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8화. 하급신의 회합일
놀라는 아샤와 아진을 잠시 보던 태월은 말을 이었다.
“첫 번째는 영혼의 진체를 보는 능력이야. 다행히 하급신 수준이라 이 정도지만, 중급신만 되어도 우린 육신이 아닌 격으로만 대항해야 했을 거야. 두 번째는 격을 부수는 브레이크 능력이 있었어.”
“그럼, 단지 하급신 수준이라 안 위험했던 거야?”
“그렇지. 우릴 처음부터 의심하고 있긴 했어. 인간 종족으로의 의심이 아니라, 이 세상의 존재가 아닌 걸 의심하고 있었더라. 그리고 인과율에 영향을 조만간 받을 거라고 여기고 있었더라.”
“어, 어째요. 진짜 우리가 모르는 미지의 위험이 다가온다는 거잖아요?”
“걱정하지 말아. 우리가 빨리 사라지면 이 세상에 미치는 영향이 적어질 테니 괜찮을 거야. 물론 이것도 하테라가 가진 정보야.”
태월은 먼저 라파로를 찾기로 했다.
그 후 하급신의 회합 장소로 가서 최대한 그들을 취하는 게 최선이라 여겼다.
열흘을 날아 첫 번째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었다.
오색의 깃발이 휘날리는 5층 적색 건물이었다.
“테이루드 말대로 찾기는 아주 쉽네.”
태월의 모습은 테이루드의 모습으로 변해있다.
포란의 모습으로 있다간 경계심을 줄 거 같아서다.
“어디서 오셨습니까?”
“라파로 안에 있나? 친구인 테이루드가 왔다고 전하게. 아주 좋은 술을 구했다고 해.”
테이루드의 기억으론 라파로도 애주가였다.
그래서 큰 접점이 없음에도 나름 둘은 친한 것이다.
경계를 서던 자는 신의 기운을 풍기는 태월을 크게 의심하지 않았다.
자신의 주인이 술을 좋아하는 걸 아는 자가 많지 않은 탓이다.
“접객실로 드시지요. 그리로 모셔드린 후 주인님께 다녀오겠습니다.”
태월 일행은 고개를 끄덕이고 그를 따라갔다.
라파로가 호키스의 제자나 마찬가지인지라, 그 역시 시공간 이동에 관심이 많았다.
10여 분을 기다리자 방문이 열리며 남자 하나가 들어섰다.
“어이, 테이루드! 웬일인가? 아직 회합이 되려면 좀 남았는데?”
라파로가 태월과 말을 하면서도 양옆에 서 있는 존재를 살피고 있다.
“하하, 내가 귀한 걸 얻었거든. 자네 생각도 나는 김에 유람 삼아 온 거지. 아, 이쪽 둘은 새로 생긴 내 애인들이야. 이번에 3급신이 된 초급이지.”
테이루드가 술 먹을 당시, 음성 파장을 기록해둔 덕에 라파로에게 의심을 받진 않았다.
“허, 또 말발로 구라를 쳐댔나 보네. 요괴야 그렇다 쳐도, 3급신이 됐는데 자네 말에 넘어간다고?”
부러움 반, 질시 반으로 태월 일행을 훑어본다.
“으흐흐, 자네가 모시던 그분 덕분이지!”
“어? 무슨 개소리야?”
바람둥이 입에서 모시던 분의 이야기가 나오자, 인상을 찌푸리는 라파로다.
“워워, 진정하라고. 자네도 그분이 다시 넘어왔을 때 열흘간 찾지 못했잖아? 그 후에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숨을 거두었고.”
“그래! 그래서?”
“내가 그 열흘간 있던 곳을 찾아냈어.”
“뭐?”
라파로는 과거에 술에 취해, 그에게 호키스가 겪은 일을 말한 적이 있었다.
“지금 장난해? 그걸 네가 어찌 알아?”
“자네, 하테라 알지?”
“너랑 잘 어울려 다니던 그 비밀스러운 놈?”
“그래, 그의 주특기가 사실은 따로 있어. 바로 흔적을 찾아내는 일이지.”
“아, 어쩐지 자신의 권능을 자꾸 감추더라니. 그런 음흉한 기술이 있었군. 그래서 뭘 찾아냈는데?”
“뭐, 별건 아니고. 그곳 세상에 있던 물건들이야. 나야 별 필요 없는 것도 있어서, 겸사겸사 온 거지!”
“헉! 정말인가? 지, 지금 볼 수 있나?”
태월은 생각보다 표정이 더 크게 변하는 그를 이상하게 여겼다.
“자네도 있을 건데 왜 놀라나?”
