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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빈은 아침에 일어나 매니저가 모는 밴을 타고 YK 사옥으로 출근해서, 약속된 10시에 정확히 맞춰 배우 1팀 박동주 실장 사무실로 찾아갔다.
"어서 오게나. 수빈군."
"안녕하세요. 박실장님."
"매니저는 어디 간 모양이지?"
"급히 처리해야 될 일이 있다고 해서 잠시 자리를 비웠습니다."
"잘 됐군. 둘이서 할 말이 좀 있었는데 말이야. 수빈군. 거기 앉게나."
수빈은 소파에 앉으며 대답했다.
"실장님. 수빈군이라니요. 어제처럼 편하게 말씀하시죠. 제가 나이가 아직 많이 어려서 듣기 부담됩니다.."
박실장이 맞은편 소파에 털썩 주저앉으며 물었다.
"그래? 나름 대우를 해줘야 될 거 같아서 말이야.. 정 불편하다면 이제부터 다시 편하게 말하도록 하지. 수빈아.. 내가 맡고 있는 배우 1팀이 YK에서 매출로 따지면 탑이 아냐. 한 3위쯤 되려나.. 그런데도 내가 어제 우리 팀이 파워가 제일 세다고 말했었지. 왜 그런지 혹시 알겠니?"
박실장의 슬쩍 찔러보는 질문에 수빈은 속으로 계산을 잠깐 했다.
'후.. 박실장님이 눈치도 빠르고 성격도 무난하고. 계속 숨기는 것보다 차라리 내 편으로 만드는 게 낫겠지. 이미 어느 정도 들킨 것도 있고 하니.'
마음을 정한 수빈은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둘 중에 하나겠죠. 박실장님이 김성만 사장님 아들이거나.. 아니면 한국은 자본주의 사회이고 이 회사는 주식회사이니 주식 지분이 많으시겠죠. 나이로 보아 아들은 아닌 것 같고.. 지분을 제법 많이 가지고 계신 모양입니다."
수빈의 대답에 박실장이 놀란 듯 눈을 크게 뜬 다음 잠시 후에 소리 내어 웃었다.
"허어.. 정말 똑똑하군. 그런 영특한 머리를 도대체 왜 여태껏 숨기고 다닌거야? 대단하군. 아는 사람들은 몇 명 안되지만 내가 차명까지 합치면 10프로 약간 넘게 가지고 있지. 그럼 지금 내가 이 말을 왜 하는지도 알겠어?"
수빈은 자신을 테스트하는듯한 질문에 숨도 쉬지 않고 답했다.
"어제 보니 YK 시가총액이 삼천억이 넘더군요. 10프로면 삼백억이 넘겠죠. 재벌은 아니지만 그 정도면 평생 호의호식하기엔 충분한 돈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실장으로 계시면서 일을 하고 계시다는 건 이 일을 즐기신다는 뜻입니다. 즉, 재능 있는 젊은 배우들이 커나가는 모습을 보는 게 박실장님 삶의 낙(樂)이 아닌가 사료됩니다."
박실장이 감탄 어린 눈빛으로 수빈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이 나이에 이제 겨우 스물 갓 넘은 청년이랑 대화하는 게 이렇게 즐거울 줄이야.. 상상조차 안해봤는데.. 그럼 내가 왜 이런 대화를 하는지도 한번 맞춰 보겠어?"
"실장님이 돈이나 재물에 연연하지 않는다는 걸 저에게 알려주고 싶어서 그런 거겠죠. 그러니 절 이용해서 행여나 실장님께서 치부(致富)를 할까 봐 걱정하지 말고, 서로 숨기는 거 없이 편하게 터놓고 의논하자는 취지로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대단하네.. 정말 대단하네.. 오늘 내가 이 나이에 드디어 맹자님 말씀 중에 하나는 깨달았군. 수빈이라면.. 이것도 뭔지 혹시 알겠나?"
박실장의 질문에 수빈은 아주 잠깐 예전 생각이 떠올랐다.
