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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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빈은 문을 열고 들어가서 방안을 둘러보았다.
유아영이 눈을 감고 화장대 앞에 앉아 있다.
일전에 한번 본 적이 있는 코디가 메이크업 중이다.
그녀가 수빈이를 알아보고 놀라 눈을 치켜뜨며 소리쳤다.
"아니. 너~어!! 여기가 어디라고 기어들어와! 당장 안 꺼져?"
코디가 눈에 쌍심지를 켜고 앙칼진 목소리로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는 통에 유아영이 눈을 떴다.
"경희야. 왜 그러니? 누가 왔는데?"
유아영이 수빈 쪽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사십 대 여배우 중 원탑이라는 평판답게 십 년은 어려 보이는 아름다운 얼굴이다.
짙은 속눈썹 아래 마치 달빛이 일렁이는 듯한 고혹적인 눈빛을 가진 그녀가 수빈을 쳐다보았다.
수빈이를 본 순간 봄볕 속의 봄꽃처럼 부드러운 인상의 그녀가 일순간 나찰로 변했다.
입가의 그린 듯한 미소가 사라졌고, 눈가가 매섭게 치켜올라가며, 부드러웠던 눈빛이 금방이라도 사람 하나 잡을 듯이 서늘하게 바뀌었다.
"어머. 쓰레기 같은 놈이 감히 내 앞에 다시 나타났네? 분명히 그쪽 유실장에게 그날 경고했을 텐데? 또다시 얼굴 들이밀면 무슨 수를 쓰더라도 너 묻어버리겠다고.. 내 말이 우습게 들렸나 봐?"
서릿발 같은 얼굴과 얼음장 같은 말투의 그녀를 보며 수빈은 가벼운 한숨을 쉬었다.
'후우. 개념 없는 놈. 적당히 좀 하지. 내가 옴팡 다 뒤집어쓰는군.'
수빈은 아랫배에 힘을 주고 허리를 꼿꼿이 세운 후 진중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그날 일을 사죄드리러 찾아왔습니다. 앞으로 두 번 다시 그런 실수는 없을 것을 약속드리겠습니다. 철없는 젊은 놈의 치기라고 여기셔서 부디 이번 한 번만 용서 부탁드리겠습니다."
잠시 호흡을 고르며 차분한 눈빛으로 그녀의 살기 어린 눈을 정면으로 받아내며 진심을 담아서 나지막한 톤으로 토해냈다.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유아영 선배님."
말을 끝내고 양손을 허리 옆에 가지런히 내린 채 허리를 90도로 꺾었다.
3초 정도가 지난 뒤 허리를 펴고 그녀를 보았다.
살기 어린 눈빛 속에 한 가닥 호기심이 어려있다.
"이제 와서 무슨 사과. 뭐 두 번 다시 실수를 안 해? 웃기고 있네. 차라리 똥개가 똥을 안 먹는다고 해라! 누가 너같..."
흥분하여 하이톤으로 올라가는 코디의 말을 그녀가 잘랐다.
"경희야! 잠깐 빠져있어봐."
그녀는 분노와 함께 약간의 궁금함이 같이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수빈이라고 했지? 너희 사무실에서 시키던? 가서 사과하고 오라고?"
"그럴리가요. 제가 저지른 실수니 당연히 제가 찾아뵙고 사과하는게 인간으로서의 도리 아니겠습니까."
"도리? 어머나. 양아치가 도리를 다 찾네? 너희 사무실에서 시킨 게 아니라고?"
"사무실에서는 선배님 찾아뵙지 말라고 말렸습니다. 하하하. 찾아가면 제가 가루가 돼서 하늘로 승천(昇天) 할 거라고 하시더군요."
"근데도 굳이 날 찾아와서 사과랍시고 지금 하고 있단 말이지? 그럼 그날 회식자리에서 네가 나한테 한말 기억나니?"
"그럼요. 또렷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다시 한번 진심으로 사과드리겠습니다."
"그날 한말 다시 해보렴."
"네?? 지금 여기서요??"
"그래. 한번 더 똑같이 해보라고."
"굳이 그러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자꾸 똑같은 말 하게 만들래? 다시 해보라고."
