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사 연예인이 되다-17화 (17/236)

# 17

6 - 2

다음 날 새벽같이 일어난 수빈은 거실에 정좌해서 운기토납법을 한차례 끝낸 후 생각에 잠겼다.

'정신(淨身)이 이제 겨우 절반 정도 끝났군. 이 정도면 앞으로 3개월은 더 매달려야 된다는 건데.. 이전 생에서 한 달이면 끝났던 게 7개월로 걸린다라.. 전생에 비해 이 세상의 기가 7분의 1 정도로 줄은 게 확실해.'

답답한 기분을 풀려는 듯 한숨을 크게 내쉰 수빈은 앞으로의 일정을 계산해봤다.

'정신을 끝내고 2단계 세맥까지 끝내려면 아무리 빨라도 11개월이 걸리는군. 그러고 난 뒤 소주천 혈맥을 뚫고 정비하려면 또 한두 달은 걸릴 거고.. 그럼 앞으로 1년은 족히 지나야 소주천이 가능하다는 말인데.. 후우. 느려도 너무 느려. 빠르게 진행할 수 있는 다른 방도를 빨리 강구해 봐야겠어. 이 세상은 진법도 작동 안 하니 미쳐버리겠군..'

생각을 정리한 수빈은 권법을 연습하기 위해 일어서서 가볍게 몸을 푼 후 자세를 취했다.

전날 예상치 못했던 정제된 살기를 느낀 후 크게 경각심을 가진 수빈은, 오늘부터 새로이 얻은 몸으로 권법을 익히기로 마음먹었고, 권법 중에서 기초가 되는 육합권을 먼저 익히기로 결정했다.

이전 생의 제갈세가에서 제일 먼저 배우는 육합권의 기수식을 취한 후 호흡을 가다듬으며 세가의 권법교두에게 육합권을 배우던 때를 떠올렸다.

[나이가 어릴 때에는 근골의 성장을 돕고 자세를 바르게 하는 육합(六合)을 배우고 어느 정도 기초가 닦이면 팔괘(八卦)로 넘어간다. 팔괘가 완성된 후에야 비로소 가문비전의 천기미리권(天機迷離拳)으로 넘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럼 먼저 육합권에 대해 알아보자. 육합이라 함은 자신을 중심으로 전후좌우의 사방(四方)과 상하(上下)를 합쳐 육합이라 한다. 이 육합을 기본방위로 하여 시원하게 내뻗는 발의 진각(震脚)과 호쾌하게 내지르는 주먹을 단련하여 일권에 적의 뼈를 부수는 파(破)를 습득하고, 경지에 오르면 두터운 갑옷을 관통하여 내부 장기를 부수는 경(經)의 원리를 터득한다. 따라서 육합권은 전장에서 싸우는 무사의 권이라 할 수 있고...]

잠시 후 수빈은 전생의 제갈세가에서 가장 먼저 배우는 기초 권법인 육합권의 투로에 따라 팔다리를 쭉쭉 뻗으며 끊임없이 방위를 밟아나가고 있었다.

온몸에서 흘러내리는 땀으로 입고 있는 옷이 흥건해질 정도로 육합권을 연습 한 후 샤워를 하였다.

잠시 휴식을 취한 수빈은 매니저가 모는 밴을 타고 YK 사옥으로 출발하였고, 차 속에서 오늘 아침 권법 연습을 하며 느꼈던 생각들을 정리했다.

'육합권의 투로도 훤히 알고 원리도 다 알지만 실제로 몸에 숙달시키는 건 확실히 다른 문제야. 1~2주 정도는 꾸준히 연습해야 팔괘권으로 넘어갈 수 있겠어.. 이런 식이면 팔괘권의 가장 핵심이 되는 니보(泥步)를 제대로 익히려면 제법 시간이 많이 걸릴 거 같은데.. 역시 내공이 필요해. 그러려면 소주천을 빨리 행해야 되는데.. 결국 또 이 세상의 기의 양이 줄은 게 문제로군. 후우..'

답답한 마음에 수빈이 작게 중얼거렸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가 아니라.. 모든 문제는 기로 통하다로군.. 나참.."

수빈의 짜증 섞인 중얼거림을 들은 매니저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수빈아. 혹시 대본을 다 못 외운 거야? 아니면 몸이 안 좋아?"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좀 잘 안풀리는 문제가 있어서.."

"무슨 문젠데? 형한테 말해봐"

"하하하. 별거 아니에요. 요즘 기(氣)가 좀 허한 거 같아서요.."

"그래? 그럼 한약방 가서 보약이라도 좀 지어먹지그래?"

"그런 생각을 안 해본 것도 아닌데.. 과연 이 세상에 제대로 된 보약이 있을까 걱정이네요."

