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화. 격의 공유
태월 자신은 후반부를 익히는 데 벅찬 부분이 있긴 해도 더 노력하면 가능할 거로 봤다.
“그거참, 나는 문신의 격이 하급신을 넘어선지라, 수용될 거 같긴 한데. 아무래도 너희도 격이 필요한 거 같아. 아니면 그와 유사한 단계에 도달하든가.”
“경지가 높아지든가 격을 쌓든가 해야 한단 거죠? 아쉽지만 할 수 없죠. 그래도 전반부만으로도 두 배를 이뤘으니 만족해요.”
“저도 아진 언니의 말에 동감!”
태월은 그녀들도 같이 배웠으면 좋겠단 생각을 했다.
그녀들이 만족한다지만, 태월은 못내 아쉬운 것이다.
‘무슨 방법이 없을까?’
태월이 곰곰이 생각에 빠져있자, 아샤와 아진은 그게 후반부에 몰두해서 그런 줄 알고 자리를 비켜주었다.
그녀들은 이참에 완숙된 전반부를 만드는 것도 좋겠다고 여긴 것이다.
한 시간 정도를 생각에 잠겨있던 태월에게 하나의 단서가 떠올랐다.
‘아, 아진은 요괴에 의해 탄생된 거잖아. 결국 본질로 보면 인간보단 요괴에 가까운 거였고. 지금은 완전히 인간이긴 해도, 그 속성이 없어진 게 아니야. 호흡법과 기연에 의해 오히려 요괴보다 몸 자체가 더 우수한 자질로 바뀌었어. 격은 없어도 재능의 틀로 보면 하급신 수준은 되지 않을까?’
아진에게 가능성이 보이자, 아샤가 더 신경쓰였다.
‘에고, 둘이 친자매나 마찬가지인데 언니만 후반부를 배우게 되면 의기소침해질 건데. 어떨 땐 나보다 둘이 더 깊은 친밀감을 보이기도 하고. 영혼의 공유라서 그런가. 어? 공유? 아진에게 격이 생기면 그 격도 공유될 수 있는 거 아닐까? 하하하! 확실하지는 않지만, 가능성이 커졌어.’
태월은 후반부의 진전을 뒤로 미루고 본격적으로 그녀들을 위해 테스트를 해보기로 했다.
‘무리를 하면 6일의 여유시간이 있어! 사냥터에서 바로 수도로 갈 수 있으니 말이야. 뭐, 정 안 되면 하루 이틀 결석 처리되지 뭐.’
태월은 그녀들을 불렀는데, 표정이 묘했다.
“오빠? 뭐 하느라 밥도 안 먹고 계속 생각에 빠져있었어? 후반부가 어렵긴 어렵나 봐. 방해될까 봐 부르지도 못했어!”
“어? 내가 그리 길게 멍 때렸다고?”
“무려 4시간이야!”
“허, 한 시간 정도 지난 거 같았는데.”
“후반부 막힌 부분은 잘 해결됐어?”
“아, 다른 생각한 건데? 음, 사실은 말이야. 너희 문제야.”
“우리가 왜?”
태월은 자신이 생각했던 바를 그녀들에게 꺼내 놓았다.
“어머, 그게 가능할까? 그게 가능하면 요괴들도 영혼의 공유를 통해 신들과 친한 이들이 전부 격을 만들 수 있을 거 아냐?”
아샤의 말에 태월도 딱히 틀렸다고 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허점이 있었다.
“글쎄, 신이 된 존재가 자신의 모든 것을 다 까발리고 영혼의 공유를 하려 했을까? 뼈를 깎아 이룬 격을 그리 쉽게? 하다못해 일국의 왕자들도 왕이 되려고 형제들을 죽이는 판에….”
“그, 그런가?”
“아, 물론 희박하지만, 하급신 정도에서 소수는 있었겠지.”
그런 정보를 다른 이에게 알리는, 바보짓을 하는 신은 없었을 거라는 게 태월의 생각이었다.
“가능성이 있는데 포기하면 두고두고 후회할 것 같아. 너희는 어떨지 모르지만, 내 마음은 그래.”
“알았어요. 우리에게도 좋은 일이잖아요.”
“오빠, 고마워요.”
태월은 로빈을 불러 수도로 먼저 올라가게 한 후에, 그녀들을 데리고 7번째 하급신 사냥을 나섰다.
이번에는 문신에 필요한 게 아니라 아진에게 필요한 사냥감인 셈이다.
일단 하급신의 격만 생긴다면, 더는 욕심부릴 필요가 없었다.
지구로 돌아가는 것이 최종 목표였다.
“와우, 이틀간 날아온 보람이 있네요. 하급신이 어딜 가지 않고 그 장소에 있다니.”
