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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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빈은 빠른 발걸음으로 장피디와 매니저에게 다가갔다.
뻣뻣이 선채로 장피디가 쏟아 내는 화염 불길에 통구이로 변태 중인 매니저를 한 손으로 슬쩍 옆으로 밀어내며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장피디님. BBG의 리더 수빈입니다."
장피디는 인사를 받지 않고 아무 말없이 수빈을 매서운 눈빛으로 째려봤다.
'휘유. 유엽도(柳葉刀)라도 손에 쥐여주면 아주 산 채로 포를 뜰 기세로군..'
수빈은 장피디의 칼날 같은 눈길을 부드럽게 웃으며 받아넘겼다.
"YK 박동주 실장님이 장피디님께서 더운 날 좋은 작품 찍느라 고생이 많으시다고, 저희들 보고 빨리 가서 최선을 다해 도와드리라고 말씀하셔서 부지런히 달려왔습니다."
장피디가 수빈을 쳐다보면 땅이 꺼질 듯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말이나 못하면. 빌어먹을 박실장."
"장피디님께서 드라마에 카메오가 필요하다고 말씀하셔서 박동주 실장님이 저를 직!접! 보내셨습니다. 열심히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수빈이 너! 아니지.. 2년 전이랑 다르게 이제는 인기 절정의 잘 나가시는 아이돌이니 대접을 해드려야겠지."
잠시 고민을 한 장피디가 입을 열었다.
"수빈군. 나 기억 못하지?"
수빈은 장피디의 말에 재빨리 머릿속 기억을 뒤져 봤지만 떠오르는 게 없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사람 얼굴을 잘 기억을 못해서요."
"2년 전쯤인가. 수빈군이 BBG로 데뷔한지 얼마 안 됐을 때, 정성호 피디가 연출한 드라마 [키메라]에 카메오로 왔었지?"
"아! 네. 그건 기억합니다."
"내가 그때 정선배 밑에서 조연출을 하고 있었는데 말이야. 그때 수빈군이 별로 길지도 않은 대사 5줄 못 외워서 30초짜리 카메오 연기를 2시간 넘게 찍은 거 기억나냐?"
"기억 납니다. 나중에 대사도 다 바뀌었죠."
"하다 하다 안돼서 그 선배가 작가한테 직접 연락해서 대사 다 바꿨잖아. 무슨 씬이었더라.."
"친구 집에 놀러 가서 축구 경기를 같이 시청하는 장면이었죠. 대사가 점점 짧아지다가 결국엔 [다들 안녕], [슛~ 골인~], [박수~], [와아~ 대박~], [그만 가보께] 이렇게 다섯 줄로 바뀌었죠. 하하."
"웃어?? 수빈군은 그 당시 상황이 생각만 해도 재밌는가 봐? 그때 내가 아이돌이고 뭐고 다 엎으려다가 YK 얼굴 봐서 겨우 참았는데.. 이젠 내가 연출하는 드라마까지 망치려고 온 거야?"
수빈은 약간 굳은 얼굴로 장피디를 쳐다보며 입을 뗐다.
"피디님. 그 당시에는 제가 어려서 이런저런 잡생각이 많아서 집중을 잘 못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집중하면 대사 몇 줄 정도는 간단히 외울 수 있습니다. 너무 심려 마시고 맡겨주시죠. 최선을 다해서 하겠습니다."
장피디가 수빈의 말에 같잖다는 듯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려 누군가를 찾았다.
"어이~ 조연출. 강경숙 작가가 직접 적어준 랩이 총 몇 자라고 했지?"
두 사람에게서 약간 떨어진 곳에 서있던 조연출이 대본을 들여다보며 대답했다.
"다 합쳐서 500자가 약간 넘습니다. 피디님."
장피디가 비웃음을 지으며 수빈에게 판결을 내리듯 말했다.
"500 자가 넘는다라.. 애국가 4절도 200자 밖에 안되는데 수빈군이 저걸 외워서 하겠다고? 짧은 대사 몇 줄도 못 외워서 그 난리를 치신 분께서?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장피디가 다시 고개를 돌려 조연출을 찾았다.
"조연출!! 강작가가 적어준 랩은 포기해야겠다. 오백 자가 넘는 걸 수빈군이 언제 외워서 찍겠냐. 전화해서 대충 노래 부르는 걸로 바꿔달라고 해봐."
"헐. 주인공 꿈이 랩펀데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씨알도 안 먹힐 텐데요. 선배님이 직접 전화하세요. 전 못합니다. 강작가님 성격 뻔히 아시면서..."
"하아.. 이젠 직속 후배인 조연출까지 날 빡치게 만드네."
수빈은 쓴웃음을 지으며 장피디에게 부탁했다.
"흠. 피디님. 딱 한 번만 시켜봐 주세요. 제가 한번 해서 안되면 깔끔하게 사과드리고, 저희 BBG에서 랩 제일 잘하는 애로 한 명 다시 보내겠습니다. 어떻습니까?"
