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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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빈은 YK 사옥에 도착해서 박실장 사무실로 찾아갔다. 박실장이 집 나갔다 돌아온 아들내미를 맞이하듯 반겨 맞았다.
"수빈아. 어서 와라. 녹화가 잘 끝났다는 이야기는 황피디한테 들었다."
"네? 아니 벌써 황피디한테 이야기를 들어셨습니까?"
"그럼. 까딱 잘못하면 내가 바로 김소희나 하이유 찾아가서 싹싹 빌어야 될 판인데.. 너라면 신경이 안 쓰이겠냐?"
"그러게 뭐 하러 그런 무리한 약속을 하셨습니까?"
"이놈 보게? 안 그랬음 돌대가리로 소문난 네가 그 프로에 출연이 가능했겠냐?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소리지.. 내가 그렇게 베팅을 한 덕분에 네가 거기 출연을 할 수 있게 된 거야."
"하아. 담부터는 그런 베팅은 하지 마시죠. 제가 부담됩니다."
"베팅을 하려면 제대로 해야지. 그리고 결국 내가 본 게 정확하다는 게 판명 났잖아? 나는 내가 사람 보는 눈을 믿는다. 여태껏 그거 하나로 이 바닥에서 버텨왔고.."
"네 네. 알아모시겠습니다. 내일 제 오디션이 결정됐다고요?"
"그래. 내일 명동에 있는 드림픽처스에 가서 오디션을 봐라. [달빛 속의 호위무사] 오디션이 있어."
"그런 영화는 저 같은 초짜는 위험해서 안 쓴다면서요? 용케도 제가 오디션 참가가 가능하게 됐네요?"
"너에 대한 입소문이 빠르게 그쪽 영화사에도 퍼져서 겨우 가능하게 되었지. 당연히 주연은 아니고.. 너도 대본을 읽어봐서 알겠지만.. 왕궁에서 임금이 새로 들인 후궁에 의해 사가(私家)로 추방된 선화 옹주(翁主)를 호위하는 무사 김동수가 남자 주연이지. 그리고 김동수를 따라서 같이 호위무사를 하는 좌검(左劍) 이택민과 우검(右劍) 송해섭이 남자 조연 역할인데.. 내일은 좌검 이택민 오디션이 있다. 무사 김동수랑 우검 송해섭은 이미 배우가 확정됐어."
"아. 그렇군요."
"거기 조연이 웬만한 저예산 영화 주연보다 훨씬 더 사람들 눈에 띌 수 있어. 열심히 해서 꼭 뽑히도록 해야 돼.."
"넵. 알겠습니다. 내일 가서 열심히 하도록 노력해 보겠습니다."
박실장은 슬쩍 수빈을 쳐다보며 당연하다는 말투로 수빈을 바라보며 물었다.
"대본은.. 오늘 하루면 충분히 다 외울 수 있겠지?"
"하하하. 네.. 오늘 밤에 읽어보면 다 외울겁니다."
수빈의 자신있는 대답에 박실장이 감탄을 하며 손으로 탁자를 가볍게 몇 번 내려쳤다.
"역시! 대단해. 정말 엄청난 능력이야. 잘 모르는 인간들이야 기억력 좋은 게 연기하는데 무슨 상관이냐고 그러겠지만.."
"상관이 많은가요?"
"그럼.. 너도 한번 생각해봐. 한국처럼 드라마 판에서 쪽 대본이 난무하는 곳이 세상천지(世上天地) 그 어디에도 없다. 오늘 저녁 방영일인데 새벽에 대본이 쪽으로 촬영장으로 날아오는 경우가 허다한 게 그 바닥이야. 머리 나빠서 대본 외우는데 시간을 많이 쓰면 연기의 질이 자연적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어. 배우 스스로도 급하게 암기하느라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힘들고, 피디가 이것저것 시도해보고 좋은 장면만 뽑아서 편집할만한 시간 자체가 없어진다고.."
"아하. 그렇군요. 그래도 영화는 좀 더 상황이 낫지 않은가요?"
"도긴 개긴 이지.. 빌릴 수 있는 영화 세트장은 한정돼 있고 찍으려는 작품은 많아서 항상 밀려있지.. 한번 스케줄 결정돼서 빌리면 정해진 시간 내에 뽕을 뽑아야만 되거든. 그리고 실제 길거리를 통제하거나 건물 같은 거 빌려 찍는 것도 결국 시간과의 싸움이야. 짧은 시간 내에 감독이 원하는 커트를 여러 각도로 시도해 보려면 배우가 머리가 좋아야만 된다고. 대사 몇 줄 바뀌었다고 NG 자꾸내고 그러면 시도 자체를 몇 번 해보지도 못하고 끝내야 된다고.. 시간이 절대적으로 돈인 곳이 그 바닥이야. 한번 찍을 때 동원되는 스텝 숫자가 몇 명인데.. 그리고 결정적으로.."
