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사 연예인이 되다-10화 (10/236)

# 10

4 - 1

수빈은 충무로로 가는 차 속에서 떠나기 전 박실장과 나눈 대화를 곱씹어 보았다.

- 수빈아. YK가 아무리 힘이 있어도 지금 네 이미지로는 그 어떤 영화에도 푸시를 할 수가 없어. 대사가 두 줄만 되어도 못 외운다는 너의 멍청한 이미지! 그걸 최대한 빨리 깨야만 된다.

- 아무래도 그래야겠죠.

- TV 쪽은 어제 한 카메오 역할로 입소문이 돌고 있을 거야. 영화계에도 빨리 입소문을 퍼뜨려야 돼. 오늘 오디션은 그걸 염두에 두고 잡은 거니깐 가서 네 능력을 숨기지 말고 한껏 드러내봐. 세상에 태어났으면 한번 하늘 높이 날아봐야지? 수빈아. 더 이상 숨지 말고 껍질을 깨고 세상으로 나와라.

회상을 마친 수빈은 작게 혼잣말을 하였다.

"숨겼다라.. 내가 환생했다는 사실 외에는 특별히 숨긴 것도 없지만.. 원칙적으로 맞는 말이긴 하지. 이왕 새로 태어난 거 적극적으로 살아봐야지. 이제부터 세상에 나를 드러내고 알리는 거야.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주목받는 연예인이라.. 한번 살아볼만 하잖아."

수빈은 마음을 굳게 먹고 스스로의 각오를 다졌다.

잠시 후 수빈은 충무로에 있는 영화사인 명성 스튜디오에 도착해서, 2층에 위치한 오디션 대기실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오늘 오디션에 참가하는 걸로 보이는 여섯 명의 남자들이 의자에 앉아 있었고, 수빈이 방안으로 들어오자 남자들의 시선이 집중된다.

그리고 곧 그들 사이에 적대감이 급속도로 퍼졌다.

'다들 날 알아보는군. 내가 대사를 못 외우는 걸로 이 바닥에 소문이 짜하다 보니.. 저들 눈에는 회사 힘으로 배역을 딸려고 하는 쓰레기가 온 걸로 보이겠지.'

수빈의 입가에서는 미소가 떠나질 않고 있었다.

'그래. 이거지. 온몸으로 느껴지는 살기(殺氣)와 적의(敵意). 내 사지를 동강내고, 배를 갈라 내장을 훑고, 목을 쳐 하늘로 날려버리겠다는 굳은 의지들. 이제야 제대로 사람 사는 세상에 온 것 같군. 마치 고향에 온 기분이야..'

수빈이 계속 웃음을 지으면서 빈자리를 찾아가서 앉자, 앉아 있던 남자들의 살기가 더욱 농밀해졌다.

'좋구나.. 예전에 혼자서 사천 쪽 촉산을 지날 때였나. 녹림십팔채 소속인 흑호채 애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한판 붙었을 때랑 느낌이 비슷한걸. 그때 딱 두 칼에 다 쳐죽였던 기억이..'

수빈이 기분 좋게 추억 속을 떠돌 때, 검은 뿔테를 낀 영화사 직원으로 보이는 여성이 대본으로 보이는 종이뭉치를 들고 대기실로 들어왔다.

"오디션 지원자 여러분들. 일정을 간단히 설명드릴게요. 일단 대본을 하나씩 받으세요."

여성이 A4 두장으로 된 대본을 하나씩 나눠준뒤 다시 설명을 하였다.

"오늘 오디션 보는 역할은 주인공 남자의 어머니가 살인누명을 쓴 아들의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해 무료로 법률 상담을 받는 장면입니다. 평생 살림만 하다가 상담을 받으면서 가진 게 없는 자에게 세상이 얼마나 비정하고 잔혹한지를 깨닫게 되는, 영화에서 일종의 변곡점 역할을 하는 씬이에요."

잠시 뜸을 들인 뒤.

"첫 번째 씬은 상담사가 부드럽게 어머니를 설득하는 장면이고요. 두 번째 씬은 그 다음날 다시 찾은 어머니에게 냉정하게 굴면서 포기를 강요하는 장면입니다. 장면은 두 씬 밖에 되지 않지만 대사가 길고 법률 관련 용어가 많이 들어가서 대사 치는데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리고 성영식 총감독님이 이 장면들을 풀씬으로 원테이크에 찍길 원합니다. 그래서 급하게 여러 기획사에 부탁해서 대사 암기력이 뛰어나고 연기가 되는 분들로만 추천받았습니다. 물론 두씬 밖에 안돼서 출연료는... 얼마 안 나갑니다. 이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잠깐 숨을 돌린 여성이 말을 이었다.

"나눠주신 대본을 다 암기하신 분들은 저쪽 문을 열고 오디션장으로 들어가셔서 심사위원들 앞에서 테스트를 받으시면 되겠습니다. 아무쪼록 다들 좋은 결과 있으시길 바랍니다."

뿔테를 낀 여성이 말을 끝마치고 돌아설려는 순간 수빈이 손을 번쩍 들었다.

"네. 질문 받겠습니다. 궁금하신거 있으시면 물어보세요."

"대본을 다 외웠으면 특별한 절차 없이 바로 오디션장으로 들어가면 됩니까?"

"네. 다 외우시고 그냥 들어가시면 됩니다."

"잘 알겠습니다."

말을 마친 수빈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서서 오디션장으로 걸어가자 영화사 직원이 깜짝 놀라며 수빈의 팔을 잡았다.

