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6화. 하급신을 찾아서
졸업식이 끝나고 이틀 후, 태월은 칼리타 법술가를 만나러 갔다.
“어서 오세요. 졸업을 축하합니다.”
“하하, 말 편히 하셔도 됩니다.”
“그건 학생일 때나 가능한 이야기지요. 백작께 지금 그랬다간 황태자가 저를 잡아갈 것입니다.”
태월은 이곳 세상에 오래 있을 상황이 아니기에, 이들과는 깊은 인연을 맺지 않으려 노력했다.
인연이 생기면 정도 깊어지는 것이고, 그럼 헤어질 때 서로 간에 힘이 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일로 보자 하신 건지?”
“축하도 드릴 겸 작별 인사를 하려는 것이죠.”
“어딜 가십니까?”
“고향으로 내려가려 합니다. 수도 생활은 할 만큼 했으니, 더는 미련이 없습니다.”
“아쉽게 되었군요. 훗날 여행을 가게 되면 한번 들르겠습니다.”
백작 같은 고위 귀족이라면, 칼리타 법술가의 고향 주소는 어렵지 않게 알아낼 수 있다.
“이것은 제 졸업 축하 선물입니다. 같은 종류긴 한데, 신경 써서 만든 것입니다. 제가 연구하고 있다고 한 것 기억하시죠? 그 완성품입니다. 백작 부인 두 분께도 드리는 것이라 3개인 거죠.”
칼리타가 내미는 작은 상자를 여니, 2mm 두께의 작은 반투명판 3개와 목걸이 3개가 들어 있었다.
목걸이엔 동전 크기의 메달이 달려있다.
“이게 뭔가요?”
“백작께서 신기한 것을 좋아한다기에 적당하다고 여겼습니다. 목소리 변조기입니다.”
‘이거 시중에도 있는 거 아닌가? 이걸 그리 오래 연구했다고?’
태월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칼리타가 싱긋이 웃는다.
“설명이 부족했네요. 원하는 사람의 목소리를 10초간 기록시키면, 그 사람의 말투를 그대로 모방할 수 있습니다. 단, 3분 내로 끝내야 합니다.”
“10초간 기록시키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몇 마디 기록 못 할 건데요? 기록시킨 말만 모방을 굳이 할 필요가….”
“쓰지 않았던 단어도 모방이 됩니다. 목소리의 파장을 따오는 방식이거든요.”
“굉장하네요. 그런데, 이거 잘못하면 범죄에 이용될 가능성이 크네요?”
“법술기기라는 게 거의 그렇습니다. 사용자에 따라 이롭기도 하고 해롭기도 하죠. 상자 바닥에 설명서가 있으니 그에 따르면 됩니다.”
“하하, 재밌는 선물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요괴들에게도 가능할까요?”
“소리를 내는 모든 생명체는 다 가능하리라 봅니다. 소리나 발성에는 언제나 파장이 있게 마련이죠.”
모창대회 나가면 우승할 것 같은 제품이었다.
‘모기 퇴치도 가능하려나?’
지구에서 야영할 때 겪은 모기 생각이 문득 떠오른 태월이다.
그리고 이곳에도 스토키라는 모기와 유사한 해충이 있었다.
“스토키를 물리치는 퇴치기로 사용 가능한가요?”
“하하, 이 비싼 법술기기를 그 용도로 쓴다고요? 과해도 너무 과합니다. 뭐 가능은 하지만요.”
“다른 기능 다 없애고 스토키만 물리치는 건요? 아주 단순하게 최저가로도 가능하려나요?”
“음, 법술가루가 워낙 비싸서 시중엔 인조 법술가루가 떠돌고 있죠. 그건 아주 저렴합니다. 대신 효능이 아주 미약하죠.”
“그래서요?”
“단순하게 스토키의 접근을 막는 건 간단합니다. 스토키 천적의 파장을 내거나 싫어하는 파장을 만들어내야죠. 후자가 더 쉽습니다. 스토키가 내는 파장의 기록을 만든 후, 정반대의 파장을 퍼트리면 되잖습니까? 그건 제조 때 하급 법술가루로 기록해 만들면 됩니다. 그 후엔 인조 가루로 새긴 기기를 찍어내면 끝이네요.”
‘이곳의 파장 연구가 지구와는 전혀 다르게 출발했구나. 지구의 모기 퇴치기보다 나으려나? 지구로 돌아가면 실험 삼아 제작해봐야겠어. 일 년간 배운 것도 꽤 신세계였지.’
태월은 칼리타와 헤어진 후 집으로 돌아왔다.
내일부터는 그동안 미루었던 하급신 사냥을 해야 한다.
