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화. 도시 입성
개척마을에선 신분증 요구가 없었기에, 이 세상에선 큰 쓰임이 없는 줄 알았다.
그리고는 그에 대해 알아볼 생각도 하지 않았던 태월이다.
이럴 때 또 쇼해야 하는 태월이다.
“아, 그게 사실 요괴들과 전투를 번번이 치르다 보니 분실했습니다.”
“요괴 사냥꾼 증명패가 없다는 말이군요?”
전문직인 경우 그 자격을 입증하는 것이 신분패 역할을 한다.
일종의 소설 속 용병과 유사한 것이다.
에도르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희 상단 일행으로 들어가서야 합니다. 제가 성문 책임자랑은 좀 안면이 있으니, 집요하게 파고들진 않을 겁니다. 음, 그런데 두 분 레이디는 약간의 변장이 필요하겠군요.”
에도르가 보기에 마차 안에 타고 있는 두 여자는 너무 눈에 띈다.
더구나 어디서 구했는지, 이 세상에서 보기 드문 디자인의 옷을 입고 있었다.
‘그것참, 제국 수도에 가도 저런 옷감과 디자인은 없을 텐데. 나중에 디자인에 관해서라도 이야길 해봐야겠네. 이참에 가문의 영향에서 벗어나야겠어. 패션의 혁명이라 으흐흐.’
태월은 마차 안으로 들어가 둘과 의논을 했다. 그 결과 아진은 변신 가면과 변신 스카프를 사용하게 되었다.
생각보다 태월이 빨리 마차에서 나오자, 고개를 갸우뚱한 에도르는 열린 마차 안을 들여다봤다.
“어? 이렇게 빨리요?”
아진의 얼굴은 완전히 달라졌고, 옷은 이곳 귀족가의 하녀 복장으로 바뀌어 있다.
아샤는 개척마을의 장터에서 산, 에도르가 내놓은 최신 유행의 숙녀복을 입고 있다.
워낙 미태가 뛰어나서, 그나마 페도라를 써서 얼굴을 조금 가린 상태다.
“어색한 부분이 있으면 지적해주시기 바랍니다. 저희가 아직은 세상 물정에 익숙하지 못해서요.”
“뭐, 귀족 레이디와 하녀 콘셉트니 특별히 흠잡을 건 그리 없습니다. 다만 이곳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레이디가 아니긴 하죠. 언제나 예외는 있는 법이니 문제 되지는 않을 겁니다.”
“그럼 저도 복장을 바꿔야겠군요.”
“직원용 여벌 옷이 있으니 제가 드리도록 하죠. 아, 그리고 혹시 레이디가 입었던 옷의 디자인은 누가 한 겁니까?”
“집안 전속 디자이너가 있었는데, 돌아가셨습니다. 그때 만든 옷들이지요. 왜요?”
“그 디자인의 권한이 가문에 있겠군요? 후계자라 하셨으니 문제는 없겠네요?”
“그, 그렇지요.”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저와 합작은 어떻습니까? 잡화와 의류에 한해서요. 디자인이 너무 세련되어서요. 원단은 그리 쉽게 만들 수는 없지만, 디자인은 또 다르잖습니까?”
이곳 세상에 녹아들려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 보는 태월이다.
아는 사람이 없는 이 세상에서 기반을 만들어 두는 것도 필요했다.
“아내들과 의논은 해야겠지만, 거절할 것 같진 않네요.”
“그럼 성문 통과 후에 자세한 이야길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하하, 상행 결과보다 지금 이 결과가 저에겐 수십 배는 더 이득을 줄 것 같습니다. 기분이 아주 좋네요.”
태월도 에도르가 꺼내 준 상인 복장으로 갈아입고는 성문 대기열에 섞이게 되었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개척마을로 떠났던 상인 일행의 차례가 되었다.
“하하, 안녕하십니까? 오늘도 수고하시네요.”
“오, 에도르! 이번 상행엔 재미가 좋았나 봐? 얼굴이 밝은데?”
“너무 티가 나는가 봅니다? 나중에 한잔 거하게 대접하겠습니다. 그리고 이건….”
작은 주머니 하나를 사람들 몰래 슬쩍 건네는 에도르다.
다른 상인들의 몫도 포함되어 있었다.
병사들과 간단히 한잔 걸칠 수 있는 일종의 인사용 뇌물이다.
“그런데 자네가 마차를 안 타고 다른 분이 타고 있었나 보네?”
“레이디가 타시고 있긴 합니다. 이 도시에 오시려 하기에 제가 모셨지요.”
