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화. 바쿠12 마을
팔찌의 반응을 한참 더 기다려보는 태월이다.
에너지가 모자라서인지 팔찌는 다시 문신으로 변해버렸다.
“벌써 휴식에 들어갔나 보네. 쩝, 이제 우리끼리 알아서 해결해야겠군.”
팔찌가 깨어있었다고 해도 그 마을을 아는 건 아니었다.
일단 태월은 루루를 보내 정찰을 시켰다.
“지금 배낭에서 뭘 꺼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야. 둘은 그나마 요괴 무덤 탐험 간다고 채찍을 가지고 있어 다행이네.”
“오빠는 무기도 없잖아요.”
“변신 가면과 변신 스카프가 전부야. 스카프로 방어구는 가능하겠지만. 애매하네.”
태월은 스카프로 중세시대에나 입을 법한 전투 복장을 만들었다.
한 시간 반쯤이 지나자 루루는 돌아왔고, 일행은 루루를 따라 그곳으로 향했다.
남서쪽으로 산맥이 길게 이어진 곳이었는데, 목책까지 생겨나 있었다.
“거기 누구요?”
목책 앞에 당당히 서 있는 무리를 발견한, 마을 자경대 청년이 고개를 내밀며 물어온다.
“우린 요괴 사냥꾼이요! 척 보면 모르겠소?”
요괴 사냥꾼이란 단어는 팔찌에게 들은 어설픈 정보 중 하나였다.
인간 종족과 요괴 종족이 대치 중인 이곳 세상에서, 용병처럼 떠돌며 요괴 사냥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을 말한다.
‘뭘 척 보면 안다는 거야? 손에 아무것도 없으면서, 옷은 저게 또 뭐람? 그리고 옆에 일행들은 여자들 같은데? 복장이 특이하긴 하지만, 여자들은 전투 복장도 아니잖아. 나 원 참, 척 봐도 놀러 온 것 같구먼.’
“척 봐도 철부지 여행자들 같은데? 무슨 뻥을?”
그 순간 아진의 허리에 메여 있던 채찍이 허공을 날아, 자경 대원이 쓰고 있던 모자를 날려 버렸다.
-퍽!
“헉! 이, 이게 무슨 짓이오!”
“이래도 우리가 놀러 다니는 사람들처럼 보여요?”
자경 대원과 태월 일행의 거리는 6m나 되었다.
채찍 길이가 늘어나는 것도 신기하지만, 정확히 타격할 수 있는 것만 해도 고급기술에 해당하는 것이다.
“아, 실례했습니다. 우리 한스가 경험이 적다 보니 이런 실수를 했습니다.”
제일 처음 모습을 보였던 자경 대원 옆으로, 새로운 사람이 모습을 드러내며 사과를 했다.
이런 개척 마을에서 요괴 사냥꾼의 합류는 상당한 힘이 된다.
그래서 자경 대장인 벡터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자 이렇게 나서는 것이다.
“하하, 뭐 괜찮습니다. 이제 문을 열어주시나요?”
“그럼요! 저희 바쿠12 마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저는 이곳의 자경 대장을 맡은 벡터입니다.”
마을 이름과 자신의 신분까지 밝히며 목책의 출입문을 열어주고 있는 40대의 거한인 벡터였다.
태월의 일행이 가까워지자, 횃불에 의해 두 여자의 얼굴이 선명히 드러났다.
“헛, 신녀 일행이신가요?”
“신녀요? 우린 신녀를 모릅니다만?”
태월이 벡터의 질문에 대신 나서서 답을 해주었다.
“아, 저도 소문만 들어서요. 이번에 위문차 다니는 신녀께서 미의 여신급이라시길래.”
“이 둘은 내 아내들이오!”
괜히 헛물켜서 집적대는 남자들이 생기면 피곤하기에 태월이 선수를 치는 것이다.
한스란 자경 대원은 두 여자의 미모에 홀려있다가, 태월의 말에 입을 쩍 벌렸다.
‘헙! 아니, 지가 뭔데 이런 여신 두 분을 끼고 산다는 거야? 나보다 아주 조금 더 생긴 게 전부인 놈이. 천벌을 받을 놈!’
자경 대장인 벡터 몰래 태월에게 저주를 내리며 째려보는 한스다.
벡터는 마을 안으로 태월 일행을 안내했다.
마을의 인구는 2천 명 정도였고, 제대로 된 건물은 마을 회관과 대장간이 전부였다.
식당이란 곳이 있긴 했다.
그러나 식량이 풍족하지 못한 개척 마을인지라, 빵과 수프가 식당 메뉴의 전부다.
개척 마을이 생긴 지 반년 정도밖에 안 된 상태라, 집 자체도 임시천막 같은 형태였다.
