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사 연예인이 되다-11화 (11/236)

#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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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에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핸드폰으로 [문제적 인간]이라는 TV 프로그램을 찾아서 보았다.

'뭐야 이건.. 방송 프로그램이 뭐 이따위야? 수수께끼랑 도형과 숫자풀이하는 거 아냐..'

수빈은 문제적 인간이 자신의 예상과 전혀 다른 프로그램인 걸 확인하고 한숨을 내쉬며 작게 중얼거렸다.

"후.. 수수께끼야 아직 이 세상에 적응이 덜 돼서 가끔 헛갈리긴 하지만.. 도형 문제와 숫자 문제는 진법총해서(陣法總解書)나 기관도해서(機關圖解書) 한 권씩만 풀어본 사람들도 다 맞추겠군. 이건 뭐 준비고 뭐고 할 필요가 없네.."

수빈은 문제적 인간에 대한 관심을 깨끗하게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이윽고 집에 도착한 수빈은 핸드폰을 거실 소파 위에 올려두고 깨끗이 샤워를 하였다.

그런 다음 다시 거실로 나와 바닥에 정좌를 하고 앉았다.

잠시 심호흡을 한 뒤, 서서히 정신을 집중하며 눈을 반개하고 자신의 몸을 관조하기 시작하였다. 그 상태에서 호흡을 조금씩 천천히 길게 늘였다.

이전 생에서 모든 명문대파에서 행하는 기초적인 운기토납법(運氣吐納法)이다. 아침과 저녁 두 번을 행하는 운기토납법으로 신체 내부를 깨끗이 씻어내야만이 그다음 단계로 각파에서 전해 내려오는 비전(秘傳)의 내공심법을 배울 수 있게 된다.

오랜 세월의 경험을 통해, 이런 단계적 절차를 무시하고 바로 비전내공법을 익힐 경우, 주화입마의 위험이 급격히 높아진다는 걸 알기에 금기(禁忌) 시 된지 오래다.

토납법을 시작한 지 30분 정도가 지나자 수빈은 눈을 떴다.

"하아.. 갑갑하군. 3개월이 다 되어가는데 아직도 1 단계를 못 끝내고 있네.."

수빈은 잠시 이전 생의 기억을 떠올렸다.

'전생에서는 신체 내부의 장기들을 깨우고 씻는 정신(淨身)에 28일, 혈맥을 깨우고 씻는 세맥(洗脈)에 30일, 혈도를 깨우고 활성화하는 활락(活絡)에 33일 걸렸지. 다 합쳐서 3개월만에 예비단계를 다 끝냈었는데.. 이건 뭐 정신 1단계에서도 한 세월이군.'

짜증이 잔뜩 묻은 목소리로 수빈이 내뱉었다.

"최소한 세맥은 끝나야 소주천(小周天)을 시도해볼 텐데.. 이 세상은 기가 너무 적단 말이야.. 진법도 그렇고 내공도 그렇고 당최 제대로 작동을 안 하는군. 이래서야 언제 가문의 혜지태허무량심법(慧智太虛無量心法)을 운공하나.."

답답한 마음에 수빈은 소파 위의 핸드폰을 집어서 포탈에 들어가 검색을 하기 시작하였다.

'흐음.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역시 원인은 이것뿐이야. 전생의 인류는 10억이 채 안되었는데 지금은 지구상의 인구수가 70억이나 된단 말이지..'

"결국 인간의 개체 수가 증가한 만큼 자연의 기가 줄어들었다는 걸로 설명이 되는데. 그렇다면 최절정을 넘어 화경으로 가려면 인간이 60억 정도는 죽어야 가능하겠는걸.. 그렇다고 현대 과학에서 주장하는 평행우주론을 믿기엔 과거의 역사가 내가 알고 있는 것과 너무나 똑같단 말이지.. 후. 내 머리로도 명쾌한 해답을 못 구하겠는걸. 일단 천천히 생각하기로 하고 급한 것부터 처리하자.."

수빈은 핸드폰으로 집에 오기전 매니저에게 부탁하여 받아온 음악을 틀었다.