"결정적으로?"
"연기는 하다 보면 좋아져. 계속해서 연기를 배우고 실전 경험을 쌓다 보면 아무리 재주 없는 놈들도 결국은 늘게 돼 있어. 하지만.. 머리 나쁜 건 평생 못 고쳐. 피디나 감독이 용빼는 재주가 있어도 배우 머리 나쁜 건 절대 못 고친다고.. 너 배우들 중에 원로 중의 원로인 이순제 선생님께서 얼마 전에 하신 말씀 못 들어봤냐?"
"잘 모릅니다."
"그 분이 올해 나이가 83이지. 80이 넘어서 체력이 떨어지는 건 경륜이나 연륜으로 어느 정도 버틸 수 있지만, 머리가 안 따라줘서 대본을 못 외우게 되면 그날이 바로 나의 연기생활 마지막인 날이다 라고 말씀하셨지.. 그만큼 배우에게 대본을 암기한다는 게 중요한 거야. 그리고 자기 거만 달달달 외워서 연기해봐야 평생 발연기 한다는 소리만 듣지.."
박실장이 허리를 숙이며 수빈을 진지하게 바라보았다.
"연기를 잘한다는 소리를 들으려면 말이야.. 적어도 대본 전체를 이해하고 다른 사람의 대사나 자기 상대 배우 대사 정도는 줄줄줄 꿰차고 있어야 그나마 좋은 연기를 할 수 있는 거야. 그런 의미에서 넌 아주 좋은 자질을 가지고 있는 거다. 남들은 가질래도 가질 수 없는 그런 절대신검을 손에 들고 있는 거지. 이제 넌 그걸 잘 휘두르는 방법만 터득하면 돼."
'어릴 때부터 나름 칼질 잘 한다는 소리를 쭉 듣고 자라긴 했는데 말이죠...'
"그런 의미에서 넌 이제부터 노력만 하면 되는 거야. 그때도 말했지만 이제 세상을 한번 훨훨 날아봐야지?"
'후우. 이 양반은 저 나이에 열정이 넘치시는군. 나도 열심히 노력해야지.'
"네. 잘 알겠습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박실장과의 면담을 마친 후 수빈은 BBG 전용 연습실로 내려갔다.
'누구누구 있을려나? AR실 정팀장 문제를 좀 의논을 해봐야 되는데..'
연습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마빈과 케빈 두명이 앉아서 의논을 하고 있었다.
'다른 멤버들은 어디 간 모양이군. 잘됐네. 3명이서 의논을 좀 해봐야겠다.'
수빈이 들어오자 마빈과 케빈이 손을 들어 인사를 했다. 수빈도 손을 들며 인사했다.
"안녕. 다른 애들은 다들 어디 갔나보지?"
"화보 촬영이 있다고 2명 불려갔고 경빈이는 구경한다고 그냥 따라갔지."
마빈의 말에 수빈은 고개들 끄덕였다.
"둘다 저녁은 아직 안먹었지? 내가 삼겹살 살테니깐 같이 밥먹으러 가자."
"네가 저녁을 산다고? 너 설마... [문제적 인간] 가서 한문제도 못 풀고 온 거야? 그래서 우리 둘 중에 한 명 데려가서 다시 녹화를 하려고.."
수빈은 마빈의 말에 짜증을 내며 대답했다.
"이놈들아! 너희들 데리고 안 간다고!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냐.. 촬영 잘 끝내고 왔으니깐 걱정 말고 같이 밥이나 먹으러 가자고."
잠시 후 수빈은 YK 근처에 있는 식당에 앉아서 고기를 굽고 있었다. 집게를 들고 고기를 뒤집으면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케빈. 내가 생각을 해봤는데.. 너가 쓴 가사 저작권 뺏긴 문제 말이야. 이거 해결하려면 시간이 좀 필요할 거 같아."
케빈은 수빈의 말에 별 상관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난 신경 안 써. 이미 지나간 문제라 해결돼도 좋고 안돼도 상관없어. 그러니깐 수빈이가 너무 해결하려고 노력 안 해도 돼. 네가 정신을 차린 뒤 미안해서 리더 역할을 하려고 그러나 본데.. 난 그러다 네가 다칠까 봐 오히려 걱정이다."
