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화. 텅 빈 신전
귀족의 사병들로 보이는 이들이 대문을 강제로 열어젖히고 있었다.
대문 앞에는 그 집의 하인으로 보이는 남자가 쓰려져 있었고.
태월의 의문을 들어주기 위해 로빈이 앞으로 나섰다.
“지금 여기 뭐 하는 겁니까?”
로빈의 복장이 기사 복장인지라 병사들이 주춤거렸다.
그러자 그들을 지휘하던 자가 로빈에게 다가왔다.
“갈 길을 그냥 가시면 됩니다. 정당한 행사를 하는 중인지라.”
“갈 길? 그래서 묻는 것이오. 우리의 목적지가 이곳입니다만?”
“칼리타 법술가와 아는 사이입니까?”
로빈 쪽으로 걸어온 태월이 끼어들었다.
“곧 아는 사이가 될 인연이오. 문제라도 있소이까?”
“그대는 뉘신지?”
“이보게! 자네도 기사로 보이는데, 말을 하대할 신분이 아니시네! 북동쪽의 대영주 코리아 백작이시네!”
로빈이 태월을 대신하여 그에게 주의를 줬다.
코스트 자작가의 기사 토페즈도 코리아 백작의 이름은 들어보았다.
수호 동물을 둘이나 거느린 사냥대의 대장으로, 세습 백작이라는 봉작을 받은 떠오르는 신성이었다.
몽탁의 호사가들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인물이고, 그 아내들의 미모에 대해서도 왈가왈부가 많았다.
그녀들은 귀족 파티의 초대 1순위였다.
‘내가 얼굴을 모르니 알 수가 있나. 호위도 변변치 않은 백작이라니? 특급 사냥대라서 자신만만한 건가? 허, 그러고 보니 뒤에 여자들 미모가 굉장하군. 소문보다 더하네.’
그제야 아샤와 아진을 발견한 토페즈다.
‘저 정도면 소문보단 더하면 더하지, 못하지 않을 듯싶은데?’
그제야 그가 소문의 백작임을 믿을 수 있었다.
“죄송합니다. 뵌 적이 없는지라 실례했습니다. 그런데 이곳에 있는 법술가 영감과 약속이 되어있습니까?”
“아카데미 학장의 소개를 받아 온 것이긴 한데, 대체 무슨 일이오?”
“이런 말을 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알고 있는 건 이 댁의 주인인 칼리타 영감에겐 아들이 하나 있습니다. 그자가 저희 자작님께 큰 빚을 졌습니다. 그래서 빚을 받으러 온 것이죠.”
“서류가 있습니까? 그리고 그 아들 빚을 왜 아비가 집니까?”
“연대보증을 했거든요.”
태월과 토페즈가 떠드는 사이에 대문이 열렸다.
“무슨 헛소리야? 그건 내가 찍은 게 아니라니까! 나도 모르는 일이라고! 어디서 개수작질이야?”
70대 초반은 되어 보이는 학자풍의 영감이었는데, 말투는 꽤 거칠었다.
“참나, 인장이 확인되었잖습니까? 그리고 그걸 가져온 자가 댁의 아들 아닙니까? 그럼, 저희가 사기죄로 아드님을 고소할 테니, 영감님은 그를 절도죄로 신고하십시오! 그렇게 알고 진행해도 되겠습니까?”
“아, 그놈의 자식이 진짜! 으이그!”
“저희도 이러고 싶어서 이러는 게 아닙니다. 아드님 돈도 돈이지만, 그 이상의 피해를 저희 자작가가 입었습니다. 영감님 재산을 몰수라도 해야 저희도 파산을 면합니다.”
“우리보고 길에 나앉으라고? 내가 칼리타야 칼리타! 그런 돈은 바짝 일하면 2년이면 갚아!”
“두 달이나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뭐가 달라졌습니까? 저희도 시간이 없습니다.”
“지금 하는 연구가 있어서 그래. 그거 끝나면 바로 할 거야!”
“안 됩니다. 오늘 이렇게 집행 허가도 받아왔습니다. 오늘 내로 처리할 생각입니다.”
토페즈가 품에서 서류를 꺼내 칼리타에게 들이민다.
그걸 훑어보는 칼리타의 얼굴이 창백해진다.
지켜보던 태월이 앞으로 나섰다.
“대체 빚이 얼마기에 이리 소란이오?”
“4만 5천 골드입니다.”
적은 돈이 아니라 꽤 큰 돈이다.
거의 최상급 공간 가방값에 육박하며, 이곳 수도에서 웬만한 저택을 몇 채 사고도 남는 돈이다.
