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화. 축제
태월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 그의 눈에 들어온 건 에도르와 마틴 가족이었다.
마틴 가족이야 올 것을 알고 있었지만, 에도르는 생각지 못했었다.
“안녕하십니까? 코리아 백작님!”
“아니, 한창 바쁠 에도르 씨는 어떻게 여길?”
“하하, 3황자님도 뵐 겸 카이샤로 왔습니다. 마틴 가족도 데려다줄 겸 먼저 이곳부터 들른 셈이죠. 상의할 것도 있고요.”
“상의요? 어떤 문제라도 생겼나요?”
“하하, 나쁜 일은 아닙니다.”
마틴 가족과도 인사를 나눠야 하기에, 태월은 에도르와의 대화를 잠시 멈췄다.
“마틴? 오느라고 고생했어요. 그리고 에디나 부인과 쥬리아와 엘리도 수고했고요.”
“여기 너무 멀어요.”
“훗, 그래 엘리가 제일 힘들었겠다.”
“다시 뵙게 되어 다행입니다. 주인께서 안 돌아오시기에, 무슨 일이 있는지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예상치 못한 일들이 좀 있었지요. 이제는 이곳에 정착하게 되었으니, 마음 놓으셔도 되네요. 오느라 피곤했을 테니, 오늘은 푹 쉬도록 하세요. 밖으로 나가면 안내를 할 겁니다.”
“네, 그러도록 하겠습니다.”
마틴 가족이 나가자 에도르가 눈치를 보더니 말을 꺼냈다.
“의류는 초판이 매진되었습니다. 그리고 유통의 경비를 절감하고자 각국에 생산공장을 두려고 합니다.”
“오, 다행이네요. 현지 공장을 두는 건 잘한 것 같군요.”
“그리고 잡화를 추가하려고 합니다.”
“잡화요? 어떤 걸?”
“가방과 신발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혹시 이번에도 샘플을 가지고 계시는가 해서요.”
“흠, 어울릴지 모르지만, 따라와 보세요.”
태월은 에도르를 데리고 집무실로 갔다.
그곳에 있는 공간 배낭에서 한국에서 명품으로 알려진 몇 가지의 가방과 신발을 꺼냈다.
“오, 굉장히 세련되어 보입니다.”
“이걸 참고하시면 될듯합니다. 마크와 심벌은 당연히 바꿔야 하고요.”
“네, 라도르를 새겨 넣으면 되는 일이네요.”
사실 태월은 라도르의 제품에 대해 그리 큰 관심이 없다.
처음에는 돈도 필요하고 인맥도 만들 겸 시작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젠 여유가 생겨 굳이 라도르에 연연하지 않아도 되었다.
또한 지구로 돌아가게 되면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세상이기에, 이곳에 미련을 두지 않아서다.
“우리도 수도를 가야 하는데, 같이 가면 되겠네요.”
“수도에는 무슨 일로요?”
에도르가 알기엔 태월이 수도에서 온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묻는 것이다.
“그곳에서 아카데미를 다니기로 했습니다. 2년제지만 1년 내로 마칠 생각입니다.”
“아, 법술 아카데미를 말씀하시는 거군요. 결국 몽탁에서 다니시게 되었네요.”
“수도엔 언제까지 가야 합니까?”
“보름 안에 가야 해서 낼쯤 출발하려 합니다.”
“그럼, 열흘 후 가는 거로 하죠?”
“네? 5일 안에 도착하지 못할 건데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공중 펫을 타고 바로 날아갈 겁니다. 8명 정도는 탑승할 수 있고 반나절도 안 걸리거든요.”
“어? 그런 펫은 없으셨잖아요.”
“선물을 받았지요. 그럼 문제는 없는 것이죠?”
“하하, 저야 감사할 일이죠. 휴가라 여기고 푹 쉬어 보겠습니다.”
너무 바빠서 쉴 시간이 없던 에도르에게 힐링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 것이다.
명칭이 코리아로 바뀐 이 지역은 인구가 50만에 다다르는 도시급이었다.
후작이 다스렸던 지역답게 규모가 큰 변방 지역이었다.
물론 도시 하나의 인구가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영주 성이 있는 도시와 주변 마을까지 다 합친 숫자다.
이제 1년간은 카이샤의 수도인 몽탁으로 가서 생활해야 한다.
물론 방학에는 이곳으로 다시 오겠지만, 당분간 직접 다스리진 못할 상황이다.
그래서 행정관들과 군 간부들을 소집하여 회의를 자주 나누고 있었다.
그리고 사흘 후 영지 전역에 축제가 선포되었다.