'이전 생에서 나를 가르치던 제갈세가내 여러 교관들에게 하도 많이 들어서..'
"맹자님 말씀 중에 하나라면.. 득천하영재 이교육지 삼락야(得天下英才 而敎育之 三樂也)라.. 천하의 영재를 얻어서 가르치면 더없이 즐겁다는 걸 깨달은 게 아닌가 합니다. 군자의 삼락 중에 하나 아니겠습니까."
수빈의 거침없는 대답에 박실장이 파안대소(破顔大笑)를 하며 힘차게 박수를 쳤다.
"내가 필히 장담하건데.. 수빈이 너는 연예인이 아니라 뭘 해도 성공할거야. 정말 무서울 정도로 똑똑하군. 이젠 두려울 정도야.. 내가 더 이상 보탤 말이 없다."
웃음을 멈춘 후 박실장이 허리를 앞으로 숙여서 수빈을 쳐다보며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수빈아. 다른 건 내가 특별히 말할 필요가 없을 거 같고.. 내가 노파심에 한가지 당부만 좀 하자."
"새겨 듣도록 하겠습니다."
"이 바닥 연예계에서는 말이야.. 수많은 뛰어난 젊은 인재들이 정신병에 시달려. 마약을 하기도 하고 알코올 중독이 되고 도박에 빠지고.. 심지어 자살도 종종 하지. 나는 수빈이 너는 절대 그러지 않았으면 한다.."
잠시의 뜸을 들인 후 박실장은 수빈이의 눈을 곧게 쳐다보았다.
"네 나이는 한참 허세를 부릴 나이야.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여자 앞에서 잘 보이기 위해 뻥도 치고 그럴 나이란 말이지. 그런데 너는 오히려 반대라고.. 여태껏 자신의 뛰어난 능력을 계속 숨기고 있었단 말이야.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러다가 속으로 곪으면 잘못하다간 정신적으로 큰 문제가 생겨.. 난 네가 이제부터라도 당당하게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고 다녔으면 한다.. 내가 한말 이해하겠어?"
"네. 염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 실장님께서 하신 말씀 참고해서 행동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OK. 좋았어. 이제 됐네. 그럼 이제 배우 1팀의 자랑인 코드네임 변검녀를 만나러 가보자고."
"네? 변검녀..요?"
"그래. 우리 팀의 자랑이지.. 가서 보면 알게 돼."
잠시 후 박실장과 같이 배우1팀 전용 분장실에 도착한 수빈은 변검녀의 정체를 알아냈다. 중국 기예 중 하나인 변검(變臉)에서 따온 별명이었다.
빠른 손놀림으로 짧은 시간 내에 사람을 완전히 다른 얼굴로 변신을 시킨다는 전설의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눈앞에 있었다.
"변검녀야. 어제 말한 데로 우리 수빈이 분장 좀 잘해줘라. 오늘 중요한 오디션이 있다고.."
"박실장님! 제발 좀 그렇게 부르지 마시라고요! 실장님 때문에 제가 뭐 하는 여자인지 잘 모르는 사람들은 전부 제가 [변비가 겁나 심한 여자]인 줄 착각하잖아요!! 그냥 김팀장이라고 부르시라고."
"난 오히려 김팀장이 더 이상한데? 무슨 대부업 하는 이상한 여자처럼 들리잖아. 아무튼 잘 좀 부탁해."
박실장은 재미없는 아재 개그를 하나 툭 던져놓고 먼저 올라가 버렸다.
짜증이 난 변검녀는 인상을 찌푸리며 수빈에게 설명했다.
"제가 어제 BBG 담당 코디랑 통화해서 평상시 메이크업하는 걸 메모해 놨으니깐 크게 달라질 건 없을 거예요. 편하게 의자에 앉으세요."
화장대 앞에 있는 의자에 수빈이 앉자 김팀장은 속으로 되뇌었다.