“있다니? 그분이 오셨을 땐, 거의 숨이 넘어가는 상황이었어. 권능을 쓰기에도 이미 늦었고. 가지고 계신 거라고는 반쯤 망가진 이동 장치 하나가 전부였네.”
‘헐, 이동 장치가 있다고?’
“그래도 대단한 걸 남기셨네. 그래서 고치기라도 한 건가?”
“그래, 1년간 고생했지만, 수리는 했지. 뭐 새로 만드는 게 아니라, 말 그대로 복구만 시킨 거야. 내 실력으론 아직 그걸 만들지 못하네.”
“와, 자네 같은 천재가?”
“다 가능한데 딱 한 가지를 해결하지 못했어. 뭐 사실 수리하긴 했지만, 내가 그걸 쓰지도 못하지.”
“아니? 왜?”
“다스릴 힘이 부족해. 최소 2급 신은 되어야 가능할 거야.”
역시나 문신의 말이 맞았다.
“2급 신이면 다 가능해지나?”
“그렇지는 않아. 그곳에 있던 물건들이 여러 개 필요해. 하나 가지고는 불안정하거든. 교차 검증이 되어야 해. 그리고 지금 그 장치는 그분이 마지막으로 다녀온 곳의 포탈만 열 수 있어. 그것도 그곳의 물건이 3개나 있어야 해.”
“에이, 물건이 있어도 완벽하지 않네. 결국 자네가 못하고 2급 신이 필요하잖아.”
“그, 그렇긴 하지.”
“우울한 이야긴 그만하고 일단 한잔해야지?”
“물건을 좀 줄 수 있긴 한가?”
“에이, 친구 좋다는 게 뭔가? 이럴 때 도와야지.”
“지, 진짜 고마워! 언젠가 나도 2급이 될 거고, 그때 가면 되지 뭐. 가면 그분이 당한 몇 배를 갚아 줄 거야. 이참에 그곳 인간 종족을 몰살시키는 것도 괜찮을 거 같고.”
도전할 꿈이 생겨나서인지 라파로의 표정은 환해졌다.
‘야! 이놈이 진짜! 그냥 두면 안 되겠어. 이 자식이 그리로 가면 지구는 위험에 빠지게 되겠네.’
태월은 화가 치솟는 감정을 억누르고, 라파로에게 지구에서 가져온 술을 시음시켰다.
“와, 이거 진짜 목에 착착 감기는데? 위장에서 불끈불끈대기도 하고.”
“왜? 한 잔 더 줄까? 싫으면 말고.”
“당, 당연히 좋지!”
두 병의 양주를 마시게 해준 태월은, 이번엔 폭탄주를 제조해줬다.
“이야, 술의 신기원이네. 이렇게 환상적인 맛이 있다니.”
한 시간 정도를 만들어줬더니 혀가 조금씩 꼬이고 있다.
사실 신격을 가진 이가 쉽게 술에 취할 리는 없다.
그러나 술을 좋아하는 신 중에는, 권능을 억제한 후 취기를 그대로 느끼길 원하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지금 애주가인 라파로가 취해있는 것이다.
태월은 그에게서 시공간 이동에 관한 궁금증을 푸는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시공간에 대한 전체적 개론도 배우게 되었다.
“하하, 그, 그래서 그걸 이렇게 이해해야 더 시버져. 내가 그분에게 배울 땐 어렵게 배웠다니까아? 나처럼 가르치는 스승이 있었다아면, 제자는 초초초 천재 소릴 듣게 됐을 거야. 꺼어억!”
말이 중간중간 꼬이고 있었다.
“와, 진짜 자네는 대단해.”
“크큭, 내가 그, 그런 놈이긴 해! 아하핫.”
혼자서 자화자찬하며 취해서 열변을 토하는 라파로다.
태월이 이렇게 띄워 주는 건 이유가 있어서다.
영혼을 흡수한 후 머릿속 지식을 가져올 수 있지만, 그것은 완벽하지 못하다.
생소한 분야라서 그 지식을 태월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그만큼 시간이 오래 걸리게 된다.
지식은 그냥 이론일 뿐이다.
이제 개념과 접근법을 알았으니, 비위 맞추는 건 필요가 없어졌다.
“어? 왼, 왼손은 왜 쳐들고 있나? 궁금한 게 또 있어! 뭔데? 뭐든 말해봐아! 나 천재라니꽈!”
“응, 아주 중요한 게 있어.”
“끄윽. 말하라구! 자네에게 받은 귀중한 것이 있는데 뭔들 말 못 해주겠나? 어 엉? 안 그래?”
-슈악! 꺼어억? 끄억!
취한 상태로 도깨비에 삼켜지는 라파로다.
권능을 억제한 상태였기에 반항도 미미했다.