한숨을 내쉬며 수빈이 유아영의 눈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제가 그날 [유아영씨. 얼굴도 미인이고 몸매도 완전 내 스타일인데.. 애 둘 딸린 엄마치고는 괜찮은 편인걸. 어차피 뒤지면 썩을 몸인데 오늘 저녁에 둘이서 찐하게 한번 놀아보는 게 어때? 오늘 바쁘면 남편 출장 갔을 때 연락해도 좋고. 나 정도면 같이 재밌게 놀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아?] 라고 말씀드렸던 걸로 기억합니다. 다시 한번 사과드립니다."
수빈의 눈을 뚫어질 듯 쳐다보며 듣고만 있던 유아영이 잠시 뜸을 들인 후 물었다.
"누구니 너?"
"아. 전 BBG에서 리더를 맡고 있는 수빈이라고 합니다."
"그딴 거 말고. 그날 발정 난 개 같은 눈빛을 하고 있던 쓰레기랑.. 지금 내 눈앞에서 줏대 있게 솔직하게 사죄하는 남자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인 걸? 종자가 다른데?"
"그때나 지금이나 같은 사람입니다. 다만 제가 몇 달 간 사고로 병원에 입원해 있으면서 많은 걸 깨닫고 반성을 많이 했습니다. 그날 일은 진심으로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선배님의 넓은 아량으로 한 번만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물끄러미 수빈을 보던 유아영이 의자에서 일어서서 다가왔다.
수빈과 한뼘도 안되는 거리까지 다가간 그녀는 수빈의 양손을 잡고 자신의 허리에 둘렀다.
개미처럼 가는 허리에 둘러진 손을 꼭 잡고 한참 동안 수빈의 눈을 응시하던 그녀가 갑작스레 봄꽃처럼 화사하게 웃었다.
"정말 재밌는걸. 얼마간 병원에 입원했었다고? 발정 나서 껄떡대던 쓰레기 같은 새끼가 진정한 남자가 되어서 돌아왔네."
"죄송한데 손을 이만 좀.."
"왜? 내 허리가 굵어서 맘에 안 들어?"
"그럴 리가요. 너무 가늘어서 세류요(細柳腰)라고 불리기에 합당하다고 생각합니다만.. 조금 무섭군요."
"왜? 내가 너 잡아먹을까 봐?"
옆에서 멍하니 구경하던 코디가 깜짝 놀라서 끼어들었다.
"언니. 갑자기 왜 그러세요. 저런 쓰레기 같은 놈이랑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야! 너 그 손 빨리 안 치워?"
"조용히 해! 이것아! 내가 붙들고 있는 거니깐.. 걱정 안 해도 돼. 쓰레기가 갑자기 사랑하는 여자 외에는 쳐다도 안 보는 그런 멋진 남자가 되어서 돌아왔다고. 넌 신기하지 않니?"
"언니. 지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눈을 보면 알아 이년아. 너도 내 나이 돼봐.. 이놈은 지금 내 허리를 감싸고도 눈빛이 차분하다고. 얼마 전만 해도 나보고 한번 하자고 그렇게 껄덕대던 새끼가..."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제가 병원에서 늦게나마 철이 좀 들었습니다. 손 좀."
"알았어. 튕기기는."
유아영이 아쉽다는 듯 손을 놓고 말했다.
"흠. 좋아. 큰맘 먹고 용서해주지. 단 조건이 있어."
"말씀하시죠. 선배님."
"내가 지금 찍고 있는 영화가 있거든. [유전자 변형술사] 라고. 거기에 카메오로 한번 나와라. 그럼 용서해주지."
"불러만 주신다면 영광입니다. 연락 주시면 하시라도 달려가겠습니다. 용서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우리 사무실 김실장 통해서 연락줄 테니깐 다음에 영화 촬영장으로 오렴. 그때 보자."
"네. 알겠습니다."
수빈은 인사를 하고 방을 나와서 깊은 한숨을 쉰 후 다시 드라마 촬영장으로 걸어갔다.
촬영장에서는 장피디가 얼굴이 뻘겋게 달아올라 로드매니저를 향해서 입에서 불을 토해내고 있는 중이다.
"YK가 요즘 잘 나가긴 하나 보네. 그래서 방송국 드라마 피디 정도는 우습게 보이나 봐? 카메오 역할이 래퍼라고 분명히 전달했는데 누굴 보내? 수빈? 대사 두 줄만 돼도 못 외우는 인간을 래퍼로 출연 시키라고? 지금 나랑 장난쳐?"
수빈은 짜증스레 머리를 흔들면서 장피디에게 빠른 발걸음으로 다가갔다.
'후우. 온 동네 똥을 싸질러놔서 치우느라 한 세월이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