"무슨 소리야. 그래도 안 먹는 것보다 낫지 않겠어? 이번에 오디션 끝나고 나면 형이랑 한약방 좀 가보자. 가서 비싼 걸로 한제 정도 지어먹으면 많이 좋아질 거야. 네가 돈이 없는 것도 아니잖아."

"네. 그래요. 여태껏 다른 일로 바빠서 못 갔는데 시간 날 때 한번 가봐요."

YK 사옥에 도착한 수빈은 연습실에서 대본을 꺼내들고 다시 보고 있었다.

'흠. 좌검 이택민이라.. 캐릭터는 나쁘지 않아. 오히려 같은 조연인 우검 송해섭보다 더 좋은 거 같은데.. 충절을 지키고 의리를 알며 모시는 주군을 위해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리는 성격에.. 어렸을 때부터 조선검을 익혀 검술의 달인이고 특히 몸이 날렵하여 일장의 담장을 한 번의 발구름으로 뛰어넘는다라..'

"뻥이 심하단 말이야. 조선무사가 활을 잘 쓴다는 건 익히 알지만, 1장이면 3미터인데 그 정도를 한 번에 뛰어넘으려면 내가기공에 정통해야 되는데.. 조선의 내가기공이 그 정도 수준은 아니었지 않나? 하긴 뭐 영화니깐.."

혼잣말을 중얼거린 수빈은 다시 대본에 빠져들었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오디션 볼 때가 다가오자 수빈은 명동에 있는 드림픽처스 영화사로 출발하였다.

잠시 후 영화사에 도착한 수빈은 안내를 받아 오디션 대기실로 들어섰다. 여러 사람이 있을 거라는 예상을 뒤엎고 단 한 명의 남자만이 대기실에 앉아 있었다.

'응? 왜 이렇게 오디션 보는 사람이 적지?'

프리우스라는 중소 기획사에 속해 있는 이민우라는 남자답게 생기고 몸이 건장한 신인배우와 통성명을 한 뒤 대화를 나눴다.

"오늘 오디션에 사람이 별로 없네요? 무슨 이유인지 혹시 아십니까?"

"우리가 막찹니다. 이미 몇 번 오디션을 봤다고 들었습니다. 뭐 그렇다고 예전처럼 몇백 명씩 보지는 않지만.. 20여 명 정도 이미 오디션을 봤다고 하더라고요. 오늘까지만 오디션을 본다고 들었습니다."

"아.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성격도 사근사근하고 눈빛도 맑고.. 인간이 괜찮은데..'

그런 생각을 할 때 오디션장 방 안에서 갑자기 고성이 터져 나왔다. 근 5분가량을 이어지던 고성이 멈춘 후 한 명이 오디션 방문을 열고 씩씩대며 대기실로 나왔다.

오디션 대기실로 들어온 턱수염이 덥수룩한 중년의 살집 좋은 남자가 씩씩거리던 호흡을 가라앉힌 후 두 사람을 쳐다보고 입을 열었다.

"자네들이 오늘 좌검 이택민 오디션 보러 온 마지막 팀이지?"

두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휴. 내가 [달빛 속의 호위무사]의 영화감독인 장진석일세.. 미안하네. 오늘 오디션은 취소해야 될 거 같군. 우검을 하기로 한 새끼.. 아니 하기로 한 배우가 갑자기 좌검을 하고 싶다고 연락이 와서 말이야.. 오른팔이 당연히 좋은 건 줄 알았는데 옛날에는 좌의정이 우의정보다 높았다는 걸 깜빡했다고 지금 연락이 와서 말이지.. 하아. 지금 이게 말인지 방귄지.."

영화감독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남자가 들릴 듯 말듯한 낮은 소리로 내뱉었다.

"대본을 넘겨 준지가 언젠데 이제 와서.. 대가리에 똥만 찬 새끼가.."

장감독이 두 사람에게 미안한 눈빛을 보내며 말했다.

"그래서 말이지. 자네들은 내일까지 우검의 대사를 연습해서 와야겠어. 물론 당황스럽겠지.. 그 대신!! 원래는 1차 오디션을 통해서 3명만 따로 뽑아서 액션 연기를 테스트해볼 생각이었는데.. 내 권한으로 자네들은 액션 연기 테스트하는 명단에 그냥 넣어주겠네. 내일 우검의 대사를 외워서 여기 말고 액션 연기 테스트장으로 바로 오게나. 내일 자네들을 포함해서 4명 만을 대상으로 해서 최종 오디션을 보겠네."

장감독의 말을 듣고 수빈은, 지금 당장 우검의 오디션을 봐도 무방하다고 말을 하려다, 순간적으로 옆을 쳐다보았다. 이민우라고 자신을 소개한 신인배우가 당황해하는 모습을 발견했다.