세습 영주인지라 영지민에게 얼굴을 알려야 하는 게 필요하다는 행정관들의 말 때문이다.
태월은 아샤와 아진을 양쪽에 두고 지붕을 제거한 마차에 서서 행렬을 하고 있다.
“아, 진짜 창피하게 이런 것도 해야 해?”
“영주님! 꼭 필요한 일이 맞습니다. 인상을 펴십시오. 웃으셔야죠!”
“지붕은 왜 떼 내서 이렇게 한 거야?”
“친근감을 주잖습니까? 더구나 젊은 영주님인데 구식으로 할 순 없잖습니까? 인상을 펴시라니까요!”
마부석에 있는 마틴이 태월에게 눈치를 주고 있었다.
아샤와 아진은 태월과는 달리 마차에 서서 영지민에게 손을 잘도 흔들어댔다.
“와! 우리 영주님의 부인들이시라는데, 대륙 제일 미인급이야.”
“전에 포스크 제국의 2황녀가 대륙 3대 미인이라고 했잖아? 그런데 3년 전 몽탁에 상행을 나갔다가, 그분이 사신 행렬을 따라온 걸 본 적 있었어.”
“오, 그랬다고 했지. 대단한 미인이라며?”
“그런데 지금 보니 우리 영주님의 아내들이 몇 배는 더 미모가 뛰어나셔.”
“진짜 눈이 부실 정도긴 해.”
“그런데 옷이 참 특이하다. 수도에서 유행하는 건가?”
길을 따라 양쪽으로 줄 지어선 영지민들은 영주인 태월보다 부인들을 칭송하기 바빴다.
태월이 손을 들어 흔들어 줄 땐, 그냥 조용히 고개만 숙이던 자들이다.
그러나 아샤와 아진이 손을 흔들면 그들은 두 팔을 번쩍 들고 환호성까지 질렀다.
“그냥 아리랑을 타고 다닐 걸 그랬어.”
“임신 중이라잖아요!”
“표도 안 나는데 무슨 임신 타령이야?”
어제 임신 사실을 밝힌 아리랑이었다.
정상적이라면 이렇게 빨리 알 수 있는 일이 아님에도, 아리랑이 특별해서인지 그걸 느꼈다고 한다.
‘그놈이 꾀를 부리는 거 같은데. 편하게 늘어져서 잠만 자고, 먹는 건 왜 그리 먹어대는 거야. 원래 식탐이 늘긴 했지만.’
다들 아리랑을 축하하지만, 태월만은 의심의 눈초리로 아리랑을 대하고 있었다.
마차 행진이 끝나고 도시는 본격적인 축제가 시작되었다.
영주관에서도 지역 유지들과 귀족들을 위한 파티 행사가 진행 중이다.
또한 이웃에 자리 잡은 영주들도 파티에 초대되어 시끌벅적했다.
영지민들과 다를 바 없이 다들 아샤와 아진에게 관심이 컸다.
‘이것들이 진짜, 유부녀에게 왜 이리 관심이 많은 거야?’
춤을 신청하는 귀족들이 너무 많은 것이다.
아샤와 아진은 이곳의 춤을 이틀 만에 쉽게 배웠다.
그래서 지금 눈에 불이 난 태월의 앞에서 아진은 왈츠 같은 걸 추고 있다.
유부녀라고 해서 춤 신청을 거부하는 건, 이곳 세상의 예절 격식에 맞지 않았다.
그걸 거부하려면 태월이 아내들과 춤을 춰야 하는데, 아내가 둘인지라 하나는 늘 남는다.
‘에이 씨, 셋이 추는 춤은 없나?’
쓸데없는 생각까지 하게 되는 태월이다.
파티는 이틀간 계속되었고 태월의 불만은 늘어가기만 했다.
그리고 요괴 지역을 다녀온 루루가 돌아왔다.
“발타이에게 이야긴 전했지?”
“네, 3급신이나 2급신이 나타나면 바로 연락을 준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상부로 떠났던 부족장 둘이 돌아왔는데, 도마뱀 부족장은 요새에 들어설 때 잡았다고 합니다.”
“늑대 족 부족장은?”
“치유 중이던 3급신이 사라지고 연못이 변해버린 걸 알게 되었지요. 능력이 강해진 발타이를 의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도마뱀 족들이 전부 처단된 것도 이상하게 여기고 있고요.”
“그래서 어떻게 처리할 거래?”
“다음 달에 결투가 있을 거라 합니다. 요괴 간에는 흔히 있는 방식인데, 이긴 자가 모든 걸 차지합니다.”