“기록을 만들었으니, 이걸 혀 천정에 붙이면 되네?”
“호호, 한번 해봐.”
“에헴, 아진아 수청을 들어라! 어허, 냉큼 저고리를 벗지 않고 무얼 하는 게냐?”
태월의 목소리가 맞기는 하는데, 평소에 쓰지 않을 사극 버전이었다.
“풉, 아니 그게 뭐야?”
“어때? 언니 똑같았어?”
“목소리는 일치하지만, 오빠가 그 버전으로 말을 하는 걸 본 적이 있어야지.”
“참나, 내가 갑자기 변 사또라도 된 게야?”
그 후 셋은 목소리를 서로 바꿔가면서 테스트 내내 키득거리고 있다.
다음 날이 되자 태월 일행은 제국을 벗어난 지역으로까지 나갔다.
졸업 전에 미리 카이샤 제국에서 특급 사냥대의 출전을 통보한 터라, 국가 간 분쟁이나 오해는 없을 터였다.
“어디서 오셨습니까?”
“카이샤에서 귀국에 협조 전문을 보냈을 겁니다. 카이샤 제국의 특급 사냥대를 책임진 코리아 백작이오!”
“아! 며칠 전에 연락이 왔었습니다. 도베타 왕국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이대로 통과하시겠습니까?”
“우린 바빠서 들르지 못할 듯하오. 바로 떠날 생각이오!”
“넵, 알겠습니다. 상부엔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일개 초소의 하급 간부지만, 그는 나이가 들어 보였다.
한국에서 태어난지라, 면식도 없는 중년의 나이인 그에게 대놓고 하대하기가 어색했다.
태월 일행은 초소 통과 후 곧바로 청풍을 타고 날아올랐다.
거리가 순식간에 멀어지자 그걸 지켜보던 병사들이 수군거렸다.
“휴!”
“야! 봐, 봤어? 여자들이 엄청나잖아?”
“그, 그러게. 저렇게 아름다운 분들은 태어나서 처음 보는 것 같아.”
“대륙 제일이라는 알로이 제국의 성녀가 작년에 이곳을 통과했잖아? 그분도 저 정도는 아니었어.”
“이야, 난 작년에 여기에 없어서 못 봤지만, 굉장했다던데. 허, 그런데도 그렇게 차이 난다고? 하긴, 방금 나도 숨이 쉬어지지 않더라.”
“성녀도 아름답지만 결국 지상에 있는 거고, 저분들은 천상계에 있는 미의 여신이랄까?”
“그런데 소문에 듣자 하니, 저 백작의 아내들이라던데?”
“에이, 하나도 아니고 둘 다? 그건 좀 아닌 거 같다. 인류를 멸망시킬 일이 있냐?”
갑자기 태월이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대마왕이 되고 있었다.
“에이, 귀가 왜 이리 가렵지?”
“오빠, 내가 귀 파줄까?”
“비행 중에 귀를 파다간, 까딱하면 사오정이 될 수 있기에 거절하마.”
“아, 아깝다. 오빠 입에 나방이 나올 수 있었는데.”
“오빠! 아직 멀었어요? 잠시 30분씩 4번 쉬고 20시간이나 날았는데 청풍이 힘들겠어요.”
“거의 다 왔어. 푹 쉴 수 있으니 문제는 없을 거야. 목적지에서 일을 마치고 나면, 멀지 않은 1시간 거리에 두 놈이 더 있어. 이 지역이 후보지 중에 최고랄 수 있지. 셋이나 되잖아?”
하급신을 찾아간 태월 일행은 과거와 달리 여유가 넘쳤다.
아샤와 아진이 격을 얻게 되었기에, 둘만으로도 하급신 하나 정도는 꿀리지 않았다.
거기에 태월의 문신이 있기에 무난한 사냥이 되었다.
일반 요괴들도 몰려왔지만, 거뜬히 처리했다.
“이놈도 가진 게 별거 없네. 그래도 법술가루를 모아 놓은 건 꽤 짭짤했어.”
“오빠! 이쪽에 있던 금괴와 보석은 아진 언니 가방에 넣었어. 이제 좀 쉬자.”
“알았어! 잠시 쉬도록 해. 난 영혼 흡수만 하고 올게.”
요괴가 쓰러진 곳에서, 귀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뿔만 회수하는 태월이다.
그 후 퍼져있는 영혼들을 향해, 도깨비가 뛰쳐나가 휘젓고 다녔다.
태월이 일행에게 돌아가자 아진이 책 하나를 내밀었다.
“오빠! 이거 봐요. 누워서 쉬는데 천장 문양이 어긋나 보여서 확인해봤어요. 공간이 있고 이 책 하나가 숨겨져 있었어요.”
