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
7 - 3
수빈은 사방을 두리번거리다 차 앞 유리창을 통해서 보이는 표지판을 발견했다.
- 판문점 300m
순간 뒤통수를 후려치는 하나의 생각이 들었다.
'아아. 어제 기가 많은 곳을 찾다가 아마존 밀림 같은 원시림을 생각했었지. 하지만 한국에도 그런 곳이 있었어. 사람의 손길이 일절 닿지 않는 전인미답의 땅. DMZ(비무장지대). 지난 70여 년간 아무도 발을 들여놓지 않은 자연 그 상태로의 땅. 그걸 깜빡했었군.'
운전을 하고 있는 매니저에게 물었다.
"성철이 형. 오늘 우리가 판문점에서 공연하는 건가요?"
"아냐. 판문점에서는 못하고 약간 옆쪽에 위치한 군부대 내에 조그마한 특설무대가 마련되어 있어. 거기서 파주랑 파평 쪽에 퍼져있는 25사단 국군장병들 위주로 위문공연하는 거지."
"아. 그렇군요."
대답을 하며 수빈은 1km 정도 떨어진 북쪽 상공에서부터 그 뒤로 쭉 농밀하게 가득 들어찬 넓은 띠 형태의 기를 쳐다보았다.
'저 정도면 기의 밀도가 서울시내에 비해 5배는 되겠군. 헤이리에 갔을 때만 해도 안 느껴지던 게 DMZ에 이 정도로 가까이 오니깐 비로소 느껴지네. 그렇다면..'
수빈은 어이가 없다는 듯 살짝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조용히 내뱉었다.
"돌겠군.. 이러면 현역 입대에 전방 철책 근무를 자원(自願) 해야 되는 건가.."
잠시 후 수빈은 특설무대에서 BBG 순서의 공연을 마치고 핑크 베리 공연을 지켜보고 있었다. 자신들의 공연 때에는 수도승처럼 조용히 앉아 있던 군인들이 핑크 베리를 보며 미쳐 날뛰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후. 몇 년 뒤 내 모습을 보는 거 같군. 어떡하던 DMZ에 가득한 기를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해. 안 그러면 정말....'
수빈은 무대 옆에서 입을 벌리고 핑크 베리 공연을 구경하고 있는 매니저를 찾았다.
"성철이 형. 나 자판기에서 커피랑 음료수 좀 뽑아먹게 동전 좀 많이 줘요."
동전을 얻은 뒤 수빈은 화장실에 다녀오겠다고 말하고 근처 자판기에서 커피를 한잔 뽑았다. 그리고 사람의 이목이 닿지 않는 조그만 공터를 찾아갔다.
신속하게 방위를 계산하고 일전 집의 거실에 설치했다가 계속 실패했던 수기집결진을 동전을 이용하여 빠른 손놀림으로 치기 시작했다.
'이 정도의 기면 진법을 발동시킬 수 있는 임계점 값을 넘을지도 몰라. 진법만 작동된다면 기를 이용할 방법을 찾을 수 있어.'
뽑아온 종이컵 커피를 진 한가운데에 조심스럽게 놓은 뒤 감(坎)을 중심으로 한 기본 형태의 진을 치고 바깥에 태(兌)와 손(巽)을 둘러쳐서 빠르게 진법을 완성한 후 수빈은 초조한 마음으로 쪼그려 앉아서 5분여를 기다렸다.
'지금은 일단 테스트만 하는 거니깐 이 정도만 해도 충분할 거야.'
조심스럽게 진법을 해체한 후 수빈은 종이컵을 들어서 커피를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 눈을 감고 조심스럽게 기를 느끼며 삼켰다. 잠시 후 수빈은 눈을 떴다.
'성공이로군. 진법이 작동돼. 작동돼가는 하는데... 효과가 너무 적어. 후. 그렇다면.'
"결국은 현역 자원입대가 확정인가. 하아. 제대로 내공을 익히려면 어쩔수 없겠군."
