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화. 수상한 장소
공문서엔 임명장이 있을 뿐이고 자세한 사항은 적혀있지 않았다.
그리고 제1황자와 제3황자가 좋은 사이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둘이 동시에 인수인계에 적극 협조하라는 편지를 보낸 것도 특이한 일이다.
“반갑소이다. 라온 코리아 백작입니다.”
“아, 처음 뵙겠습니다. 폴포리 슈틴 자작입니다. 이곳에 자리 잡으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하하, 이곳에 온다고 하니 좌천이라고 떠들던 부류들도 있었는데, 축하를 받다니 어리둥절합니다.”
“수도에 있는 귀족들은 이곳의 실상을 제대로 알지 못하지요. 그냥 요괴가 많다 보니 지레짐작을 할 뿐입니다. 최근 반년간 큰 공격도 없었습니다.”
“흠, 평화로울 때가 더 위험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틀린 말은 아닙니다만, 요괴 진영 쪽에 분란이 있어 보입니다. 정확한 내용은 저희도 아직 알 수 없지만요.”
태월의 입장에선 이런 평화는 달갑지 않았다.
더구나 상대에 대한 어떤 정보도 모른다는 것이 더 불안한 일이다.
이제 영지를 맡은 입장에서 여차하면 혼자 피할 수도 없다.
영지민까지 돌봐야 하는 상황이다.
임시 영주를 맡은 폴포리 자작 입장에서는 수동적인 입장이었다.
기회가 생긴다고 해도 그는 공격하지 않았을 것이다.
“영주관으로 안내하겠습니다. 풍조가 아무리 빠르다 해도 그 공중에서의 피곤함은 이루 말할 수 없죠. 일단 쉬시고 인수인계는 내일부터 하도록 하겠습니다. 쉬고 계시면 저녁 식사 때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럼 내일은 전체적 브리핑도 부탁합니다.”
“네, 그럼 이쪽으로 가시죠.”
폴포리 자작의 말대로 태월 일행이 피곤한 건 사실이다.
더구나 행정관과 하녀는 멀미까지 겹쳐 몸이 녹초다.
폴포리 자작의 안내로 영주관에 들어서자, 직전에 연락을 받았는지 치우느라 분주했다.
“행정관들과 티타리는 오늘 아무것도 하지 말고 그냥 쉬도록 해. 자네도 따라가도록 해. 저기 안내인을 따라가면 될 거야.”
그들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태월은 아샤와 아진을 데리고 귀빈실로 들어갔다.
손님 방이긴 하지만, 아직 폴포리의 짐이 치워지지 않은 상태기에 영주 관사로는 들어갈 수 없었다.
“너희부터 씻어. 이곳 물 사정은 어떨지 모르겠네.”
“물 하니, 아쿠 언니 생각이 나네. 잘들 있으려나. 다들 보고 싶은데.”
“청승 떨 생각 말고 어서 씻기나 해. 그런 말은 당분간 하지 말자.”
생각보다 물이 여유가 있는 지역인지, 태월까지 씻었을 때도 문제는 없었다.
누워서 쉬고 있을 때 하녀를 통해 식사 준비가 끝났다는 전갈이 왔다.
태월이 아샤와 아진을 데리고 나왔을 땐 식사 테이블에 다른 이들도 착석 중이었다.
태월이 도착하자 다들 일어서서 예를 갖춘다.
“식사가 푸짐하군요. 이곳은 식량 사정이 좋은가 봅니다?”
“반년간의 평화가 도움이 되었습니다.”
폴포리 자작은 말에 고개를 끄덕여보는 태월이다.
“긍정적인 면이 있다니 다행이네요. 자 다들 듭시다.”
음식의 맛은 생각보단 좋았다.
“요리사의 실력이 좋군요.”
“3대째 이곳 영주관에서 주방장으로 있습니다. 음식 솜씨가 남다른 편이죠. 그 덕에 저도 입이 호강했습니다.”
폴포리 자작은 하녀를 시켜 주방장을 불러들였다.
“영주님! 처음 뵙겠습니다. 영주관의 주방을 맡은 루타르입니다.”
40대 후반은 되어 보이는 후덕한 체격의 남성이었다.
“오, 음식 맛이 아주 좋았소. 앞으로 잘 지내봅시다.”
“감사합니다. 영주님.”
그 뒤로 두 명의 보조 요리사가 이어서 하는 인사를 태월은 받게 되었다.
식사를 마친 태월 일행은 숙소로 돌아갔고 그날은 아침까지 편안한 밤을 보냈다.
다음 날 폴포리 자작의 전체적인 보고를 받았다.