BBG 멤버 중 영국 출신 멤버들이 이전 영국에서 밴드 활동을 할 때의 음악들이다.

수빈은 두 번 정도 듣고 나서 자신의 감상을 정리했다.

'흠. 나름 좋긴 한데 문제점도 명확하게 들리는군. 이걸로 애들을 한번 낚아볼까.. 앞으로의 연예계 활동을 위해서는 같은 멤버들부터 우선 친해져야겠지.'

"시나리오도 봐야 되고, 현대의 과학도 배워야 되고, 의학도 공부해야 되고, 이전 생에서 익혔던 외국어들도 현대어랑 비교해서 봐야 되고, 시사나 상식도 읽어봐야 되고, 새로운 음악들도 챙겨 들어봐야 되고.. 배울게 많고 할게 너무 많아서 행복한걸. 하하하"

다른 사람들이 들으면 욕먹기 딱 좋은 소리를 하면서 수빈은 서재로 들어갔다.

이틀 동안 특별한 스케줄이 없어서 집에 틀어박혀 운기토납법과 공부만 하던 수빈은, BBG 멤버들이 각자의 스케줄을 끝내고 오늘 다 함께 모인다는 연락을 받고 아침 일찍 YK 사옥으로 나갔다.

BBG 전용연습실로 가니 자신을 제외한 모든 멤버들이 모여 있었다.

마치 연습실 가운데에 38선을 그은 것처럼 영국 출신 멤버들과 연습생 출신 멤버들이 서로 거리를 둔 채 앉아있다.

각자 자신의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음악을 듣거나, 문자를 하거나, 게임을 하는 등 자신의 볼일을 보고 있었다.

수빈이 연습실로 들어서자 나름 친하게 지내는 연습생 출신 멤버들인 경빈과 성빈이 손을 들어 가볍게 인사를 해왔다.

하지만 영국 출신 멤버들은 수빈을 소 닭 쳐다보듯 힐끗 쳐다본 뒤 각자 다시 자신의 할 일을 하였다.

'멤버들 간의 갈등이 장난이 아니군. 내가 앞으로 편하려면 이걸 바로잡아야 된다는 건데.. 뱀을 잡으려면 역시 뱀 대가리를 쳐야지.'

수빈은 영국 출신 멤버들의 리더 격인 마빈을 찾았다.

야리야리한 얼굴에 귀여운 인상의 마빈은, 연습실 벽 쪽에 등을 기대고 양무릎을 세우고 앉아서 귀에 이어폰을 꼽고 음악을 듣고 있었다.

수빈은 마빈에게 가까이 다가가 바로 앞쪽에 정좌를 하고 앉아서 마빈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수빈이 아무 말없이 자신의 앞에 앉아서 계속 쳐다보자, 짜증이 난 마빈은 얼굴을 찌푸리며 내뱉었다.

"what? I don't wanna be disturbed right now."

(뭔데? 난 지금 방해받고 싶지 않다고.)

'헐? 이 자식.. 이 몸의 기억으로는 한국말을 잘한다고 돼있던데 영어로 말하네? 나랑 말 섞기 싫다는 거겠지.. 그렇다고 내가 그냥 물러날 수야 있나.'

"hey lad, what are you listening to?"

(어이 친구. 지금 듣고 있는 게 뭐야?)

영어로 대답을 하자 마빈이 살짝 놀란 눈을 하고 수빈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수빈이 해맑게 표정을 지으며 빙그레 웃었다.

'한국 속담에 좋은 말이 있지.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 맞는 말이야. 나를 보고 웃으면 기분 나빠다고 칼로 목을 딸 수는 있지만.. 침 뱉기에는 좀 그렇지.'

살짝 고민을 하던 마빈은 아무 말없이 이어폰 한쪽을 빼서 건넸다. 수빈은 고맙다는 듯 고개를 살짝 끄덕거린 후 귀에 꼽았다.

'새끼가.. 나랑 말 섞기 싫다는 거지.. 음? 뭐야? 가사가 없군. 사운드트랙인가..'