“그럼 신분은?”
“신분은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요즘 인간 종족끼리 전쟁도 없지 않습니까? 괜히 신분을 드러내는 것도 책임자님에게 부담만 줄 겁니다.”
에도르의 말은 틀린 게 아니었으나, 그에게는 나름대로 해야 할 일이 있는 것이다.
“그래도 관례상 간단한 확인은 해야 하네. 자네는 다 알면서 이러는가?”
“그럼 잠시 얼굴만 확인하면 되시겠지요?”
“허엄, 그렇지. 보는 눈도 많은데 그 정도는 해야 하지 않겠나?”
마차의 문을 살짝 열어 에도르가 안에 기별을 넣는다.
“레이디! 절차상 얼굴은 잠시 보이셔야 할 겁니다. 양해 바랍니다.”
“괜찮아요. 절차가 그렇다는데 그 정도의 수고는 해야지요.”
아샤와 아진이 열린 마차 문 쪽으로 몸을 가까이하고는 부채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아, 안녕하십니까? 이곳 동문을 책임지고 있는 바이샥입니다. 저희 도시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
의례적으로 인사를 건네고 고개를 들던 바이샥은, 그제야 부채 사이로 아샤의 얼굴을 보게 되었다.
‘헉! 뭐가 저리 이쁘지? 분위기론 엘프는 아닌 것 같은데? 제국에서 온 공녀님일까?’
화장으로 살짝 미모를 감춘 아샤지만, 그것만으로 전부 가릴 순 없었다.
“네, 환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들어가도 되나요? 온종일 마차에 있었더니 너무 피곤하네요.”
“그, 그럼요! 어서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이봐! 이 마차부터 통과시키도록 해! 귀한 분이시다.”
뭐가 귀한지 모르는 병사들이, 서둘러 마차가 지날 수 있도록 길을 터주었다.
바이샥에게는 이쁘면 무조건 귀한 분이다.
병사들이 레이디에 신경 쓰느라, 태월은 상인 일행에 섞여 어떤 제재도 없이 무사히 성문을 통과하게 되었다.
이곳 세상은 인간 종족 내에서도 민족들이 다양한지, 태월이나 아진을 이상하게 보진 않았다.
지구에서의 동양인보다 더 짙은 피부를 가진 자들도 많은 세상이었다.
상인 행렬은 성내로 들어와서는 각자의 상점으로 흩어졌다.
“저기 라온님? 누추하겠지만. 저희의 단골 여관에서 쉬시는 게 어떻습니까?”
자경대의 대원 하나가 태월에게 와서 권하고 있었다.
그러나 에도르가 먼저 나서서 정리를 해주었다.
“여기 계신 분들에게 내가 대접할 일이 생겼네. 내가 대접할 테니, 걱정하지 말고 푹 쉬도록 하게나. 그리고 이걸로 대원들과 대포라도 한잔하게.”
자경대원은 태월을 돌아보며 눈치를 본다.
태월이 에도르의 말이 사실이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자, 조그만 돈주머니를 얼른 받아든다.
“그럼, 내일 혹여 저희와 함께 마을로 가시려면, 에도르님을 통해 미리 연락을 주십시오.”
“네, 그러겠습니다. 다들 오늘 수고들 하셨습니다. 이걸로 맛난 식사라도 하세요.”
태월은 품속에서 1실버를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그 정도면 과하지 않은, 적당한 금액이었다.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를 건넨 자경대원은 돌아서서 자신의 일행에게 돌아갔다.
그래도 그 일행 중 몇몇은 두 여자와 헤어지는 것이 아쉬운지 뒤를 종종 돌아봤다.
“이제 가시지요?”
“뭐, 그럽시다. 가는 곳이 먼가요?”
“아닙니다. 10분 정도만 가면 제가 운영하는 상점이 있고, 그 뒤쪽에 작은 별관도 있습니다. 오늘 그곳에서 묵으시는 게 좋을 겁니다. 이 도시가 안전하긴 해도, 도둑이나 헛짓을 하는 인간은 어디든 존재하거든요.”
태월도 낯선 이곳에서 귀찮아지는 것은 질색이라 그의 권유에 응하기로 했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아, 그리고 신분패를 새로 만드셔야 할 건데요? 무슨 일이 생기면 난처한 일을 당하게 됩니다.”
“국적과 관계없이 통용되는 사냥꾼으로 증명패를 만들었으면 합니다.”
