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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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빈은 박실장과의 미팅을 마치고 저녁이 되어 집으로 가기 위해 밴에 올라탔다.
"수빈아. 어디로 갈까? BBG 숙소 아니면 집?"
"집으로 가주세요. 당분간 조용히 혼자 있고 싶어서요."
잠시 후 교대역 인근에 위치한 빌라에 도착한 수빈은 경비실에 들러서 택배를 찾은 뒤, 엘리베이터를 타고 17층으로 올라가 집으로 들어갔다.
집안의 제법 널따란 거실 바닥에는 많은 수의 책들이 세 겹의 둥근 띠 형태로 놓여서, 마치 하도낙서(河圖洛書)에 나온다는 팔괘를 닮은 형태로 배열되어 있었다.
얼핏 보아 진법(陣法)으로 보이는 형태의 가운데 중심 부위에는 사기로 된 국그릇이 하나 놓여 있었고 안에는 물이 찰랑거린다.
수빈은 책들을 바깥쪽 원에서부터 조심스럽게 순서에 맞춰 몇 권 걷어내고 국그릇을 집었다.
마치 소믈리에가 와인의 맛을 품평하듯 눈을 지긋이 감고 물을 조금씩 천천히 삼켰다.
잠시 후 눈을 떴다.
'후우. 또 실패로군.. 물에서 아무런 기운(氣運)이 느껴지지 않아. 이러면 이제는 더 이상 뾰족한 방법이 없는데.'
수빈은 자신이 아침에 집에서 나가기전 직접 설치한 수기결집진(水氣結集陣)을 다시 유심히 살펴보았다.
"첫날엔 감(坎)을 중심으로 한 기본 형태의 진을 쳤는데 안됐고, 어제는 바깥에 태(兌)를 둘러쳐서 진법을 강화했는데도 실패했고, 오늘은 손(巽)까지 동원해서 3겹으로 강화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결국 실패로군.."
이전의 생에서는 깃발 몇 개만으로도 간단히 작동하던 진법이, 고심을 하여 몇 겹을 강화하여 설치해도 도통 작동하지를 않자 수빈은 고민에 빠졌다.
"결국 수(水), 택(澤), 풍(風)이 다 안 먹힌다는건데.. 이러면 이 세상에서 진법을 활용해서 내공을 증진한다는 게 거의 불가능한데.. 난감한 일이로군."
수빈은 거실 바닥에 정좌해서 고민을 거듭했으나 결국 다른 방도를 찾지 못했다.
'후우. 이 세상은 기본적으로 기(氣)가 너무 약하단 말이야. 별수 없지. 시간을 두고 하나씩 하나씩 천천히 풀어가는 수밖에..'
고민을 끝낸 수빈은 일어서서 택배 상자를 풀고 인터넷으로 주문한 의학 책자를 꺼낸 뒤 살펴보았다.
'의학 관련 기술이 정말 잘 정리되어 있어. 이런 고급 지식을 누구나 다 볼 수 있다니.. 정말 놀라운 세상이야. 언제 또 이전의 생처럼 불치병이 갑자기 재발할지 모르니 미리미리 공부를 해둬야겠지.'
책을 들고 임시로 서재로 사용하는 방으로 걸어가서 탁자 위에 올려놨다.
"새로 배워야 할게 한두 개가 아니군. 과학, 수학, 물리... 공부할게 너무 많아서 진심으로 행복한 세상이야.."
새로운 걸 배운다는 즐거움에 입가에 미소를 띤 수빈은 다시 거실로 나가 소파 옆에 놓인 시나리오 뭉치를 보았다.
'일단 이것들부터 빨리 봐야겠지. 아.. 그전에 전화부터 드려야겠군.'
핸드폰을 꺼내든 수빈은 캐나다 토론토에서 이모와 함께 한인식당을 운영 중이며, 자신의 사고 때문에 얼마 전 한국에 나왔다가 다시 캐나다로 돌아간 어머니께 전화를 드렸다.
[아들~. 엄마야.]
"네. 수빈이에요 어머니. 괜히 저 때문에 한국 왔다가 다시 가셔서 안 힘드세요?"
[엄마는 식당에서 카운터나 보는데 힘들 리가 있겠니. 넌 몸은 좀 어때? 다친 데가 쑤신다거나 그러지 않아? 이번에 엄마가 얼마나 놀랬는지 아니? 밥은 잘 먹고 다니고?]