“흠, 부족장 정도야 발타이가 눌러 버리겠지.”
연회장에서 잠시 나와 루루와 대화를 나누던 중에 아진에게서 텔레파시가 왔다.
태월은 곧바로 연회장으로 들어섰으며 그곳에선 젊은 귀족 둘이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쟤들 뭐야?”
보고를 하러 다가온 기사 로빈에게 태월이 던지는 말이다.
“부인께 경쟁적으로 춤 신청하다가 결투 신청까지 돼버렸습니다.”
“그런데 아진은 다른 이야길 하던데?”
“아, 그놈은 방금 뻗었습니다.”
태월이 연회장으로 돌아온 건 결투 때문이 아니라, 춤추던 귀족 하나가 아진의 몸을 노골적으로 만졌기 때문이다.
아진에게 들은 말은 누가 치근덕거린다는 간단한 메시지였다.
“뻗어? 아니 왜?”
“큰 부인께서 뺨을 때렸는데, 한 방에 기절했습니다.”
“연회장이 개판이네.”
“변방 쪽이라 좀 거친 자들이 있더라고요.”
모인 사람들을 뚫고 들어가 보니, 로빈의 말대로 귀족 하나가 연회장 바닥에 엎어져 있었다.
성질 난 백작 부인 때문에, 그 귀족의 수행 기사도 함부로 나서지 못하는 상태다.
“무슨 일이야?”
“후리스 백작의 큰아들이라는 자인데, 제 엉덩이를 쓰다듬더라고요. 그래서 손 한 번 댔죠.”
주변 영지 중에 후리스 백작이 다스리는 곳이 있었다.
코리아 영지와는 말을 달려서 이틀 거리에 있는 인구 20만의 영지였다.
태월이 이곳에 부임하지 않았을 땐, 주변 영지의 리더 격을 맡은 자가 후리스 백작이었다.
당사자인 후리스 백작은 연회 참가를 하지 않았고, 그 후계자가 되는 아들이 이곳에 대신 온 것이다.
그러다 미태가 뛰어난 아진을 보고 첫눈에 반해, 과한 애정 표시를 하게 되었다.
아샤와 아진이 이곳 여자들처럼 풍성하게 입는 게 아니라, 몸에 달라붙는 드레스를 노골적으로 입은 탓도 있다.
더구나 습관 때문인지 이곳에 와서도 속옷을 입지 않는 둘이다.
“거기! 이자의 수행원인가?”
“네, 그렇습니다! 백작님.”
“데리고 나가!”
“네, 감사합니다.”
기절해서 아직도 깨어나지 못한 그를, 다른 기사의 도움을 받아 둘이서 옮겼다.
태월도 굳이 이런 걸로 시비를 걸어 기존의 귀족들과 복잡하게 얽히고 싶지 않았다.
“더 혼내지 않아도 되겠지?”
“네, 이 정도면 됐어요.”
“아샤 쪽도 진상이 둘이나 있는데, 결투 준비를 하더라고.”
“첫날은 조용하더니 둘째 날 이러네요.”
“간 보느라고 조용했나 보네.”
아진을 데리고 아샤 쪽으로 이동했는데, 결투는 이상하게 진행되고 있다.
“뭐야? 졸렬하게 대리전을 신청하네?”
“싸워서 누군가 죽게 되면 영지 전까지 벌어질 수 있거든요. 그래서 저렇게….”
“나가서 싸우라고 해. 어디서 연회장을 더럽히려 해. 치우기 귀찮아.”
태월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기사들이 머뭇거렸고, 그에 속한 두 귀족은 입맛을 다셨다.
결국 주인이 허락하지 않은 연회장 결투인지라 마당으로 이동하는 그들이다.
태월은 누가 이기든 관심도 없기에 아샤와 아진을 데리고 마당을 지나 영주관으로 가려 했다.
“저놈은 왜 또 이리로 오냐?”
태월 일행에게 다가오는 자는, 수행 기사에게 끌려나갔던 기절한 백작의 아들이었다.
“결투를 신청합니다!”
“뭐?”
태월에게 장갑을 던지며 인상을 쓰고 있었다.
연회장에서 개망신을 당했기에 두고두고 구설에 오를 상황이다.
그걸 만회하기 위해 태월에게 저러는 것이다.
그 순간 아진이 나섰다.
“이봐요! 무례하게 무슨 짓이에요? 당사자는 난데 왜 백작님에게 결투를 청해요? 나한테 덤벼요!”
“헉, 레이디에게 무슨?”
“야! 만질 때는 언제고, 덤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