잠시 음악을 듣던 수빈이 입을 열었다.

"wow, this music.. this is unexpected..."

수빈이 음악을 듣다가 살짝 놀랬다는 듯이 입을 열자, 마빈이 같잖다는 듯 입가에 비웃음을 띄운 채 말했다.

"네가 음악을 들으면 아냐? 오늘 나한테 갑자기 왜 접근하는데?"

"하하. 이제야 한국말로 하는군. 마빈.. 갑자기 인도로 여행을 가고 싶은 거야?"

수빈의 말에 마빈이 흠칫하는 게 느껴진다.

".....너. 갑자기 무슨 소리야?"

"난 네가 영국 출신이라길래 비틀스나 콜드플레이 아니면 아델 노래라도 듣고 있으려니 했는데.. 미국 출신의 스티브 원더라니.. 너무 예상 밖이라 깜짝 놀라서 말이지."

수빈의 거침없는 말에 마빈이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넌.. 이게 스티브 원더라는 걸 어떻게 아는 거야?"

"하하. 듣고도 모르면 바보게? 1979년 발표된 스티브 원터의 Journey Through The Secret Life Of Plants 앨범에 실려있는 거잖아.. 지금 나오는 게 4번 트랙의 Voyage To India 아냐. 마빈은 인도에 한번 가보고 싶은 거야?"

'이 사람아.. 내가 병원에서 미쳐 챙겨 못 들은 100대 명반부터 시작해서 세대별, 장르별 주요 음악들을 이틀 동안 챙겨 듣느라 고막에 구멍이 날 지경인 사람이다..'

"으음.."

자신의 말에 대답을 못하고 신음성만 흘리는 마빈을 보고 수빈은 다시 빙그레 웃었다.

"그게 아니면.. 마빈이 요즘 많이 힘든가 봐. 뉴에이지 음악을 다 듣고 있다니.. 명색이 내가 리던데 힘든 일 있으면 말해라고.. 언제든지 들어줄 테니.."

수빈의 리더랍시고 마치 위로하는듯한 말투에 마빈이 어이없다는 듯 째려보았다.

'분위기는 어느 정도 나쁘지 않게 잡힌 거 같으니깐..'

수빈은 째려보는 마빈을 깔끔하게 무시하고 말을 이어갔다.

"내가 너희 영국 출신 멤버들.. 너랑 케빈과 로빈이 이전에 밴드할 때 했던 음악에 관심이 생겨서 요 며칠 챙겨 들었는데 말이야.."

"네가 그걸 챙겨 들었다고?"

"그래. 내가 그걸 듣고 어떤 생각이 하나 들었는데 말이야. 네가 화를 낼까 걱정되긴 하는데.. 들어도 화 안 낼 거지?"

"후우. 이 인간이 오늘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일단 먼저 말해봐."

"그래도 같이 음악 하는 동료로서 말하자면.. 약점이 하나 보이던걸."

수빈은 자신과 마빈과 싸우지 않고 계속 음악과 관련된 대화를 나누자, 신기한 듯 쳐다보던 나머지 멤버들이 두 사람의 대화에 조금씩 귀를 열고 집중하는 걸 감각적으로 느꼈다.

"흐음. 직접적으로 얘기하면 좀 그렇고.. 마빈. 세계에서 가장 많이 연주되는 피아노 협주곡이 뭔지 혹시 알아?"

"...난 클래식 쪽으론 좀 약해서.. 잘 모르겠는걸."

"그래? 세계에서 가장 많이 연주되는 피아노 협주곡은 말이야. 라흐...."

그때 옆에서 누군가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이지.."

누구인지 수빈이 고개를 돌려 확인하니, 예전 영국 밴드에서 키보드를 담당했던 로빈이 약간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오호. 역시 건반을 했던 친구라 관심이 가는 모양이군.'

수빈의 눈에는 로빈의 등 뒤에 낚싯줄에 걸려서 퍼득이는 물고기의 환영이 보였다.

'너도 낚였구나.. 좋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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