“하급신이 숨겨 놓은 건가? 뭐가 불안해서 천장에 숨겨? 아니면 다른 이가?”
태월이 손에 든 책자의 표지엔 연금법술이라고 요괴 언어로 쓰여있다.
아카데미 때에는 들어본 적이 없는 분야였다.
기이한 생각에 책을 훑어보았다.
금속 제련 시에 법술가루를 섞어 다양한 합금을 만드는 제조법이 적힌 책이다.
“허, 인간 종족이 합금을 만들 때는 금속을 비율로 섞을 뿐인데, 이건 전혀 다른 방식이네. 특이한 금속이 많잖아?”
아샤와 아진도 이제는 하급 신의 격을 가진지라, 재능의 전이가 쉬웠다.
요괴의 언어를 할 수 있게 됨으로써, 태월이 보고 있는 책을 함께 들여다보고 있다.
“오빠! 이거 지구에 가져가면 엄청날 거 같은데? 뭐 법술가루가 그만큼 많아야 하지만.”
“그래서 여기에 법술가루가 많았군. 지구에서는 인조 법술가루를 사용해봐야지. 지구에 있는 재료로 가능한 방식을 찾아내야 해. 이거 새로운 숙제가 주어진 셈이네.”
다행히 태월에게는 여전히 지구의 물품이 많이 있다.
그중에는 금속 재질의 물품도 많았기에, 해체해서 실험해 볼 샘플은 충분했다.
“진작 알았다면 졸업논문도 이걸로 시도해볼걸. 그럼 연구 시간도 확 줄었을 텐데.”
“생각보다 요괴 진영 쪽 법술이 쓸모가 많네. 삶의 방식이 달라 연구 분야도 다른 듯해.”
“오빠! 그런데 요괴 장비 중엔 이런 금속으로 나온 물품이 없었잖아?”
“이유는 모르지만, 상용화시키지 않은 것 같아. 그러니 제작법 책자가 은밀히 숨겨져 있지. 그리고 여길 봐.”
태월이 가리킨 곳은 새로 붙여진 마지막 장이었다.
“연구한 자가 여기 하급신 이름이 아니네? 납치당해 20년간 연구했고, 그에 대한 보상으로 가족을 풍요롭게 돌봐주겠다는 약속은 안 지켰군. 전쟁 소모품으로 가족이 동원되었고, 결국 전부 죽었다는 걸 우연히 알게 된 모양이네. 불쌍하군.”
“복수할 방법이 없어서 가짜 연구일지를 넘겨주고 진짜는 천장에 숨겼네요. 그러다 가짜인 게 들통나자 바로 자살해버렸고. 그것마저 넘겨주긴 죽기보단 싫었던 건가 봐요.”
“우리가 복수해준 격이니, 연구하신 분의 결과는 우리가 잘 쓰도록 할게요. 20년이라니 고생했네요.”
태월이 책자를 보면서 읊조리듯 중얼거렸다.
요괴라도 천도시켜주고 싶었지만, 그의 영혼은 이곳에 없었다.
태월은 책자를 배낭에 입고시킨 뒤, 하루 거리에 있는 두 하급신을 찾아 떠났다.
“어라? 안 보이네? 어딜 간 거지?”
“운 좋게 출타 중인가 봐요. 다른 하나에게로 가보죠.”
“언제 올지 모르니 기다려 볼 수도 없고, 진짜 명이 질긴 놈이군.”
요괴들은 있었지만, 그들을 굳이 때려잡진 않았다.
잔챙이들에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아서다.
세 번째 목적지는 날아서 1시간 거리인지라 그쪽으로 향했다.
“하하, 그놈이 어디 갔나 했더니, 여길 놀러 왔군. 운이 좋고 명이 길다는 거 취소!”
두 하급신의 기운을 감지한 태월은, 아샤와 아진에게 신의 유물이었던 갑옷을 걸치게 하였다.
얼굴은 변신 팔찌를 통해 죽였던 여성 하급신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격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게 했다.
태월도 한 번 경험한 포란의 모습으로 변신했다.
지금의 태월은 포란이 가졌던 생전의 기운 수준과 유사했다.
하급신 중 최상급에 가까운 상태였다.
태월 일행이 다가오는 걸 감지한 테이루드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밖으로 나왔다.
“그대들은 누구인가? 새로이 신의 재단에서 승격한 자들인가? 오, 전부 여성체로군! 후후, 겉으로만 봐도 감질나는군!”
“어쭈! 테이루드? 그동안 많이 컸구나!”
“누, 누구냐?”
태월이 쓰고 있던 후드를 벗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