“그래, 운이 좋다 해야겠지.”
“어떻게 접근할 생각이에요?”
“내 생각엔 포란이 하급신들 사이에선 이름이 알려졌을 거야. 거의 중급 가까이 다다른 무력이었으니.”
“어? 오빠가 포란으로 변신하려고요?”
“그 요괴의 모습에다 탄월을 슬쩍 드러내면 바로 믿지 않을까?”
“손톱으로 쓸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하급신이 대표기술만 있으면, 다양한 방식으로 다루는 거 아니겠어? 들키면 한판 붙지 뭐.”
태월은 이 하급신이 포란과 대면한 적이 없기를 바랐다.
이번에 맞닥뜨리게 될 하급신에게 혹여나 숨겨둔 능력이 있어서 도망을 쳐버린다면 곤란했다.
기껏 시간 내서 온 게 허사가 되고, 아진에게 반년 이상 허송세월하게 해야 한다.
태월이 변신 스카프와 변신 가면을 사용해 포란으로 변했다.
아샤가 키득거리고 있었는데, 짧은 치마를 입은 매혹적인 여자 요괴인 탓이다.
한숨을 쉰 태월은 목소리를 몇 번 연습하더니, 그를 만나러 갔다.
경계를 서던 요괴 하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가오는 태월을 보고 있다.
“어딜 보냐? 눈 안 깔아?”
격의 존재를 숨기지 않고 드러낸 상태라, 경계병은 몸을 움츠렸다.
“어쭈? 입을 닫으면 다야?”
“어, 어디서 오셨습니까?”
“요즘 머리 좀 식히느라 유람 중이다. 여기 콜라코라는 3급신이 여기 있지? 나와보라고 해.”
“헛, 저희 신을 그렇게 함부로….”
“너한테나 함부로지! 나한테는 별것도 아냐. 같은 3급신이라 해도 다 같은 게 아니거든? 하여간 있어 없어? 있는 줄 알고 왔으니 똑바로 해!”
“누, 누구라고 전해드릴까요?”
태월은 언월도를 출고시킨 후 장난스럽게 20m 밖의 나무를 향해 가볍게 내리그었다.
반월이 칼에서 튀어나오며 아름드리나무를 손길 한 번에 두 토막 내버렸다.
-쉬익! 슈칵! 쿠쿵!
“헉!”
“포란이라고 하면 알 거야! 모르면 어쩔 수 없고!”
“알겠습니다! 기다리십시오!”
“성질 같았으면 나오라고 소리쳤겠지만, 나 요즘 차분해지려 노력 중이거든? 그러니 빨리 전해!”
“넵! 다녀오겠습니다!”
말 잘 듣는 훈련병 같은 모습을 보이며, 경계병이 후다닥 어디론가 달려갔다.
동굴에 있던 콜라코는 잠을 자다 눈을 번쩍 떴다.
자신과 비슷하거나 그 윗줄의 존재가 격을 드러내자, 몸이 저절로 반응한 것이다.
그러다 익숙한 자가 다가오는 게 느껴져 잠시 기다렸다.
“주인님! 종이 인사드립니다.”
“아, 그래. 인사는 됐고 무슨 일이지? 누가 온 거 같은데!”
“아, 무시무시한 신이 나타났습니다. 먼 거리에서 손짓 한 번에 큰 나무가 두 동강 났습니다. 반월 모양의 강기가 쏘아지더라고요.”
콜라코도 나무를 두 동강 낼 수 있긴 했다.
그러나 원거리에서 가볍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속임수가 아니라면 최소한 자신보단 위란 소리였다.
그러다 떠오르는 게 있었다.
‘반월의 강기? 그것도 원거리 공격?’
“혹시 이름이 뭐라고 하더냐?”
“포, 포란이라고 했습니다.”
“아! 나도 소문은 들었지. 조만간 중급으로 올라선다는 그 여신!”
“네, 여성체이긴 했습니다.”
“음, 왜 왔을까?”
“어, 어떻게 할까요?”
굉장히 매혹적이라고 알려진 그녀였다.
다만, 성질이 있어 남성 하급신들이 쉽게 접근하지 못하고 있었다.
콜라코도 껄끄러운 게 있었지만, 그래도 선망의 대상이 방문했다는데 마다할 생각은 없었다.
‘헤, 사귀는 자가 없었나 보네. 하긴, 아무나 넘볼 상대는 아니라고 소문났지. 나한테 웬일이지? 이참에 으흐흐.’
혼자 단꿈을 잠시 꿔본 콜라코는, 경계병에게 정중히 모셔오라고 단단히 일렀다.
그 사이 신의 체면도 잊고 방을 후다닥 정리해갔다.