'듣던 데로 얼굴은 더럽게 잘생겼네. 그래도 양아치라고 소문이 파다하니깐 저 얼굴에 속아서 홀딱 빠지면 안 돼.. 정신을 차리자.. 정신 차려야지..'
김팀장은 핸드폰을 꺼내서 어제 BBG 코디와 통화하며 해놓은 메모를 찾았다.
'어디 보자. 제일 처음 단계가..'
메모를 확인한 김팀장은 고개를 들어 수빈이의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점점 얼굴이 빨개지기 시작했다.
수빈은 김팀장이 계속해서 자신을 너무 빤히 쳐다보자 쑥스러워 한마디 하며 환하게 웃었다.
"그러다 제 얼굴에 구멍 나겠습니다."
그러자 김팀장이 입을 열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미친년을 봤나.."
"네? 전 년이 아니라 놈인데요. 그리고 초면이신데 말씀이 좀 과하신 거 같습니다."
김팀장은 수빈의 말에 대꾸를 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서 사람을 찾았다.
"명숙아! 명숙아! 빨리 이리 와봐.. 빨리.."
분장실 한쪽 편에서 오늘 수빈이 입을 의상을 손질하고 있던 스타일리스트가 대답하며 다가왔다.
"왜요? 분장하다 갑자기 날 왜 찾아요?"
김팀장은 명숙이라 불리는 스타일리스트에게 핸드폰을 내밀었다.
"닥치고 이거 1번 좀 읽어봐.."
잠시 핸드폰을 쳐다본 스타일리스트가 고개를 들어 수빈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김팀장처럼 얼굴이 빨개져서 말을 내뱉었다.
"미친 년.. 눈깔이 삐었네.."
"그치? 너도 아니지? 내가 본 게 확실히 맞는 거지?"
"언니가 본 게 백프로 맞아요. 이런 개념 없는 년을 봤나. 후아.. 언니 나 너무 떨린다. 어떡하지?"
"나도 그래.. 이년아. 뭘 어떡하겠냐. 넌 가서 네일이나 해."
제갈세가 창건 오백 년 이래 최고의 머리를 지녔다고 평가받은 수빈이지만 두 여자의 대화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두 분이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이해가 안 되는데.."
둘의 도무지 알 수 없는 대화에 참다못한 수빈의 질문에 김팀장이 핸드폰을 내밀며 말했다.
"이거 1번 한번 읽어보세요. 어우. 나 손 떨리는 것 봐.."
수빈은 메모 형태로 적혀있는 메이크업 순서에 1번으로 적혀 있는 글을 읽었다.
"일 번.. 수빈이는 대가리가 비어서 그런지 눈깔이가 항상 흐리멍덩함. 썩은 동태 눈깔처럼 보이니깐 반드시 검은색 또는 짙은 색 서클렌즈를 끼울 것. 필수임. 절대 잊으버리면 안 됨. 별표 5개라... 이런.."
"미친 년 맞죠? 감히 수빈이 아니 우리 수빈씨처럼 반짝거리고 지혜로워 보이는 눈을 보고 감히.."
"맞아요. 언니. 그 코디가 제정신이 아니지. 어떻게 저런 은하수처럼 빨려 드는 수빈씨 눈빛을 보고 그런 말을.. 언니.. 어떡해. 나 가슴 뛰는 게 안 멈춰.."
"멈추면 죽어 이년아.. 넌 빨리 네 자리로 가라고!"
두 여인이 떠드는 소리를 들으면서 수빈은 한숨을 쉬었다.
'그놈이 싸놓은 똥 덩어리는 치워도 치워도 끝이 없구나..'
우여곡절 끝에 분장을 마친 수빈은 스타일리스트가 준비한 슈트로 갈아입었다.
풀 메이크업에 핏이 살아있고 조명을 받아 가끔씩 반짝거리는 감색 슈트를 멋들어지게 차려입은 수빈을 보고, 사진을 찍으랴 비명을 지르랴 난리가 난 두 여성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 후 밴을 타고 오디션 장소인 충무로에 있는 명성 스튜디오로 출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