"하하. 아픈데도 없고 밥도 잘 먹고 다닙니다. 걱정 마세요. 어머니나 건강에 신경 쓰세요. 밖에 나가서 바람도 좀 쐬고 괜찮은 남자도 좀 만나시고.."
[죽은 사람한테 미안하지만.. 네 아버지 덕에 남자라면 지긋지긋하다. 나는 아들만 잘되면 돼. 엄마는 수빈이가 이렇게 철이 들어서 안부전화도 하고.. 너무 행복하단다.]
"제 나이면 당연히 철이 들어야죠. 그리고 전화하는 게 뭐 어렵다고요. 하하하. 용돈은 안 필요하세요?"
[저번에 보내준 것도 그대로 남았고 엄마도 돈 벌고 있단다. 나 줄 생각하지 말고 너 부지런히 모아서 장가가야지. 엄마는 빨리 손주가 보고 싶어.]
"군대도 안 갔다 온 놈이 무슨 장가에요. 우리 모친께서 너무 급하시다."
[애를 먼저 낳고 군에 가도 되지..]
"또 또 쓸데없는 소리 하신다. 이만 끊어요. 또 전화드릴게요."
[그래. 수빈이. 엄마는 지금 수빈이 때문에 너무 행복하니깐 신경 쓰지 말고. 너 밥이나 잘 챙겨 먹고 다녀..]
"네. 알았어요."
전화를 끊고 수빈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좋으신 분이야.. 내가 다른 복은 없어도 저번 생이나 이번 생이나 어머니 복은 타고난 모양이야. 후우. 어머니라.."
수빈은 상념(想念)에 잠겼다.
1428년의 중국.
명(明) 나라 선덕제(宣德帝)가 재위한지 3년째 되는 해.
호북성(湖北省) 상양(襄陽) 융중산(隆中山) 산자락 아래 제갈세가(諸葛世家)가 있다.
일찍이 삼국지에 등장하는 제갈공명으로 유명한 제갈 씨들이 중원에 각자 흩어져 살다가, 234년에 사망한 제갈공명의 사후 700년이 넘게 지난 후인 960년에 처음으로 제갈장운에 의해 한 곳으로 모여서 건립한 세가이다.
제갈세가의 시조(始祖)인 제갈장운은 952년경 당시 근위대장이었던 조광윤이라는 인물과 친교를 맺게 되었고, 10여 년이 흐른 후 절도사가 된 조광윤이 새로운 나라를 건국하는데 크게 일조를 하였다.
이로 인해 960년 송(宋) 나라를 건립한 태조(太祖) 조광윤(趙匡胤)의 막강한 지원을 등에 업고 제갈공명이 살았다고 전해져 내려오는 융중산 아래에 터를 잡고 제갈세가를 일으켰다.
그 후 제갈세가는 중원 전역에 위세를 떨치는 가문으로 자리 잡게 되었고, 500여 년이 넘게 흐른 지금도 그 명성을 도도히 이어가고 있는 중이다.
그런 제갈세가의 세가주가 근무하는 가주전(家主殿)에서 부부로 보이는 중년의 남녀가 한참 고성을 주고받으며 언쟁(言爭)을 벌이고 있었다.
한쪽에는 이런 부부의 아들로 보이는 어린 티가 아직 채 가시지 않은 소년이 초롱초롱한 눈빛을 한채 조용히 앉아있었다.
중년의 남자는 당대 제갈세가의 가주인 제갈장성으로, 지혜롭기론 중원에서 으뜸간다는 제갈세가의 명성에 걸맞게 남궁세가를 필두로 하는 중원오대세가의 모임인 세가연합회에서 군사의 역할을 맡고 있다.
타고난 성정이 냉정(冷情) 하고 얼음같이 차가운 얼굴에, 군사로서 지모(智謀)가 뛰어나여 사람들 모르게 은밀(隱密) 한 계략을 잘 짠다는 평판을 받고 있어, 강호동도들에게 냉면모밀(冷面謀密)이라는 별호로 불리고 있는 가주이다.
그리고 그 앞에 앉아 있는 여인은 슬쩍 쳐다만 봐도 사람을 얼게 만든다는 냉면의 세가주를 유일하게 타박할 수 있다는 세가의 안주인인 서문혜정이다.
서문혜정은 오대세가중 하나인 서문세가의 출신으로서, 타고난 천성이 자애롭고 손 아랫 사람들도 귀히 여기는 품성을 지니고 있어 매사를 부드럽고 조용하게 처리하는 여인이다.