그리고 안내를 받으며 다스릴 지역을 시찰하는 태월이다.
곳곳에서 신임 영주에 대한 이야기가 퍼져나갔고, 동행한 두 아내에 대한 칭송도 잇따랐다.
삼 일간의 시찰이 끝나자, 인수인계까지 마친 폴포리 자작은 수도를 향해 떠났다.
그에겐 이곳보다 수도가 더 좋았는지, 며칠간 웃음이 그득했다.
더구나 가족들이 수도에 있어 더 그랬을 것이다.
수도에서 출발했던 후발대가 영주관에 도착했고, 그때부터 태월은 업무를 행정관들에게 맡기고는 접경지로 이동했다.
“루루는 몸집을 최소화해서 순찰을 해봐. 경계를 도는 소수의 요괴 외에는 눈에 보이는 게 없네. 진짜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
“네, 다녀올게요!”
이곳 부대장은 영주인 태월이 아내들을 데리고 요괴 사냥을 떠난다기에 펄쩍 뛰었다.
그러다 두 마리의 수호 동물을 거느린 사냥대라는 걸 알고는 뒤로 물러섰다.
정예병이라도 데려가라는 권유까지도 물리치고 태월의 사냥대만 이곳에 있는 것이다.
1시간 정도 후에 루루가 돌아왔다.
“돌아봤는데, 수상한 곳을 발견하긴 했어요.”
“수상한 곳?”
“두 부류의 요괴들이 따로 서서 건물을 지키고 있었는데, 서로 냉랭해요. 건물 안에서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고요.”
“들어갈 틈이 있어?”
“두 부류가 서로를 경원시해서인지 겹치지 않은 부분이 있어요. 충돌을 원치 않아 생긴 사각지대라고 할까? 커다란 나무가 있는 곳이에요.”
빈틈이 있다는 소리는 태월에게 반가운 사항이다.
태월은 밤이 되길 기다려 루루의 등에 아샤와 아진을 태우고 날아올랐다.
백묘가 아샤의 품에 안겨 있었고.
루루는 아직 장거리 이동 때 성인 두 명 정도만 태울 수 있지만, 이렇게 멀지 않은 거리는 충분히 감당하는 상태다.
풍조인 청풍을 타도 되지만, 은밀함에는 루루가 더 제격이었다.
-샤샤삭!
하늘에서 높이 떠 날던 루루가 30m 정도는 됨직한 나무의 상층 부위에 다다랐다.
태월 일행은 곧바로 뛰어내려 튼실해 보이는 나뭇가지에 착지했다.
루루도 몸을 작게 만든 후 나뭇가지에 자리를 잡았다.
루루는 안으로 진입하지 않고 이곳에서 경계를 맡아야 한다.
“루루, 수고해라.”
잠입술을 배운 일행은 빠르게 나무 아래로 내려와, 그림자를 적절히 이용하여 그 속에 스며들었다.
‘저놈이 늑대 족 경비 대장인가 보네?’
루루의 말대로 두 진영이 있었는데, 늑대 족과 도마뱀 족이다.
기어 다니는 도마뱀이 아니라 도마뱀 머리를 한 이족 보행 요괴다.
태월은 변신 가면과 스카프를 이용하여 늑대 족 병사로 변했다.
그림자 속에서 나와 주변을 어슬렁거리자, 그가 다가왔다.
그리고 뭐라고 떠드는데 태월은 당연히 알아듣는다.
요괴들을 잡을 때 늑대 족도 있었고, 그들의 언어도 재능으로 습득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알아낸 정보가 요괴들 간에는 언어소통 방식이 단일했다.
의념을 전달하는 방식이었다.
“여긴 중립지역이라 있으면 안 된다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 왜 여기 있는 거야? 그런데 얼굴이 낯선데? 어디 소속이지?”
“그보다 저기 이상한 게 있어서요.”
“어디에?”
중립지대를 빨리 빠져나오는 게 급선무다.
질문에 대해 대답을 하지 않았음에도, 병사가 안내하는 대로 빠르게 따라가는 늑대 족 경비대장이다.
-퍽! 큭!
나무 아래 구석으로 따라가던 경비대장은, 본체로 변한 아리랑의 앞발에 뒤통수를 맞아 소리도 제대로 못 지르고 기절했다.
태월은 그를 아샤가 대신 들고 있던 배낭 속에 넣어버렸다.
십여 분 후에 태월은 출고를 시켰고, 늑대 족 경비대장은 사체가 되어 나왔다.
그를 문신이 삼키게 한 후 조금 기다렸다.