“억수로 말이 많네. 그래도 멀쩡할 때 파장을 기록해서 다행이야.”
“아이, 오빠 이 자식 술 먹으면서 난 왜 더듬는 거야! 술버릇이 안 좋네.”
“그, 그러게.”
“다행히 겉만 만져서 참은 거야!”
테이루드의 머릿속 기억엔 라파로의 애인과 함께 술을 마신 적이 있었다.
그때 테이루드는 더 심했었다.
비록 그게 3급신이 아니라 상급 요괴였지만.
그리고 3급신을 모시는 여성체는 다 그런 대접을 받고 있었다.
아주 중요한 정보들을 얻느라, 태월은 사실 그 상황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
태월은 미안한 마음이 들어 결국 그 정보를 털어놓았다.
“다음엔 오빠가 여자 해! 내가 남자 할게.”
“헉! 그럼 내가 남자에게 만져지잖아?”
“어? 오빠는 그럼 내가 낯선 놈에게 만져지는 게 좋아?”
“아, 아니….”
결국 태월 일행은 하급신을 만나러 다닐 때 전부 남성체가 되기로 하였다.
“2차 세계 대전 때 쓰던 통신기처럼 생겼네. 등에 메고 다니면서 통신하던 걸 영화에서는 본 적이 있는데 말이야.”
“오빠! 열흘간 뭐 하면서 지낼 거야?”
“나야 라파로로 변신했으니 상관은 없는데. 여기서 지내지 뭐.”
“에, 그럼 언니가 테이루드를 해.”
“넌? 누구 하려고?”
“난 원래 있던 그대로를 해야지 뭐.”
“남성체로 안 하고?”
“여성체가 둘이나 들어왔는데, 둘 다 사라지면 이상하잖아? 하나만 어디 간 걸로 해야지.”
열흘을 보내고 난 태월은 연구실에 있던 물건들을 전부 아진의 가방에 넣어버렸다.
그리고 회합이 열리는 장소로 길을 나섰다.
이번엔 합의대로 전부 남성체이다.
테이루드와 하테라 그리고 라파로다.
태월은 그중 라파로로 변신 중이다.
“그래도 이런 갑옷이 있어 다행이네.”
“왜요?”
“3달도 채 안 남았는데, 나온 배를 표 안 나게 가려주잖아. 복원기능이 있다더니, 이런 것도 가능하네.”
“대신, 전체적으로 덩치 있는 체구가 되었잖아요. 그들이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까요?”
“상관 안 할걸? 3급 신들도, 유희 삼아 변신을 종종 하잖아. 그러니 체형 변형이야 아무것도 아니지. 그냥 당당하게 굴면 돼.”
이것도 하급신의 기억에 있는 내용이다.
그리고 셋이 입고 있는 갑옷은 상위 신의 유물이다.
3급신이 입기에 격이 떨어지는 옷이 아니라, 부러워할 유물이었다.
태월 일행이 도착한 곳은 요괴의 유적지 중 하나였다.
누군가 지켜볼 수도 있기에 두리번거리는 짓은 하지 않았다.
기억에 있는 장소이기도 해서 별달리 문제도 없다.
“오, 셋이 어떻게 같이 온 거야?”
“이 둘이 나를 찾아왔더군. 뭐 술 자랑하러 온 거였지만.”
“오호, 테이루드에게 명주라도 생겼나 보네. 군침 당기는데?”
“오늘 몇이나 오는 거지?”
“뭘 또 새삼스레 물어. 우리들이 언제 통보한 적이 있었나? 작년에 14명 모였으니 올해도 그쯤이지 않을까? 35명 중에 그 정도면 참석률이 높은 거라고! 자자 들어가지. 나도 지금 도착해서 안의 상황은 나도 몰라.”
‘흠, 40%나 모인 거면 확실히 그렇군. 과연, 이번엔 얼마나 왔을까? 그런데 이 자식이 누구였지?’
중요한 인물이 아니었는지, 라파로의 주된 기억에는 없었다.
모든 기억이 태월에게 오지 않는다.
중요한 기억만 전해질 뿐이다.
태월은 그와 잡스러운 대화를 나누며 안으로 진입했다.
“오, 안 보이던 자도 몇몇 섞였군. 저기 왼쪽으로 가자고. 그쪽이 술꾼들 아닌가.”
“어이! 이쪽이야 어서들 와!”
태월 일행을 발견했는지, 술판을 벌이고 있던 자들이 손을 흔들어댔다.
‘음, 우리 셋 빼면 13명이네. 대놓고 공격하기엔 숫자가 너무 버겁네. 어떻게 하지?’
고민을 품은 채, 태월 일행은 그들 속으로 끼어들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