결과에 입맛이 쓴지 수빈은 입을 쩝쩝 다신 후 다시 공연 현장으로 돌아갔다.
국군장병들 위문 공연을 끝내고 회사로 돌아가는 차에서 매니저가 말했다.
"오늘 다들 공연한다고 고생 많았다. 좀 있다 저녁때 수빈이 [School] 드라마에 래퍼 역할로 카메오 출연했던 거 방영한다더라. 이따가 같이 모니터나 하자."
"같이 하긴 뭘 같이 해요. 저 혼자 집에서 조용히 볼래요."
옆에 앉아 있던 경빈이가 놀라 대답했다.
"어? 수빈이 형. 랩도 할 줄 압니까? 그럼 제가 당연히 같이 봐드려야죠. BBG 공식 래퍼가 저 아닙니까. 제가 평가해 드리겠습니다. 엄중하고 예리한 저의 평가를 한번 받아 보시는 게..."
같이 앉아 있던 성빈이가 동참했다.
"저도 같이 볼래요. 저녁에 별 스케줄 없어요. BBG 리더가 방송에 나온다는데 당연히 같이 봐야죠."
기다렸다는 듯 마빈이 말을 받았다.
"랩이라. 나도 같이 보고 평가해주지."
"이것들이... 단체로 나 놀릴려고 그러는거지?"
결국 멤버들의 고집을 꺾지 못해 다 같이 모니터를 하기로 결정했다. 나중에 소식을 들은 핑크 베리 멤버들도 보고 싶다며 같이 동참했다.
잠시 후 BBG 전용 연습실에서 BBG멤버와 핑크 베리 멤버들이 다 같이 모여서 TV시청을 하였다. [School] 드라마가 시작되었다.
선배 래퍼 역할인 수빈이가 등장하였다.
- 우와. TV로 보니깐 더 잘생겼다.
- 오빠. 멋있어요.
- 인물은 역시 좋단 말이야.
- 하지만 랩은?
이윽고 수빈이 랩을 하기 시작하였다. 따로 편집을 하지 않은 듯 장면전환 없이 풀샷으로 찍은 수빈의 랩하는 장면이 둥 둥 찌기 찌기~ 비트에 올려져 전파를 타고 흘러나오기 시작하였다.
수빈을 놀릴 생각에 웃으며 TV를 지켜보던 경빈이의 얼굴이 점점 진지해지기 시작하였다. 왁자지껄 떠들던 다른 멤버들도 숨을 죽이며 지켜보기 시작하였다.
이윽고 랩이 끝났다. 잠시 정막이 흘렀다. 그리고 잠시 후 감탄의 소리가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 우와. 대박!
- 오빠. 랩 쩔어요.
- 생각보다 훨씬 좋은데?
- 형. 원래 랩도 잘했어요?
- 너무 멋있다. 오빠.
예상치 못했던 사람들의 칭찬하는 소리에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이던 수빈이 경빈이를 쳐다보았다.
"경빈아. 너가 보기에 어떠냐? BBG 공식 래퍼의 평가를 들어봐야지?"
"형. 좋았어요. 약간 아마추어적인 느낌도 나긴 하지만 기본적인 딜리버리랑 리듬이 뛰어나요. 특히..."
"특히?"
"한 번밖에 못 들어서 정확히 판단하긴 어렵지만 랩할 때 묘하게 높낮이가 왔다 갔다 하는 게 매력이 있네요. 뭐랄까? 성조(聲調)? 그런 게 귀에 들리는데 나쁘지 않아요. 특이한 형만의 매력이 있어요."
"성조라. 일전에 찍을 때 담당 피디도 그런 말을 하던데... 혹시 중국어 할 때 사성(四聲) 같은 거랑 비슷한 거 말하는 거니?"