“식사는 안 하셨지요? 좀 누추하지만, 식당부터 갑시다.”
배낭을 열 수 있다면 만찬을 즐길 수 있는 태월 일행이지만, 현재는 불가능했다.
“뭐 조금은 출출하긴 하네요.”
돈도 없거니와 이 식당엔 메뉴도 없다.
허기만 메워줄 정도였고, 아리랑과 루루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굳이 음식을 며칠 안 먹어도 되는 태생들이다.
힐끗거리는 식당 주인의 행동을 무시하고, 간단한 식사를 마친 태월 일행은 마을 회관으로 안내되었다.
“오늘은 여기서 주무시면 됩니다. 아까 그곳 식당에도 숙박할 곳은 있지만, 첫날부터 그런 비용까진 우리가 예의는 아니죠.”
자경 대장 벡터가 보기에 이들에겐 이렇다 할 짐이 없었다.
그렇다는 건 어떤 사연이 있어서 짐을 잃어버렸다고 여긴 것이다.
요괴들이 득실대는 세상에서 그런 경우는 흔했기 때문이다.
전투가 벌어지면 그런 것까지 일일이 살필 수 없기 때문이다.
“뭐, 근처에 요괴를 때려잡을 만한 곳이 있습니까?”
“하하, 당연히 많지요. 이 근방에는 센 놈이 드물지만, 한 시간 정도만 가면 자경대로도 벅찬 요괴들이 꽤 되거든요. 다행히 이쪽으론 자주 오지 않아서 이렇게 버티고는 있습니다.”
“흠, 잘되었네요. 보다시피 가진 게 없습니다.”
“혹시 요괴들과 싸우다 잃어버리신?”
“오, 역시나 잘 아시네요?”
“뭐, 종종 있는 일이니까요.”
벡터 입장에선 뜨내기 사냥꾼이 죽고 사는 것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다만 마을을 위해 몇 마리쯤은 해치워줬으면 하는 바람이 전부였다.
“음, 이곳 주변 상황을 잘 몰라서 뭐가 나오는지 모르겠네요. 시세는 도시와 좀 다른가요?”
태월 자신도 잘 모르기에 슬쩍 떠보려는 의도다.
“최하급 요괴는 1실버밖에 안 되고 추출할 것도 별로 없습니다. 귀 하나만 가져오면 됩니다. 그리고 하급 요괴도 귀를 자르면 되고 10실버입니다. 뿔을 가진 중급은 뿔 하나에 5골드입니다. 상급은 이 근방엔 없는데, 그건 잡으면 100골드입니다. 최상급은 1천 골드! 특급은 1만 골드로서 도시와 동일합니다.”
상급도 없다는데 더 높은 등급이 여기에 있을 순 없었다.
자신들이 중간에 폭리를 안 취한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말을 꺼낸 벡터다.
요괴를 물리쳐야 하는 입장에서 그런 꼼수를 부렸다간, 소문이 나서 사냥꾼도 마을에 오지 않을 것이다.
“혹시 요괴 도감 같은 게 있을까요? 아시다시피 짐을 잃어버려서요.”
“아, 도감 정도야 국가마다 적극적으로 보급하잖아요? 당연히 여유분이 있습니다.”
요괴 종족과 대치 중인 인간 종족으로서는 상대에 대한 정보가 아주 중요했다.
그래서 요괴 도감만큼은 인간 종족의 국가마다 우선적으로 사람들에게 보급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인쇄술이 발달하게 되었다는 설득력 있는 이야기가 돌 정도다.
책의 두께는 소설책 한 권 정도의 굵기였다.
지구에서 보는 컬러 책이 아니라, 그냥 흑백 책이었지만, 그림과 설명까지 있어서 참조용으론 쓸만했다.
그리고 친절하게도 1페이지에서 10페이지까지는 요괴 종족에 대한 역사까지 실려 있었다.
그리고 요괴들의 이름도 요괴들 본명이 아닌, 인간 편의식 이름으로 부르기 쉽게 적어놨다.
예를 들어 개미처럼 생기면 개미 요괴, 돼지처럼 생기면 돼지 요괴 식으로.
인간 종족 국가들 입장에선, 사람들이 적들인 요괴를 존중하지 않게 만들려는 것이다.
미친 가축이나 야생 동물처럼 여겨서, 화합이니 화해니 하는 단어를 쓰지 못하게 하려는 정치적 의도가 깔려 있었다.
본명이 적힌 도감도 있다고는 하는데, 그건 대도시의 대형 도서관에서나 확인할 수 있었다.
“자 오늘은 푹 쉬시고 내일 아침에 보도록 합시다.”
