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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피디는 멍한 얼굴로 랩을 마친 수빈을 바라보고 있다가, 푸드득 놀라 깨어나서 카메라 감독에게 황급히 물었다.
"지금 꺼 찍었지? 잘 찍었지?"
"아뇨. 피디님이 아까 눈짓으로 찍지 말라고 하셔서 안 찍었죠."
"야! 그런다고 안 찍어? 카메라 감독이 필름이 들어가는 것도 아닌데 왜 안 찍..."
장피디는 흥분해서 소리를 치다가 멈추고 한숨을 쉬었다.
"후우. 내 잘못이야. 내가 지금 좀 흥분했어. 김감독.. 소리쳐서 미안해."
"아닙니다. 피디님 심정 저도 이해합니다. 저 친구 랩이 예술인데요. 제가 랩에 대해서 쥐뿔도 모르지만... 이렇게 가사가 귀에 쏙쏙 박히는 경우는 처음 봅니다. 요즘 애들 랩하는 거 가끔 들어보면 도통 뭔 소리를 하는지 하나도 못 알이 듣겠던데.. 조금 전 랩은 가사가 다 들리네요."
"딜리버리가 뛰어나서 그래. 딕션도 좋고 그리고 호흡도 길고 리듬감까지 뛰어.."
말을 하다 갑자기 장피디가 목이 부러질 듯 고개를 획 돌려서 수빈을 바라보더니 갑자기 환하게 웃으면서 다가왔다.
"수빈군. 아니 수빈씨! 우리 수빈씨. 아까는 정~말 미안했어. 내가 요즘 드라마 찍느라 내가 예민해져서 그랬던 거니깐 조금만 이해 좀 부탁해요."
"그럼요. 충분히 이해합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이렇게 맘도 넓다니.. 근데 그 긴 랩 가사를 한번 읽어보고 어떻게 다 외운 거야? 500자가 넘는걸? 정말 대단하다.. 근데 이렇게 잘하는데 2년 전 [키메라] 때는 왜 그랬을까?"
장피디가 호기심이 가득한 눈을 하고 묻는 말에 수빈이는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후우. 여기서는 또 뭐라고 뻥을 쳐야 되려나. 하여간.. 온 동네 돌아다니며 거짓말만 하고 다니는군.'
수빈이는 잠시 생각을 정리한 후 대답했다.
"그때는 한마디로 철이 없었던 거죠. 가수가 무대만 서면 돼지 굳이 이런 것까지 해야 돼? 뭐 그랬던 거죠. 그래서 머리가 나쁜척했던 겁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건방졌었죠? 그때 일은 진심으로 사과드리겠습니다."
"아아. 그랬었구나.. 그래서 머리가 이렇게 좋은데 나쁜 척을.."
수빈은 대화를 돌리기 위해 얼른 화제를 바꿨다.
"흠. 근데 피디님. 랩 가사가 고등학생이 썼다는 설정 때문인지 강작가님이 일부러 촌스럽게 적은 모양이죠? 수준이 많이 낮네요."
"그런가? 수빈씨가 원래 래퍼 출신이었나? 랩도 잘하고 가사도 잘 보고.."
"아뇨. 병원에 있을 때 제가 시간이 많이 남아서.. 중국어 공부하면서 짬짬이 사(辭)와 부(賦) 낭독을 자주 해봤거든요. 랩과 비슷하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해서 잠깐 공부 좀 했었습니다. 그게 효과가 좀 있나 봐요."
"아아. 맞다. 수빈씨가 얼마 전에 사고가 났었지?"
"네. 이제는 멀쩡합니다."
"잘 됐다. 정말 다행이다.. 근데 사? 부? 그게 다 뭐지?"
"요즘 말로는.. 시나 시조 같은 거라고 보시면 됩니다. 흐음. 유명한 걸 예를 들면..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나 소동파(蘇東坡)의 적벽부(赤壁賦) 같은 거 말하는 겁니다."
"우리 수빈씨가 그런 거 낭독이 취미였다고?"
"취미라기보다 그냥 예전에.. 중국어도 배울 겸 가끔 해봤다는 거죠."
"그렇구나. 역시 머리가 좋은 사람들은 뭔가 다르네. 수빈씨. 지금 시간 충분하지? 이거 랩하는 거 단독으로 정면 바스트랑 풀샷 찍고, 드라마 출연하는 애들 불러서 앞뒤에서 다시 좀 찍자. 내가 편집 잘해서 멋지게 나오도록 해줄 테니깐. 괜찮겠지?"