"흐음. 나도 무모하게 당장 덤빌 생각은 없어. 이일대로(以逸待勞)라.. 손자가 말했지. 우리의 전력이 약하면 적이 약해질 때까지 기다려야지. 지금 현재로는 우리의 힘을 키우면서 차후에 기회를 노리는 수밖에 없어. 당장은 힘들다."
마빈이 수빈의 말에 호응하듯 수빈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그래 그래. 알았으니깐 그런 건 다 제쳐두고.. 고기 익었으니깐 고기나 열심히 먹자고. 살면서 처음으로 수빈이한테 얻어먹는 저녁인데.. 감격스럽다."
"앞으로 내가 자주 밥을 사도록 하지. 명색이 내가 리더인데 자주 쏴야 되지 않겠어? 하하하"
수빈은 마빈과 케빈이 고기를 먹기 편하도록 가위로 자른 후 자신도 한점 집어서 입에 넣었다.
고기 한점을 입에 넣고 막 한번 씹었을 때였다.
갑자기 수빈의 얼굴이 창백해지며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이것.. 봐라..?'
수빈의 굳은 얼굴을 본 마빈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너 왜 그래? 고기가 덜 익었어?"
"아냐. 너무 급하게 씹으려다 혀를 잘못 씹어서 그래. 괜찮으니깐 신경 쓰지 마라."
수빈은 마빈의 말에 얼굴을 풀고 대답한 후, 겉으로는 태연하게 다시 고기를 씹기 시작하면서도 속으로는 모든 신경을 팽팽히 당기기 시작했다.
'이건.... 이 세상에 와서 처음 느껴보는 잘 정제된 살기(殺氣)다. 누굴 노리고 있는 거지? 나인가 아니면..'
수빈은 고개를 슬쩍 뒤로 돌려 카운터 쪽을 쳐다보며 외쳤다.
"이모. 여기 소주 2병만 좀 주세요."
다시 고개를 돌린 후 수빈은 고기를 집었다.
'빌어먹을.. 누군지 못 찾겠군. 세맥만 됐어도 이 정도는 한방에 바로 알 텐데. 후우.. 예전보다 감각이 너무 무뎌졌어. 다른 방법을 써야겠군.'
"얘들아. 우리 기념으로 사진 좀 찍자."
수빈은 오른쪽에 앉아 있는 케빈에게 슬쩍 몸을 기울여서 어깨동무를 한 후 셀카를 찍었다.
'흐음. 케빈은 아닌 거 같은데..'
다시 좌측에 앉아 있는 마빈에게 어깨동무를 하면서 셀카를 찍었다.
'이쪽이로군. 목표는 마빈인데.. 마빈 이놈은 도대체 누구에게 원한을 산 거지? 이 정도로 정제된 살기를 풍길 정도면 웬만한 도시의 흑사회에서 일급살수 정도는 할 실력인데.. 뭐 얻어먹을게 있다고 평범한 아이돌한테 이 정도 급의 살수가 달라붙는 거지?'
수빈은 찍은 셀카를 쳐다보며 살기를 풍기는 게 누구인지 차분하게 살펴보았다.
'호오. 이놈이로군. 얼굴도 평범하고 옷 입은 것도 헐렁해서 단련된 몸매가 겉으로 잘 드러나지는 않지만.. 눈빛이 사람 여럿 잡아 본 눈빛이야. 일반적인 조폭이나 깡패들과는 차원이 다른 놈인데..'
그러는 새 살기가 서서히 옅어지기 시작하더니 사라져버렸다.
'갔나 보군. 살행전 목표에 대한 염탐? 아니면 정보수집? 그것도 아니면 감시?'
수빈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이전 같았음 떼거지로 덤벼들어도 몇칼에 간단하게 다 쳐죽일 수준인데.. 지금은 일대일로 붙어도 쉽게 이긴다고 장담 못하겠는걸.. 내가 이 세상에 와서 너무 풀어져서 안심하고 지냈어.. 앞으로 무공에 신경을 더 써야만 하겠군.'
수빈이 그렇게 고민을 하고 있자 마빈이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차며 수빈의 술잔에 소주를 따랐다.
"젊은 놈이 뭔 고민을 그렇게 하냐? 그냥 술이나 마시라고.."
'어후. 이 새끼가.. 너 때문에 그런다! 너 때문에! 남의 속도 모르고..'
수빈은 마빈이 따라준 술을 원샷 하며 앞으로의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일단 내일부터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