“네, 오늘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하하, 뭘요. 그럼 이만 가겠습니다.”
자경 대장이 돌아가자 태월은 기감으로 주변을 살펴보았다.
다행히 감시하거나 엿들으려 하는 상황은 포착되지 않았다.
“오빠? 여기는 흔히 판타지 소설에 등장하는 마법 같은 건 없는 거 같지?”
“그걸 물으면 수상히 볼 것 같아서 말은 안 했지만, 마법 물품 같은 건 없더라. 대도시에 나가면 또 어떨진 모르지만.”
“그럼 지구의 중세시대와 요괴들 정도로 인식하면 되겠다.”
“오빠? 그런데 중세시대 병사들이 요괴와 싸울 능력이 되나요?”
“아, 그리 생각하면 또 그러네? 대체 이 세상은 뭐지? 일단 이 도감 내용을 좀 살펴봐야겠다.”
다행히 작지만, 간단히 씻을 공간은 있어서 아샤와 아진이 함께 들어갔다.
커다란 물통에 바가지 하나가 전부였지만.
그동안 태월은 도감의 앞부분을 읽어나갔다.
“흠, 이 낯선 세상은 처음부터 인간과 요괴의 대립이었군. 다른 몬스터에 대한 이야기는 일절 없는 걸 보면 두 종족이 전부인가?”
물론 가축들과 야생 동물도 존재하긴 했다.
“인간 종족의 국가가 3개의 제국과 7개의 왕국 그리고 3개의 공국이고. 요괴 종족은 종족별로 대부족을 구성하고 있고. 영원한 적이 있다 보니, 국가 간의 전쟁은 잘 일어나지 않는군. 하긴 싸워봤자, 요괴들만 돕는 꼴이니.”
“오빠! 오빠도 와서 씻어!”
“에이, 물도 별로 없을 건데, 난 세수하고 발만 씻으면 돼!”
“우린 다 씻었거든?”
“엥? 물이 그렇게 많다고?”
“뭐, 물만 살짝 끼얹었지만.”
픽하고 웃어주던 태월도 그녀들의 성화에 결국 간단하나마 씻을 수 있었다.
“요괴들을 잡아야 영혼 에너지를 채울 텐데 말이야. 여기도 귀신은 있겠지?”
“당연히 있겠지!”
아샤와 대화를 나누는 순간에 아진은 열심히 도감을 읽고 있었다.
그게 끝나면 아샤가 볼 차례였다.
다행히 팔찌의 전해준 능력이 고급이어서, 인간종족 언어의 회화뿐만 아니라 독해와 작문까지 가능했다.
셋의 밤은 그렇게 흘러갔다.
“밤새 잘 잤습니까?”
“하하, 네. 덕분에 잘 쉬었습니다.”
“아침은 우리 집으로 가시죠? 사냥 가신다니 힘을 쓰려면 뭐라도 드셔야죠!”
태월은 거절을 하려다가 여러 가지 정보도 얻을 겸 응하기로 했다.
“그럼, 염치 불구하고 얻어먹겠습니다.”
“아이고, 사실 차린 건 별거 없습니다. 하여튼 저를 따라오세요.”
자경 대장의 집도 역시나 천막이었다.
허름하긴 해도 정리는 잘되어 있었다.
“어서 오세요. 사냥꾼분들은 한 달 만에 보는 것 같네요. 바깥양반 말대로 두 분 진짜 미인이시네요.”
“그들은 아직도 이 마을에 있나요?”
“네? 그, 그들은….”
“여보! 이분들 시장하실 텐데, 얼른 음식이나 차리지 않고 뭐 하는 거야?”
서둘러 자신의 아내 입을 막는 벡터다.
태월도 짐작 가는 바가 있기에 더는 묻지 않았다.
‘뻔한 거 아닌가? 요괴들 잡으러 갔다가 죽었겠지. 뭐, 중급 무리를 만났으려나?’
“혹시 남는 무기 없습니까? 몰리는 바람에 무기까지 잃어버려서요. 검이면 좋습니다만 다른 것도 괜찮습니다.”
“음, 도끼가 있긴 합니다. 검은 비싸서 저도 한 자루밖에 없지요. 아 그리고 귀나 뿔을 담아 오려면 자루도 필요할 겁니다.”
사실 벡터에게는 검이 두 자루가 있었지만, 살아 돌아오지 못할 사냥꾼에게 줄 마음은 없었다.
괜히 회수도 안 되는 그 비싼 검을 허공에 날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빵과 수프를 얻어먹은 태월은, 나무꾼이나 쓸 만한 도끼 한 자루와 자루를 허리에 묶고 마을 밖을 나섰다.
‘이제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