태월은 경계병이 예를 지키며 정중히 안내하자, 고개를 뻣뻣이 치켜들고 따라갔다.
숨어서 지켜보던 아샤의 키득거리는 소리가, 텔레파시를 통해 들어온다.
“이곳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됐어! 넌 원래 자리로 돌아가서 경계나 잘 서도록 해! 여긴 지키는 자들도 거의 없잖아.”
“넵! 알겠습니다.”
주인이 명을 내린 것도 아닌데, 태월의 말에 대꾸도 없이 있던 자리로 돌아갔다.
하급신의 격을 숨김없이 드러낸 탓이다.
태월이 동굴의 끝자락으로 다가서자, 벽 쪽의 문이 열리면서 남성형 요괴 하나가 튀어나왔다.
“하하, 어서 오십시오! 식솔을 거느리지 않다 보니, 이렇게 허술합니다.”
‘응, 그래서 널 찍어서 온 거야.’
“유유자적해 보여서 좋군요. 요즘 유람을 다니는 터라 번잡하지 않은 게 더 낫네요.”
호감 어린 답변이 돌아오자 입가에 미소 가득한 콜라코다.
태월은 콜라코의 안내로 안으로 들어갔다.
시간 여유가 있기에 태월은, 이곳저곳을 살피며 주변을 둘러보게 되었다.
‘흠, 외진 곳에 처박혀 산다더니 책이 많네. 뭐라도 연구하는 건가?’
늑대족 발타이의 보고서엔 콜라코의 인상착의와 위치만 적혀 있었다.
외부에 알려진 특기가 특별히 없었기에, 보고서에도 간단히 적혀 있을 뿐이다.
그것이 무엇인지가 궁금하여, 태월이 이렇게 바로 손을 쓰지 않고 있다.
차를 두 잔 끓여 내온 콜라코는 한 잔을 태월 앞으로 내밀었다.
“한 잔 드시면 머리가 맑아지고 속이 편안해질 겁니다.”
“그런데 뭘 연구하기에 책이 이렇게 많지? 난 뇌섹남이 좋더라고.”
“하하, 제가 한 뇌섹하지요. 한잔 드셔보시죠.”
자꾸 권하는 게 수상쩍다고 여기는 태월이다.
“난 뜨거운 걸 바로 못 마셔! 식으면 먹을 거야. 입이 데길 바라나?”
“하하, 아닙니다. 얼음을 가져다드리겠습니다.”
후다닥 주방 쪽으로 달려가는 콜라코다.
그 틈에 태월은 잔을 바꿔치기했다.
관찰 능력을 동원하여, 잔 손잡이의 위치와 방향까지 그대로 재현하는 태월이다.
살짝 손가락 끝에 찻물을 묻혀 맛을 봤지만, 녹차 맛 같은 거 외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자, 이게 시원한 얼음입니다.”
“에이, 그렇다고 차가운 걸 원하는 게 아니야. 그동안 식었잖아? 뜨겁지만 않으면 돼. 이 정도면 따뜻한 게 딱 좋아.”
졸지에 헛짓을 하게 된 콜라코지만, 억지로라도 웃음을 짓고 있었다.
‘으, 얼음에도 좀 넣었는데 아쉽지만 상관없겠지! 그 정도만 먹어도 잠에 취할 거다. 중급신 정도가 아니라면 절대 극복하지 못하지. 잠들기만 해 봐라. 쫙 빨아먹고 실컷 성 노리개로 삼아주마. 3년 전 그년도 참 쌔끈했는데 말이야.’
과거에도 오늘 같은 경우가 있었는지, 자신만만한 콜라코다.
“혼자 먹으란 건가?”
“하하! 아니요. 좋은 건 같이 들어야지요!”
의심을 살까 봐, 태월보다 앞서서 한 잔 그대로 들이켜는 콜라코다.
태월도 차분히 맛을 음미하며 천천히 다 마셨다.
콜라코의 입가에 미소가 떠나지 않았는데, 갑자기 얼굴이 굳어져 버렸다.
“이, 이게 어찌 된?”
“쯔, 하급 주제에 넘볼 걸 넘봐야지. 몰랐어?”
“으, 바꿔치기 당했군. 중급이 아니라서 성공할 줄 알았는데.”
“사실 그거 먹어도 난 멀쩡했을 거야. 나 중급이었어!”
“헉!”
콜라코의 감정 기복을 빠르게 일으켜, 약의 효능이 더 빨리 퍼지게 하려는 태월의 의도다.
“사, 살려주십시오. 몰라뵈었습니다. 뭐든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사실, 독약이 아니라 단순한 마취약입니다.”
중급이라는 소리에 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 콜라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