"오호. 정말로? 안되면 딴 사람 바로 보내주는 거다? 약속했지?"
"네! 약속드리겠습니다."
"어이~ 조연출~ 랩 적혀있는 대본 가지고 와봐라."
장피디는 다른 사람을 보내준다는 수빈의 말에 기분이 좋아져서, 조연출이 건네준 대본을 수빈에게 흔쾌히 건네주며 시계를 봤다.
"지금 시간이 없어서 30분 이상 못 줘. 그러니깐 30분 뒤에 바로 촬영 들어갈 거야. 그때까지 못 외우면 바로 다른 사람을 다시 보내는 거다. 수빈군이 먼저 약속한 거야. 지금이 2시니깐 2시반까.."
"다 외웠습니다."
"그래. 그러니깐. 지금이 2시니깐. 2시 반까지만 외워 와라."
"다 외웠다고요."
"응? 뭘?"
"랩 가사 말입니다. 다 외웠습니다."
"....뭘 다 외웠다고?"
"금방 전에 주신 랩 가사 말입니다. 다 외웠습니다."
".......지금 준 대본에 있는 랩 가사를 다 외웠다고 말하는 거야?"
"네. 피디님."
"그러니깐 수빈군 말은.. 방금 전에 내가 건네준 랩 가사를 다 외웠단 말이지? 그 짧은 시간에 말이야. 그럼 지금 바로 슛 들어가도 되겠네?"
수빈은 티 없이 맑게 웃으며 대본을 장피디에게 다시 건네줬다.
"네. 바로 들어가셔도 됩니다."
"하아. 하여간... YK 사무실 쪽 인간들은 예의를 몰라요. 예의를!"
수빈은 성난 들소처럼 콧김을 뿜뿜 뿜고 있는 장피디에게 정색을 하며 말했다.
"피디님. 어차피 제가 실패해야 빨리 딴 놈 보낼꺼 아닙니까. 한시라도 급하게 찍어보는 게 피디님한테도 좋지 않을까요?"
"아하! 그렇지! 수빈군 말이 맞아. 사람이 상황 판단이 빨라야지."
장피디는 수빈의 말에 이제야 무슨 뜻인지 이해했다는 듯이 만면에 웃음을 띠고, 기특하다는 듯 넘겨받은 대본으로 수빈의 어깨를 툭툭 치면서 촬영 컨셉에 대해서 설명했다.
"간단히 설명하면 래퍼가 꿈인 주인공이 힘들어하는 친구를 위로하기 위해 쓴 랩 가사야. 이걸 학교 선배 출신인 래퍼가 모교에 왔다가 우연히 발견하고 그 자리에서 비트에 맞춰 즉석으로 읊어주는 장면이야. 수빈군. 이해하겠어?"
"네. 이해됐습니다."
"이야. 빨라 좋다. 맘에 든다. 후딱 해치우자고."
장피디는 고개를 돌려 음향 관련 콘솔 박스가 놓여 있는 쪽을 쳐다보았다.
"음향팀~ 강작가가 말했다는 비트 한번 틀어줘봐. 아무리 딴 사람으로 바꾼다고 해도 정석대로 한 번은 들려주고 찍어야지."
잠시 후 비트가 흘러나왔다.
- 둥 둥 찌기 찌기 둥 둥 찌기 찌기
수빈은 흘러나오는 비트에 맞춰 가볍게 몸을 덜썩 거렸다.
"유명한 비트군요."
"알아?"
"애비넘의 [로스트 마이 셰프] 비트 아닙니까? 식당 사장이 영업 도중에 도망가 버린 요리사를 애타게 찾는다는.. 그 정도는 저도 압니다. 하하하"
"호오. 그래? 그럼 잘 할 수 있겠네? 어디 한번 찍어보자고.."
장피디는 한 손에 대본을 쥐고 촬영 전 카메라 감독에게 슬쩍 눈짓을 준 다음 외쳤다.
- 스탠바이. 음향팀! 비트 주고~
수빈은 비트가 흘러나오자 시선을 카메라에 두고선 발은 가볍게, 어깨와 손은 부드럽게, 목과 얼굴은 유연하게 흔들기 시작했다.
- 레디~ 액션!
장피디의 액션이라는 소리에 맞춰 수빈은 아무런 두려움 없이 랩을 시작했다.
미성(美聲)은 아니지만 묘하게 빨려 드는 목소리와 사람의 시선을 사로잡는 몸짓으로, 비트 위에서 높낮이를 바꿔가며 미세하게 음정과 박자를 변화시키면서, 수빈은 비트 속을 빠르고 힘차게 헤치고 나갔다.
오늘도 변함없이 똑같이 고통스런 하루!
...
...
... 중략
힘을 내라구~ 친구~
수빈이 평온한 얼굴로 랩을 끝냈다.
장피디는 땅바닥에 대본을 떨어뜨리고 멍한 얼굴로 입을 벌린 채 랩을 끝마친 수빈을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