"지금 어디 가세요?"

"오디션 보려구요."

"대본을 다 외우셔야죠. 지금 장난치시는 거예요? 역할이 맘에 안 드시면 그냥 돌아가세요. 저희도 이 역할의 어려운 점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안 붙잡습니다."

"나눠주신 대본은 이미 다 외웠습니다만.."

수빈의 말에 오디션 대기실 방에 잠시 정적이 찾아왔다. 그리고 욕설이 터져 나왔다.

- 씨바..

- 대본을 미리 빼돌렸군..

- YK 하는 짓이 완전히 쓰레기네..

- 역시 더러운 바닥이야..

- 현장에서는 두 줄도 못 외운다는 새끼가..

여기저기서 튀어나오는 욕설들을 들으면서 수빈은 한 여름 해를 본 해바라기처럼 활짝 웃었다.

'그렇지.. 이거지.. 전생에서 지겨울 정도로 봤었던 반응이로군.. 자신의 능력 밖의 일을 마주쳤을 때 평범한 인간들이 나타내는 반응이란 어쩜 이리 한결같을까.. 여기가 내 고향이랑 다른 세상이라고 생각한 건 나만의 착각이었어. 둘 다 똑같은 세상이었던 거야..'

수빈이 한 말에 흥분한 영화사 직원이 얼굴이 상기된 채 입을 열었다.

"그 많은 대사를 지금 다 외웠다고요? 그럴 리가 없어요! 지금 나눠드린 대본은 어제저녁에 수정된 걸 제가 오늘 아침에 직접 뽑은 거라고요! 대본이 유출될 일도 없다고요! 거짓말하지 마세요!"

수빈은 자신의 말을 믿지 못하는 그녀를 위해 입을 열어 대본에 나와있는 대사를 천천히 읊기 시작했다.

잠시 후 수빈은 오디션장으로 걸어 들어갔다.

뿔테 낀 영화사 직원은 미친 듯이 뛰어다녔다.

담배 피우러 나가있거나, 화장실에 볼일 보러 가있거나, 전화 걸러 밖에 나가있던 심사위원들을 급하게 끌어모았다.

그리고 오디션이 시작되었다.

수빈은 대사를 더듬거리거나 틀리거나 하는 단 한 번의 실수도 없이 차분히 오디션 연기를 끝냈다.

상식적으로 믿을 수 없는 장면을 목도한 심사위원들의 경악에 찬 눈빛을 뒤로하고 오디션장을 나섰다.

매니저와 함께 차를 타고 다시 YK 사옥으로 돌아가서 박실장을 만나러 올라갔다.

방안에서 박실장이 미친듯이 혼자 웃고 있었다.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하하하하. 수빈이 왔냐? 좀전에 성감독이 전화해서 울더라. 울어.."

"그래요? 그럼 오디션은 합격이라고 하던가요?"

"아니. 탈락이란다."

"네? 왜요? 나름 잘했다고 생각했는데.. 특히 역할 중에 냉정하게 구는 장면은 나름 훌륭했을 건데요? 그런 쪽으로는 누구나 최고라고 꼽는 분이 제 주변에 계셔서.. "

"연기는 훌륭하게 잘했다고 하더라. 근데.. 너가 너무 잘생겨서 도저히 조연으로 못 쓰겠단다. 영화 흐름이 끊어진다나 뭐라나.."

"제가 탈락인데 왜 성감독님이 전화해서 웁니까?"

"다른 역할로 캐스팅 하고 싶다고 부탁하는거지. 내가 당장은 안된다고 했다. 목적한 입소문은 영화계에 빠르게 쫘악 퍼질거야.. 이제부터는 제대로 된 역할로 알아봐야지. 내가 준 시나리오는 다 읽어가나?"

"요즘 좀 바빠서 사나흘 더 걸릴 거 같습니다."

"그래? 흐음.. 어차피 입소문이 퍼지려면 며칠 걸리니깐.. 그럼 그동안에 너 TV 프로그램 하나만 출연하자."

"TV 프로그램요?"

"그래. 네가 얼마나 머리가 좋은지 방방곡곡 자랑을 해야 하지 않겠어? 가진 능력을 충분히 써먹어야지. 그래야 연예계에 퍼져있는 예전 너의 이미지를 완전히 박살 내지.."

박실장은 잠시 머리를 쓰다듬으며 생각을 정리하는듯했다.

"입소문에 이어서 이것까지 출연해서 성공하면, 다음부터는 수빈이 너를 어떤 역할로도 사무실에서 푸시할 수 있을 거다."

"어떤 프로그램인데요?"

"일요일 밤의 즐거움이라고.. 혹시 본적 있냐? [문제적 인간]이라는 프로그램인데.."

수빈은 잠시 이몸의 이전 주인의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본적도 없고 이름도 처음 들어봅니다만?"

"그래? 상관없어. 이 프로그램은 특별한 준비 같은 건 전혀 필요 없거든. 넌 그냥 나가기만 하면 돼.. 아무 문제없을 거다. 다들 나처럼 놀란 토끼눈이 되는 걸 빨리 보고 싶군.. 기대되는걸. 하하하하"

수빈은 박실장의 호탕한 웃음소리를 들으면서 생각에 잠겼다.

'박실장님이 오늘따라 자주 웃으시는걸. 기분이 좋아 보이시는데.. 문제적 인간이라.. 문제가 많은 인간들이 나가는 프로그램인가. 흐음. 내가 환생을 한 인간이니깐 문제가 많긴 하지.. 이따가 집에 가면 한번 찾아서 봐야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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