칼리타의 집은 그리 크지 않아서 집 자체로는 한참 부족했다.
그나마 보유자산이 그 외에도 많다는 뜻이다.
태월은 돈에 대한 여유가 꽤 되기에 대신 처리해줄 생각을 했다.
이 새로운 세상에서 생긴 돈이기에 거리낌도 없었다.
그래도 그냥 주긴 뭐해서 빚을 지울 생각이다.
“흠, 그럼 그 빚을 내가 인수하도록 하죠. 어떻습니까?”
“저희야 당연히 응하겠습니다.”
“그쪽 칼리타 씨는 어떻습니까?”
“음, 듣기론 백작님이라고 하던데, 원하는 게 따로 있습니까?”
“있을지 없을지는 나중에 알아봐야 할 거 같습니다.”
“쩝, 저야 당장 길에 나앉지 않기만 해도 감지덕지죠.”
“일단 그 자작가의 채권을 위임받는 것으로 처리하죠. 그게 급한 것 같으니까요. 거기 자작가 기사분 원본 서류를 가지고 오세요.”
말을 알아들은 토페즈는 급하게 말을 타고 자작가로 달렸다.
한 시간 정도가 지나자 그가 다시 왔는데, 후계자를 대동하고 나타났다.
“안녕하십니까? 코스트 자작가의 알란입니다.”
“반갑소, 알란! 코리아 백작이오!”
“명성을 듣고 뵙고 싶었습니다. 영광입니다.”
힐끗거리는 것이 아샤와 아진을 찾는 듯했다.
그러나 그녀들은 칼리타 저택에 들어가서 쉬는 중이었다.
토페즈는 문제가 생기기 전에 알란의 손에서 서류를 빼내 태월에게 넘겼다.
서류를 훑어본 태월은, 공간 배낭에서 법술 처리된 고액화폐를 꺼내 4만 5천 골드를 건네줬다.
“이제 완전히 인계된 거죠?”
“네, 그렇습니다. 그럼 저희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잘 가시오! 나도 이만 돌아가겠소.”
태월은 멍하니 있는 알란을 무시하고 칼리타의 저택 대문을 넘어섰다.
그리고 곧바로 대문이 닫힌다.
“백작 부인들께서 자주 곤란을 겪었겠군요. 알란도 그렇게 망나니가 아닌데 저러고 있는 걸 보면 그리 여겨집니다.”
“뭐, 처음보단 많이 나아졌습니다.”
“어쨌든 현재의 위기는 백작님 덕에 넘겼습니다. 빠르게 갚겠습니다. 감사드립니다.”
“다행히 여유가 있어서 그리했으니 편하게 생각하세요.”
“그런데 이자는 어떻게?”
“들어가서 이야기하죠? 여기 마당에서 할 이야긴 아니잖습니까?”
“아, 그건 그렇네요. 안으로 드시지요.”
태월은 이자를 받을 생각도 별로 없었기에, 1년간 셋을 가르치는 걸로 간단히 이자 계산을 끝냈다.
그에 칼리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시 한번 감사의 표시를 한다.
“그런데 아드님이 왜 그런 빚을 진 건가요?”
“지하에 묻힌 새로운 신전에 대한 지도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걸 발굴한다고 지난 1년간 대인원을 동원했습니다.”
“못 찾은 모양이네요?”
“그게 애매합니다. 동업자가 그 안에서 실종되었습니다. 결국 아들이 다 떠안게 되었죠. 아들의 말로는 동업자가 욕심을 부렸다는데, 어쨌든 그자는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그 발굴된 신전에선 별다른 재미를 보지 못했죠.”
“아드님은 어디 있습니까?”
“그 신전 근처에 동굴에 있습니다. 빚 때문에 집에 못 들어오고 있지요. 귀가 얇아서 어릴 때부터 사고뭉치더니 이번엔 제대로 사고를 친 거죠.”
“일단 빚 독촉은 멈추었으니 데리고 오셔야겠네요. 언제 가실 생각인가요?”
“내일 데려올 생각입니다. 제대로 먹지도 못했을 텐데….”
“그 신전엔 뭐가 있었길래요?”
“그건 아들도 잘 모릅니다. 그 사기꾼 동업자의 농간 아니겠습니까? 아유, 제가 술에 취해 그날 잠만 안 잤어도 인장 반지가 사용될 일은 없었을 텐데.”
“그 동업자는 신전에서 사라진 게 맞습니까?”
“확실하다고 합니다. 10m 정도 앞서 들어갔는데, 불현듯 사라졌다고 합니다. 제 후배 법술가가 주변을 조사했지만, 흔적조차 없었죠.”