하지만 서문혜정은 일신에 지닌 무공이 뛰어나 처녀시절 강호 활동 당시 푸른 옷을 즐겨 입어 청의(靑衣)요, 약자를 괴롭히는 걸 보면 참지 못하고 떨치고 나서서 악한들에게 경(黥)을 치는 나찰(羅刹)로 변한다고 해서 경찰이라, 합쳐서 청의경찰(靑衣黥刹)이라 불리던 여중제일고수였다.
가주전에서 당대 세가주인 제갈장성이 부인인 서문혜정을 보며 말했다.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보고서를 부인께서도 한번 읽어보시오. 숙부께서 직접 관리하시는 세가오대관문 시험 평가서요. 갑을병정(甲乙兵丁) 4단계 평가 중에 하나의 갑과 네 개의 병만 받아도 강호출두가 허락되는 게 본 세가의 규정이외다. 그런데 수빈의 결과를 보시오."
제갈장성은 보고서를 들고 서문혜정에게 마치 들으라는듯이 큰 소리로 읽기 시작했다.
"무공의 경지를 측정하는 무(武)에서 갑을 받았고, 경전을 외우고 논하는 경(經)도 갑, 진법을 설치하고 파훼하는 진(陣) 갑, 병과 부상을 진단하고 치료하는 의(醫) 갑, 기서화금 등을 시험하는 예(藝) 갑.. 다섯 가지 관문 모두 갑을 받았단 말이외다."
제갈장성은 슬쩍 부인의 눈치를 살피고 다시 말을 이어갔다.
"거기에 세가의 장로이자 관문주이며 본인의 숙부이신 제갈대평 어른께서 직접 평한 글을 보시오. [오성(悟性)이 뛰어나서 하나를 들으면 열을 깨우치는 문일지십(聞一知十)이요, 암기력이 비상하여 한번 들으면 마치 수첩에 기록하는듯해 일람첩기(一覽輒記)라, 무공의 자질이 훌륭하여 장차 최절정의 고수(高手)가 쉽게 될 것이고, 예는 세가 내에서 감히 비교할만한 자를 찾기 힘들 정도로 뛰어나다.] 이뿐인 줄 아시오?"
"또 뭐가 있다는 말입니까?"
"십육 세에 관문을 통과하고 강호에 출두하여 널리 이름을 떨치고, 본 세가를 중흥시켜 증시조(曾始祖)라 불리는 12대 가주 제갈성운처럼 본 세가의 위세를 중원에 널리 떨친 인재라 사료된다. 이제 아시겠오?"
제갈장성의 말에 화가 난듯 눈을 매섭게 치켜뜨며 서문혜정이 대꾸했다.
"제가 뭘 알아야 한단 말입니까?"
"제갈수빈이 비록 내 아들이지만 본 세가의 일원인 건 자명한 사실. 따라서 세가의 발전을 위해 강호로 어서 빨리 나가야 된단 말이오."
서문혜정이 성난 암호랑이 같은 매서운 기세로 대답했다.
"제갈성운 그분께서는 십육 세에 나가셨지만 수빈이는 이제 열네 살입니다. 아직 어미의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 나이라고요. 그렇게 세가의 이름을 떨치고 싶으시다면!! 가주께서 직접 강호로 나가셔서 마두들을 때려잡으시지요. 그러다 뒤져도 제가 한 톨의 원망도 하지 않고 제 손으로 장례를 자~알 치러드리겠습니다. 오늘이라도 나가심이 어떠신지요? 제가 지금 직접 제 손으로 가주의 행낭(行囊)을 꾸려드리려고 합니다."
"어허...."
"그리고!! 그렇게 평가하신 당신의 숙부 되신다는 제갈대평 어르신도 제가 분명히 같이 뵙자고 청했거늘!! 지금 어디 계십니까? 제가 그분도 가주와 같이 강호로 나가시게 행낭을 꾸려 드릴 생각입니다. 그분이 지금 어디 계신지 빨리 말씀하시지요!!"
"어허..."
"지금 저랑 농(弄)을 하시는 겁니까? 어허..만 하지 마시고 빨리 대답하세요!!"
"어허..."
수빈은 상념에서 깨어나며 쓰게 웃었다.
'어머니가 이기셔서 결국 십육 세에 강호에 출두했지.. 내가 죽었을 때 당신께서 많이 가슴 아프고 울기도 많이 우셨을 텐데.. 뵙고 싶어도 이제 뵐 수가 없게 됐으니..'
수빈은 시나리오에 눈을 돌리며 물기가 가득 찬 낮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이번 생에는 어머니 슬프게 해드리지 말고 효도하면서 오래오래 살아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