'흠. 굳이 지금 내가 우검의 대사도 다 외우고 있다고 말해봐야 그렇겠지. 어차피 이 자리가 최종적으로 뽑는 자리도 아니고.. 내일 최종 결정이 나는 거 같으니깐 지금은 그냥 가만히 있어야겠다.'

장감독이 내일 있을 오디션 장소를 알려줬다.

"다들 유명한 무술 감독인 정도홍씨 알지? 그 양반이 파주 헤이리 예술인 마을에 정도홍 마샬아트센터를 얼마 전에 개관한 거는 들었나? 거기에서 액션 연기를 볼 거니깐 내일 아침 10시까지 그쪽으로 바로 오게나. 어차피 다들 우검의 대사는 하루밖에 연습할 시간이 없으니깐 그 점은 충분히 감안해서 오디션을 보겠네. 그리고 바로 액션 연기를 테스트하자고. 하아.. 내가 지금 뭐 하는 건지.."

지금 돌아가는 상황에 짜증이 나는지 장소를 말해주며 한숨을 쉬는 장감독을 보고 수빈은 싱긋 웃었다.

'어느 세상이나 양아치는 넘쳐나는 법이지. 이전의 나 말고도 그런 놈이 또 있나 보네..'

다음 날 수빈은 매니저와 함께 10시가 좀 못되어서 헤이리에 있는 마샬아트센터를 찾아갔다.

원래 서울에 있던 서울액션스쿨 문을 닫고 헤이리에 새로 건물을 올려 마샬아트센터라고 이름을 지은 액션스쿨은 새로 지은 건물답게 최신의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웬만한 체육관 보다 넓은 크기를 자랑하고 높은 천장에 매달린 훈련용 밧줄과 와이어용 훈련시설이 곳곳에 보인다. 한편의 높은 단상 아래에는 에어백이 설치되어 낙하 및 추락 훈련을 할 수 있고 곳곳에 깔린 매트에는 대련을 하고 있는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특이하게 한쪽 벽면에는 무(武)라고 적혀있는 커다란 액자가 걸려 있다. 수빈은 시설들을 쭉 둘러보면서 묘한 기분을 느꼈다.

'스턴트맨을 길러내는 학원이라고 들었는데.. 분위기가 학원이 아니라 어디 이름난 무관(武官)에라도 입장한 기분이 드는걸. 흠. 이런 느낌을 아무나 줄 수 있는 건 아니지. 정도홍 이라는 무술감독이 나름 제대로 무를 익힌 감독일 거 같다는 예감이 드는걸..'

수빈이 입구 쪽 마루 위에 가만히 서있으니 운동복을 입고 날렵한 몸매의 젊은 여성이 다가와 오디션 참가자인지를 물어왔다.

수빈이 그렇다고 대답하자 귀에 꼽는 조그마한 수신기와 몸에 차는 마이크를 착용하라고 건네준다.

'액션 연기를 테스트한다더니 이걸로 지시를 내리고 연기하는 걸 관찰하나 보군,'

그때 액션스쿨 안쪽에서 갑자기 날카로운 기세가 쩌릿하게 느껴졌다. 수빈이 놀라 고개들 돌려 안쪽을 바라보니 중년을 막 넘어가는 크지 않은 키의 남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이야. 제대론데.. 지금의 나보다 무조건 윗줄이군. 붙으면 30초? 그 정도면 내 목이 가볍게 날아가겠는걸..'

수빈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중년의 남자를 훑어보았다.

'외공을 상당한 수준까지 익혔군. 내공도 정신 단계는 넘을 듯 말 듯한데.. 세맥은 안될 거 같고.. 지금처럼 기가 형편없는 세상에서 저 정도 수준까지 익히려면 평생을 무에 바쳤나 보군. 근데..'

수빈은 걸어오는 남자의 하체를 집중적으로 관찰했다.

'저 정도 수준의 고수가 걸음걸이가 불안하다라.. 부상인가 보군. 우슬(右膝) 쪽인가.. 내공이 모자라다 보니 외공을 익히다 지나친 신체 혹사로 얻은 부상 같군.'

정도홍 무술감독은 오늘 있는 오디션을 위해서 액션스쿨에 출근했다. 보통은 서울에 있는 사무실로 출근하다가 근 일주일 만에 헤이리로 출근을 하였다.

오디션이 시작될 시간이 다가와 사무실에서 나와서 연습장으로 걸어가던 정감독은 갑자기 온몸에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뭐지? 이런 종류의 시선은 오래간만에 받아보는데..'

마치 포식자가 먹잇감을 살피는 듯한 날카로운 시선을 느낀 정감독은 걸어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두리번 거렸다.

연습장 입구 쪽에 서있는 젊은 청년을 발견하고 정감독은 고개를 갸웃 거렸다.

'설마? 저렇게 젊은 친구가?'

정도홍 무술감독은 입구 쪽에 있는 젊은 청년에게 빠른 발걸음으로 다가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