-우웩! 툭!
사체와 같이 나온 영혼 구슬을 입에 물렸다.
시간이 걸리지만 이렇게 안전하게 진행하는 중이다.
최대한 발각되지 않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에게 영혼이 바뀌었다는 구라를 또 열심히 쳐야 했다.
“그 몸의 이름과 소속은?”
“발타이입니다. 이곳 주요 건물의 경계를 맡고 있습니다.”
“주요 건물? 그런데 이 건물만 집중해 있던데?”
“3급 신 두 분께서 요양에 들어갔습니다.”
“3급 신? 그게 무슨 분류지? 요양이라니?”
발타이가 그에 대해 설명을 했는데, 인간이 말하는 명칭과 다를 뿐이었다.
3급 신은 하급 신이었고, 인간의 분류로 보면 특급요괴를 뜻했다.
하급 신들이 상급에 도전하는 도전의 장이 있는데, 그곳에서 다쳤다는 것이다.
목숨을 잃기도 하는 곳이고, 승리 시 상위의 신이 가진 영력을 흡수하며 격을 높인다고 했다.
승리한 상위 신이 굳이 하급 신의 영력을 취하는 경우는 적다고 했다.
영력이 높아질 순 있으나, 그에 따른 인과율도 견뎌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몸의 회복을 위해 휴식기에 들어갔습니다.”
“휴식기면 어떤 식인데? 저번에 보니 3급 신 하나가 관 안에서 수면 취하던데?”
“네, 맞습니다만 좀 다릅니다. 그래서 두 종족이 대치하면서 경계하는 것입니다.”
“어? 그게 이상하긴 했는데 특별한 이유가?”
“마스터, 저쪽으로 가시죠? 여긴 오래 있을 수가 없어서요.”
다른 일행은 나무 그늘에 은신하게 두고선, 발타이를 따라 중립지를 벗어났다.
“이 건물 안으로 지하 동굴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곳엔 연못이 하나 있는데, 자연적으로 1만 년 이상 정제된 혼돈의 기운이 있습니다. 4대 원소의 기운이 함께 섞인 상태입니다.”
“그래서?”
태월의 목소리가 살짝 흔들렸다.
“원래는 상급 신의 소유 연못이었는데, 그분의 소식이 끊긴 지 백 년이 넘었습니다. 그래서 반년 전에 금제가 해제된 상태였고요.”
“반년 전까지 계속 인간종족을 공격한 건 이걸 감추기 위함이었나 보네? 혹여 인간 측에서 공격할까 봐?”
“네, 보시다시피 지금은 건너편 인간들도 평화에 만족하고 방어만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건 그거고 왜 두 패인데?”
“연못이 하나인데, 지금 관이 두 개입니다. 그래서 교대로 12시간씩 바꾸는 중입니다. 그걸 어기지 못하게 하기 위해 이렇게 서로를 감시하는 겁니다.”
“상부에서는 이곳 금제가 풀린지 모르나?”
“백 년 전의 일이라 다들 잊고 있을 겁니다. 알았다면 2급 신들이 몰려왔을 겁니다. 그만큼 대단한 장소죠. 원래는 저희도 상부에 보고하려 했는데, 이곳의 지배자인 두 분이 자신들의 치유와 성장을 위해 고민 끝에 결정한 것입니다. 이곳에서 흡수하는 능력이면 2급 신에 육박하게 되거든요.”
“오, 그놈들을 삭 잡아먹어야겠군. 더불어 연못의 그 기운도 흡수해버리고.”
“마스터께서 인간의 몸으론 불가능할 텐데요? 하급 신 하나도 감당하지 못할 겁니다.”
“풉, 나에겐 원래 2급 신이 있었어. 그걸 공간 이동 중에 날려버린 거지. 이미 틀까지 만들어봤었으니, 다시 채우는 건 가능해.”
“아, 그럼 최상이군요. 생각대로 잘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두 마리의 하급 신에 중급 신 둘을 만들 능력이 있는 연못이라면, 어쩌면 지구로 돌아갈 기회가 빨리 올 수 있는 것이다.
흡수율에 따라 다르겠지만 가능성이 열려있다.
그래서 태월은 침을 꿀떡 삼키고 있다.
“그 성패는 너의 역할에 달려있어!”
“마스터! 원하는 대로 명하십시오!”
“너보다 이곳에서 상위 서열은?”
“같은 부족 내에선 2위입니다. 대장은 지금 상부로 출타 중입니다. 이곳의 상황을 위장하기 위해서죠.”
“하하, 진짜 잘되었군! 인원들을 집결시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