"네. 피디님. 시간 충분하니깐 편하게 찍으시죠."
"OK. 오늘 수빈씨가 내 드라마에 카메오 출연한 거 내가 앞으로도 절대 잊지 않을 테니깐.. 우리 둘이서 멋진 영상 한번 만들어보자고."
드라마 카메오 촬영을 무사히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가는 중이다.
백성철이 운전을 하면서 물었다.
"수빈이는 그렇게 머리가 좋으면서 왜 숨겼어? 정말로 드라마나 영화 쪽은 하기 싫어서 그랬던 거야?"
수빈은 쓴 미소를 지었다.
"제가 첨에 연예계 진출했을 때는 대충 돈이나 좀 벌다 그만두자라고 생각했었는데요. 근데.. 병원에서 맘이 좀 바뀌었어요."
'후우. 또 뻥을 치는군.'
"어떻게 바뀌었어?"
"이왕 새로 사는 인생 아니.. 이왕 푹 쉬었다 새로 하니깐 적극적으로 이것저것 다 해보는 것도 재미있을 거 같아서요."
"잘 생각했다. 형이 아까 현장에서 깜짝 놀랐어. 그 긴 가사를 한번 읽고 한방에 바로 외워버리다니. 옆에 같이 서서 구경하던 사람들이 놀라서 다 뒤집어지더라고. 내 주변에 이렇게 머리 좋은 사람이 있었다니.. 보고 있는 내가 다 뿌듯하더라. 아까 장피디 말투가 싹 바뀐 거 봤지? 하하하."
"별거 아니에요. 형."
"별거 아니긴 인마. 그런 재능을 아깝게 왜 숨겨. 남들은 못 드러내서 난린데. 넌 이제 큰일 났다.."
"왜요?"
"이 바닥이 어떤 바닥인지 너도 잘 알잖아. 돈이 된다 싶으면 여기저기서 득달같이 달려들지.. 네가 머리 좋은 걸 여태껏 숨기고 있었다는 걸 사람들이 이제 알았으니.. 이쪽 관계자들 사이에 삽시간에 다 퍼질걸. 그 잘난 얼굴에 이제 머리까지 좋다는 게 알려지면 당연히.."
그때 핸드폰 벨 소리가 들렸다.
매니저가 전화를 받았다.
"네. 박실장님. 지금 카메오 역할 무사히 잘 마치고..."
[.....]
"아닙니다. 제가 그걸 왜 숨기겠습니까. 네네. 수빈이가 말 안 하고 숨겨서..."
[.....]
"네. 네. 지금 바로 사무실로 찾아가겠습니다."
백성철은 전화를 끊고 숨을 몰아쉬었다.
"무슨 전화에요?"
"박동주 실장이 흥분해서 딴 데 들리지 말고 빨리 자기 사무실로 너 데리고 오란다. 벌써 소식을 들은 모양이다. 내가 이럴 줄 알았지.."
"아.."
"형 말이 맞지? 넌 이제 큰일 난 거야. 사방에서 너 당겨갈려고 회사에서 한바탕 난리가 날 거다. 얼굴이 예술인 놈이 이제 머리까지 예술이라는 게 밝혀졌으니.."
백성철이 말을 하다 뒤를 힐끗 쳐다본다.
"성격도 예전보다 좋아졌고.. 내가 요 며칠 너 볼 때마다 깜짝깜짝 놀랜다."
"제가 예전엔 좀 모가 났었죠?"
"수빈아. 형이 부탁인데.. 예전으로 다시 돌아가지 말고 지금처럼만 해라. 형이 로드매니저나 하는 주제에 할 말은 아니지만.. 너 지금 모습이 훨씬 좋다. 사람 냄새도 나고.."
"네. 알겠어요. 신경 써줘서 고마워요 형."
"그래. 앞으로 잘 나가게 되면 나도 신경 좀 써주고.."
"그럴게요."
청담동 사옥에 도착해서 5층에 있는 배우 1팀 박동주 실장 사무실로 올라갔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니 5층 복도에서 고성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배우 1팀 박동주 실장과 배우 2팀 조민성 실장이 대판 싸우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