“실력만 입증되면 문제가 되진 않지요. 그럼 내일 아침에 등록청으로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일단 라온님도 마차에 타시도록 하죠. 변장은 이제 끝이 났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태월은 마차를 탔고, 10여 분 정도를 도심 대로를 통과하게 되었다.
마차는 오래되어 보이는 상점가의 끝부분, 어느 상점 앞에서 멈추었다.
2층으로 된 상점이었는데, 층당 50평 정도는 되어 보였다.
그 상점 뒤로는 이층주택도 한 채 있었고, 창고로 보이는 건물도 있었다.
에도르는 주택으로 태월 일행을 안내한 후, 집사를 불러 차를 내오게 했다.
“일단 2층에서 묵으시면 됩니다. 제가 잠시 업무를 마저 보고 와야 하니, 차를 드시면서 기다리시면 됩니다. 제가 온 후에 같이 늦은 저녁을 함께하도록 하죠. 2층으로 집사가 안내할 것이니 씻으시면 됩니다.”
“여유를 가지고 다녀오도록 하세요.”
태월 일행은 간단히 차를 한 잔씩 마신 후, 집사를 따라 2층으로 올라갔다.
귀빈용의 방이었는지, 셋이 쓰기에도 넉넉했고 시설도 꽤 좋았다.
개척마을에서는 고작 물통에서 바가지로 물을 떠서 씻어야 했지만, 여긴 욕조가 있었고 그런대로 셋이 들어갈 수 있었다.
함께 씻는 경우가 드물었지만, 지구처럼 하기엔 이곳의 샤워 시설은 부족함이 컸다.
그리고 지구에선 여자 둘에 남자 하나가 같은 방에 혼숙하지도 못한다.
“아샤, 그만 움직여! 물이 넘치잖아.”
“호호, 오랜만에 이렇게 물속에 있어서 기분이 좋아서 그래요. 언니도 그렇지?”
“응, 나도 좋아.”
셋이서 가벼운 장난을 치면서 목욕 시간을 보냈고, 수건으로 몸을 닦는 사이에 하녀가 기별을 보냈다.
태월은 공간 배낭에서 편한 트레이닝복을 꺼내 둘에게도 건넸다.
셋이 입은 건 지구에서 명품으로 취급되는 브랜드였다.
“이 옷도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입어보네. 진작 꺼내달라고 할 걸 그랬어.”
“개척마을에선 너무 눈에 띄잖아. 이곳은 상관없을 듯해.”
“아, 너무 개운해.”
태월 일행이 아래층으로 내려오자, 집사가 식사 테이블로 안내를 했다.
그곳엔 업무를 마감하러 갔던 에도르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테이블엔 식사 준비가 다 끝났는지, 처음 보는 음식들도 눈에 띄었고 풍성했다.
“개척마을에 계셨다기에 다양하게 준비해봤습니다. 입에 맞으면 좋겠습니다.”
“하하,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른데요? 감사히 먹도록 하겠습니다.”
아샤와 아진도 살짝 고개를 숙여 감사의 인사를 보낸 후, 태월의 양쪽에 앉아서 식사를 시작했다.
에도르는 요리를 설명해주면서도, 태월 일행이 입은 트레이닝복에 눈을 떼지 못했다.
패션이 발달한 지구에서도 알아주는 명품인데, 이곳에서는 오죽하겠는가.
이곳에서 음식은 육류를 최고로 치는 것 같았는데, 채소류는 그리 많지 않았다.
잡내를 죽이기 위해 쓰는 허브 종류와 국물을 낼 때 쓰는 용도가 주종이었다.
그만큼 육류가 귀한 식량이란 소리였다.
식사가 끝이 나자, 집사는 차와 과일류를 내어왔다.
“라온님? 그 옷은 어떤 용도입니까?”
식사할 때부터 유별나게 관심을 보이고 있었기에 태월은 예상을 하고 있었다.
“이 옷은 운동을 할 때 입는 용도입니다. 그러나 외출이나 실내에서도 활용이 됩니다. 잠을 잘 때 입고 자기도 하고요.”
기능성 트레이닝복이지만 그 재질의 원단을 만들 수 없는 이곳 세상이다.
태월도 이곳의 섬유에 대한 인식이 어느 정도인지 모르기에, 자세한 설명을 하긴 애매했다.
그래서 말보단 직접 느껴보라고 2층으로 올라가, 배낭에서 두 벌의 트레이닝복을 꺼내왔다.
에도르에게 그걸 내밀자, 자신도 태월을 따라 입어보고는 눈이 커졌다.
“헉! 잠, 잠시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