 문이 벌컥 열리면서 마빈이 들어왔다.

"마빈. 내가 톡한 거 받은 모양이네. 여기로 바로 온 걸 보니. 화보는 잘 찍고 왔어?"

로빈의 질문에 마빈의 얼굴이 아주 잠깐 굳었다 바로 펴지고 살짝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래. 잘 하고 왔다."

하지만 그때 수빈은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채, 이전 군사 시절 때의 습관처럼 마빈을 대상으로 찰색(察色)을 하며 눈동자를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다.

'흠. 말은 저렇게 하지만 뭔가 맘에 안 드는 일이 있었던 모양인데. 한번 물어볼까?'

그때 마치 마빈이 오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마빈의 핸드폰이 울렸다.

"어. 나 지금 회사로 돌아왔어."

[...]

"그래. 지금 시간 난다. 여기 제1 녹음실이야."

[...]

"알았어. 기다릴게."

마빈이 통화를 끝내자 수빈이 물었다.

"누구랑 통화한 거야? 여기서 만나기로 한거 같은데?"

"가수 2팀에 제니라고. 네가 모르려나?"

잠시 기억을 살펴본 수빈은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는걸. 누구지?"

"데뷔한지 1년쯤 지났나? 여자 아이돌 그룹 [걸프랜드] 메인 보컬인 애야. 걔도 외국에서 오래 생활해서 나랑 가끔 통화를 하는데.. 오늘 갑자기 나를 보고 싶다고 그러네."

"무슨 이유로?"

"나도 모르지. 근데... 넌 뭘 그렇게 꼬치꼬치 캐묻냐? 네가 여자들 만난다고 설치고 다닐 때 난 한 번도 너한테 그런 식으로 캐물은 적이 없었던 거 같은데. 그리고 제니가 내 여자친구도 아니잖아."

계속되는 수빈의 질문에 마빈이 짜증을 내며 말하자 수빈은 속으로 열불이 났다.

'인간아. 누군가 너를 노리고 있는 걸 내가 봐서 그런다. 열받는데 확 그냥 모른척해버릴까 보다.. 하아. 차마 그렇게는 또 못하겠고..'

수빈은 한 손을 들고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플리즈. 폴기브미. 마이 프랜. 다른 사람의 아픈 과거는 그냥 묻어두게나. 그래서 여기로 오기로 한 거야? 제니라는 여자애가?"

수빈의 사과에 조금 기분이 풀린 듯 마빈이 선선히 대답을 하였다.

"응. 금방 올 거야. 제니가 지금 회사 안에 있다고 하니깐."

그때 녹음실 문이 왈칵 열리며 머리를 노랗게 물들인 여성이 소프라노의 톤으로 힘차게 외쳤다.

"하이! 마빈!"

제니로 짐작되는 여성이 녹음실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오자 수빈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쳐다보았다.

처음 보는 여성이었다.

수빈은 처음 보는 그녀의 미모와 몸매를 감상하기 이전에 순간적으로 그녀의 찰색과 눈동자에 집중했다.

그런 자신의 모습에 수빈은 살짝 당황스러웠다.

'좀 전에 마빈 때도 그러더니... 예전 군사 시절 습관이 자연스럽게 발현되는데. 이제 새로운 몸과의 합일이 완전히 끝난 건가?'

수빈은 BBG 멤버들과 한바탕 떠들썩하게 인사를 나눈 후 하이톤으로 마빈과 계속 대화를 하고 있는 제니를 유심히 관찰하였다.

그러다 가끔씩 그녀의 안구(眼球)가 언뜻언뜻 비정상적으로 움직이는 걸 포착하였다.

'호오. 이것 봐라? 이런 움직임은.. 간자(間者)의 눈동잔데.'

잠시 후 그녀가 볼일을 다 마치고 녹음실을 나갔다.

수빈을 제외한 다른 멤버들은 한바탕 폭풍이 지나간 듯 다들 지친 얼굴로 앉아 있었고 마빈은 양손으로 머리를 주무르며 인상을 쓰고 있었다.

"어후. 마빈 형. 제니라는 애는 왜 저렇게 정신없어요?"

"그러게. 보통 때도 좀 활발하긴 했었는데 오늘은 더 정신이 없네."

수빈은 성빈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마빈을 지긋이 쳐다보았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왼쪽 손을 펴고 오른쪽 검지로 왼쪽 손바닥을 천천히 두들기기 시작했다.

군사 시절 상대방의 음모를 파헤치거나 또는 치밀한 계략을 구상하기 위해 깊이 생각에 잠길 때 나오는 습관이다.

전생에서 어떤 생각에 몰두할 때면 항상 들고 다니던 섭선(攝扇)으로 손바닥을 두들기던 습관이 부지불식간에 현생에서 다시 나온 것이다.

옆에 앉아있던 케빈은 그런 행동을 하는 수빈을 보며 의아한 생각이 들어 물었다.

"수빈아. 지금 손가락으로 뭐 하냐? 마음속으로 신곡 생각하면서 박자 맞추는 거야?"

케빈의 질문에 생각에서 깨어난 수빈은 좀 전에 자신이 한 행동을 자각하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이제 합일이 끝난 게 확실한가 보군. 행동이나 습관 등이 자연스러워졌어.'

"케빈. 혹시 볼펜이나 조그만 몽둥이 같은.. 아! 너 혹시 지금 스틱 가지고 있나?"

"드러머니깐 연습용 스틱은 항상 들고 다니지. 근데 그건 왜?"

"잠깐 하나만 나 좀 빌려줘라."

케빈에게서 스틱을 하나 빌린 수빈은 오른손에 스틱을 쥐고 왼쪽 손바닥을 천천히 몇 번 시험 삼아 두들겨 보았다.

"딱 좋군."

스틱으로 손바닥을 천천히 두들기며 수빈은 다시 깊은 생각에 잠겼다.

잠시 후 모든 생각을 정리하고 깨어난 수빈은 마빈을 쳐다보았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나 혼자서 조용히 알아볼 수도 있겠지만 이런 문제는 당사자인 마빈이 알고 있어야 될 문제인 게 맞겠지. 직접적으로 물어볼 것들도 있고 하니...'

마음을 결정한 수빈은 마빈을 불렀다.

"마빈!"

"응? 왜?"

"이리로 가까이 와봐."

마빈이 가까이 다가오자 수빈은 마빈의 눈을 응시하며 낮은 목소리로 한자하나 끊어내듯이 말하였다.

"Do you trust me?"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