"아. 맞아요. 그거. 그거랑 비슷한데... 한국어니깐 당연히 사성이 없을 건데 묘하게 그런 게 랩 속에 있어요. 귀가 밝은 사람들은 그걸 다 캐치했을 거예요. 근데 그게 나쁘게 들리지 않아요. 심하지 않고 리듬을 타면서 살짝살짝 성조가 있는 게 형만의 매력이 있네요. 형이 이렇게 랩을 잘할지 몰랐어요. 감동인데요..."
"너무 띄운다. 암튼 나쁘지 않다니깐 다행이다."
'전생에 중국어를 썼던 게 그냥 말할 때는 표가 안 나는데 랩할 때 드러나는 모양이네.'
그때 핑크 베리의 에리카가 시청자 반응을 확인하고 있었는지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다.
"수빈 오빠. 오빠 랩한 게 평이 좋아요. 생각보다 훨씬 랩을 잘한다는 게 대다수 사람들의 반응이에요. 별다른 편집도 안 한 거 같은데 잘했다고 다들 멋있다고 난리에요."
"그래? 걱정했는데 다행이다. 나쁜 평은 없니?"
"나쁜 거라면 음... 수빈이가 머리도 나쁘고 성격도 더러워서 쌩 양아치인 줄 알았는데 랩도 제법 하네 정도가 나쁘다고 할까나."
"헐..."
"그리고 그 밑에 댓글도 달렸어요."
"뭐라고?"
"앞으로 래파치라고 불러달라고."
"래파치?"
"랩 좀 할 줄 아는 양아치... 라서 래파치라고..
"..크음."
"그래도 다들 평이 좋아요. 오빠.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래 알았다. 오늘 오빠가 살 테니깐 저녁이나 먹으러 가자. 삼겹살이나 다 같이 먹자. 콜?"
- 콜!
- 오오. 수빈이 짱.
- 감사요. 형님.
- 오빠 짱짱맨!
그때 매니저 핸드폰이 큰 소리를 내며 울리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BBG 멤버들의 핸드폰도 여기저기서 울리기 시작하였고 수빈이의 핸드폰도 울리기 시작하였다.
그날 카메오 역할이 TV로 방영된 걸 기점으로 하여, 수빈이에 대한 평가가 조금씩 좋은 쪽으로 바뀌기 시작하였다.
다음 날 수빈은 박실장과 면담을 하고 있었다.
"수빈이 어제 보니 랩 잘하던데?"
"제가 잘했다기보다는 피디님께서 잘 찍어주신 거죠."
"그래? 암튼 어제 그걸 보고 연락이 사람들한테서 조금씩 오더라. 자기들도 한번 너를 써보고 싶다고.. 이제 사람들 사이에 입소문도 어느 정도 퍼졌고 거기에 증거화면으로 TV 방송까지도 나갔고 해서 여기저기서 앞으로 너를 많이 찾을 거야. 문제적 인간이 담 주 방송되니깐 그것마저 나가고 나면 이제 어디든 회사에서 너를 적극적으로 밀어줄 수가 있을 거다."
"감사합니다.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그래. 좋은 마음가짐이다. 일단 먼저.. 달빛 쪽에서 조연 오디션 본거 연락이 왔다."
"아. 생각보다 빨리 연락이 왔네요. 결과가 어떻게 됐습니까?"
"합격이다. 정감독이 너를 강력하게 밀은 게 주효했지. 이제 주연과 조연 배우들 다 정해져서 두 달 뒤에 영화가 크랭크인 된다. 그래서.."
"네. 그래서요?"
"수빈이 너는 매주 이틀간 액션 연기 연습하러 헤이리에 있는 액션스쿨에 가야 된다."
"네? 그렇게 자주 말입니까?"
"무슨 소리야? 자주는 아니지. 이제 영화 촬영이 두 달밖에 안 남았는데 준비하려면 오히려 시간이 빠듯한 편이지."
"그럼 언제부터 가면 됩니까?"
"오늘부터다."
"...."
잠시 후 수빈은 헤이리에 있는 액션스쿨로 차를 타고 출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