태월은 그 신전이 궁금해졌다.
연기처럼 사라져 버린 그 동업자가 무언가를 알고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다.
그래서 태월도 내일 동행하기로 했다.
칼리타는 태월의 청을 거절하지는 못했다.
다음 날 태월은 일행을 데리고 다시 칼리타의 집을 방문했다.
그리고 그를 따라 신전이라는 곳으로 향했다.
태월이 풍조인 청풍을 대동하였기에 칼리타는 시간을 줄일 수 있었다.
그리고 타고 가는 내내 신기한지 청풍의 이모저모를 살피고 있다.
두 시간 정도를 비행해서 도착한 곳은 거대한 산맥의 분지였다.
“풍조를 과거에 접한 적은 있으나, 이건 더 빠르군요. 사흘은 걸릴 거리인데 이렇게 쉽게 오다니….”
“사흘씩이나 걸린다면 전 오지 않았을 겁니다. 아내들과 나들이 삼아 오려고 한 거죠.”
“뭐, 풍조가 있다면 그럴 만합니다. 이 바위 뒤쪽으로 넘어가면 무너진 계곡이 나옵니다. 그 안쪽에 숨겨져 있지요.”
“그럼, 아드님은?”
“그 자식은 근처 수풀에 가려진 동굴에 기거하고 있을 겁니다. 아유, 등신 같은 놈!”
가문을 말아 먹은 아들에 대한 원망과 안타까움이 같이 섞인 말투였다.
칼리타가 안내한 곳에서, 웅크려 자고 있던 그의 아들을 발견하였다.
태월 앞이라서 아들에게 잔소리만 몇 마디 하고는, 아들의 짐을 대신 챙기는 칼리타다.
“더 있다가 가신다고요?”
“네, 놀러 온 것이니 놀다 가야죠. 아 걱정은 마세요. 제게 공중 수호 동물이 또 있습니다. 그걸 타고 가시면 됩니다. 저 새가 루루인데, 칼리타 씨의 집을 알고 있습니다.”
태월이 하늘을 가리키자 그곳엔 청풍보다 조금 작은 거대한 새가 공중에 떠 있었다.
직접 회수해야 하는 청풍보다는 루루가 그들을 데려다주는 게 편리하다.
루루는 다시 이곳에, 홀로 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그럼 가보겠습니다. 신전에 있던 잡다한 것들은 이미 자작 쪽에서 다 가져가서 아무것도 없을 겁니다. 좋은 나들이가 되십시오.”
“하하, 그래요. 나중에 또 봅시다.”
아버지 칼리타의 말과 달리 아들은 꽤 씩씩해 보였다.
비록 아샤와 아진을 힐끗거리곤 있었지만.
그들이 루루의 등에 올라타서 떠나자, 태월은 바위 뒤쪽 계곡으로 걸음을 옮겼다.
“흠, 긴 세월 동안 이 신전은 잘도 숨어 있었네. 여기 입구를 보니 계곡이 무너지면서 이곳이 잊힌 듯해. 들어내는 데도 몇 달은 걸렸을 거 같네.”
“오빠는 숨겨진 공간이 또 있을 거라고 여기는 거네요?”
“나도 확실하진 않아. 그냥 문득 그런 생각이 든 것뿐이야. 신전에 잡다한 것만 있다는 것도 묘하잖아? 그 흔한 석상도 몇 개 없었다 하고.”
“하긴 급하게 무너진 신전이었다면, 그 안에 있던 사람들 유골이라도 남아 있어야 했는데.”
아진의 말에 태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들을 통해 발굴 후의 상황을 세세히 전해 들은 것이다.
“이제 들어가 볼까?”
“호호, 오랜만에 다시 도전하는 탐험이네?”
“아샤도 정신 차리고 내 뒤로만 따라와.”
“넵, 걱정하지 마세요.”
태월이 앞장서서 동굴로 진입했고. 그 뒤를 아샤 그리고 맨 뒤쪽에 아진이 따라왔다.
아리랑은 백묘 상태로 아진의 옆에서 뛰어다녔다.
태월이 아리랑을 타지 않은 이유는 관찰하고 조사하기엔 부적합했기 때문이다.
태월이 텅 빈 신전을 1시간가량 돌아봤지만 별다른 걸 발견하지 못했다.
‘잘못 안 건가? 단순히 버려진 신전?’
아샤와 아진 그리고 아리랑도 허탕은 마찬가지다.
“오빠? 어떤 이유로 이곳은 버려진 게 아닐까?”
미련이 남은 태월은 마지막 방법까지는 써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