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화. 풍혈의 기연
태월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아루다.
“나야 태월의 도움으로 빠르게 성장한 것이지만. 그놈이 그 정도로 되려면 이삼십 년은 넘었을 거야.”
“그럼 둘이 합쳐서 잡은?”
“삼촌! 누나가 과장한 거예요. 그 정령이 누나보단 더 세요!”
“야! 세긴 뭘 더 세! 난 그냥 안전하게 가려고 물러난 거지!”
아루의 성격을 아는 태월이기에 대충 고개를 끄덕여주고는 후식 타임을 가졌다.
“우리는 이번에 악령이 된 정령을 잡으러 갈 거야. 설희와 아진 그리고 아샤는 여기서 쉬도록 해. 이번 일은 너희가 도움이 되긴 어려워.”
“알았어. 괜히 우리가 방해돼선 안 될 테니 둘을 데리고 있을게.”
태월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순응하는 설희다.
아루와 아웬 그리고 루루와 아리랑은 태월과 함께 움직였다.
루루는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컸는지, 밖을 쏘다니는 일이 많았다.
그래도 일정 영역 이상은 벗어나지 않는지라, 태월의 신호엔 늘 잡혔다.
산기슭을 따라 오른 지 30분 정도가 넘었을 때, 앞서가던 아루가 발을 멈췄다.
“쉿! 저기 구멍 보이지? 저기에 그놈이 있어.”
“구멍이 다른 데보단 크네? 누군가 유인해 와야 한 방에 끝낼 건데.”
“제가 다녀올게요. 아루 누나가 가면 경계부터 할 거예요. 저처럼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만만한 존재가 가야 쉽게 덤빌 거예요.”
“내가 갈게. 내가 더 빨라.”
아웬의 말에 이어 루루가 나섰다.
“흠, 루루가 낫겠다. 아루와 아웬은 이미 저놈에게 인식되었을 거 같아. 아웬 혼자 간다고 해도 둘이 있을 거라 예측할걸?”
태월의 말이 틀린 게 아닌지라, 아웬은 뒤로 물러섰다.
“루루의 현재 상태는 힘으론 그를 못 이겨. 그러니 약만 올리고 바로 빠져서 이쪽으로 와.”
“그럼 나랑 아웬이 들이받고 잠시 정신 못 차릴 동안 뒤에서 꿀꺽?”
“오, 제대로 아네. 그렇게 해야 빠르게 정리될 거야.”
태월도 이 오염된 정령의 힘을 대단하게 여기지 않았기에 그리 걱정되는 건 없었다.
루루가 날개를 퍼덕이며 안으로 들어갔는데, 풍혈에서 차가운 바람이 아닌 뜨거운 바람이 새어 나오게 되었다.
구멍 속에서 윙윙거리는 바람이 점점 거세질 무렵 루루가 튀어나왔다.
여기저기 깃털들이 어지러이 얽혀있는 걸 보니, 드잡이질까지 하고 온 것이다.
그 뒤 꽁무니를 잡으러 회색빛 정령 하나가 튀어나왔다.
구멍 옆으로 숨어 있던 아루가 옆에서 그대로 들이받았다.
아웬의 바람의 힘이 더해진 불 대포였다.
-키이악!
기습적인 불 공격에 놀란 오염된 정령은 급히 몸을 바로 세웠다.
아루는 그 정령이 정신을 다른 곳에 신경 못쓰도록 연속으로 들이받는다.
“이것들이? 어딜 갔나 했더니, 쥐새끼처럼 숨어 있었군.”
“오, 여기에 쥐가 드나들었나 보네? 쥐를 다 알다니. 쥐불놀이나 한번 해볼까?”
아루가 큰 원을 그리며 오염된 정령의 주위를 빠르게 돌며 타격을 가했다.
농촌에서 정월 첫 쥐날에 쥐는 쫓는 의미로 행하는 그 쥐불놀이처럼, 원을 그리며 약을 올렸다.
“캬캬! 이것도 공격이라고 하냐? 따끔거리는 게 전부네! 내가 너희를 흡수해서 몸보신이나 해야겠다.”
자신의 주변을 돌며 난리를 치는 아루를 향해 몸을 부풀리고 있었다.
“진짜 힘이란 이런 것이다! 자 받….”
-슈악! 컥!
오염된 정령은 말을 끝맺지 못하고, 뒤에서 덮쳐든 도깨비의 입에 꿀꺽 삼켜졌다.
처음부터 태월이 나섰다면, 오염된 정령은 구멍 속으로 도망쳤을 것이다.
아루와 아웬은 인간의 몸으로 다시 돌아왔다.
“호호호, 저 바보 자식! 똥폼을 잡더니 결국 갔네. 까불고 있어!”
손바닥을 털며 의기양양인 아루다.
픽 하고 웃은 태월이 아루에게 옷을 내밀자, 그제야 주섬주섬 걸쳐 입었다.
“아웬은 문신이 토해낼 때 그 정령을 흡수하도록 해.”
“네, 삼촌!”
시간이 조금 지나자 도깨비가 정령을 토해냈다.
-우웩!
정화된 맑은 기운의 정령체를 아웬이 몸으로 감쌌다.
오염된 정령이 정화되었을 때, 새로운 존재가 되다시피 하지만 합치는 게 낫다고 여긴 태월이다.
아루에게 요괴의 재능 여분이 더는 없기에 선택한 것이다.
30분 정도가 흐르자, 아웬의 정령체가 한껏 커졌고, 사람으로 변신했을 때는 스무 살은 넘어 보였다.
“우씨, 귀엽던 꼬맹이가 사라지다니, 맘에 안 들어. 나보다 오빠 같잖아?”
“에이, 누님 왜 그러세요?”
“으악, 징그러! 태월! 옷이나 얼른 꺼내줘.”
알몸으로 아양 떠는 아웬을 보고 아루가 기겁했다.
그전에 입던 옷은 너무 작아 입을 수 없기에, 태월은 자신의 옷을 배낭에서 꺼내 던져줬다.
불의 정령인 아루지만, 다른 기운의 정령도 흡수할 순 있었다.
다만, 효율이 높지 않기에 아웬이 흡수하는 게 나은 것이다.
“자, 다음 풍혈로 이동하자.”
태월 일행이 향한 곳은 1시간 거리나 걸리는 곳이었다.
그곳에 도착한 태월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기가 풍혈? 차가운 바람이 아닌데?”
“바람 나오면 풍혈 아니야? 꼭 차가워야 하나?”
단어 표현으론 틀린 말은 아니지만, 울릉도의 풍혈은 전부 차가운 걸로 알고 있던 태월이다.
“화산섬이었기에 그 잔재가 남아 있나? 이상하네. 그게 언제적인데? 여긴 조사 안 해봤어?”
“여긴 그냥 구멍만 확인한 건데?”
“제가 들어가 보려 했는데, 누나가 그 오염된 정령이 더 급하다고 돌아간 거예요.”
“얘! 너 고자질 하냐? 다 널 위해서 그 정령 잡으려 한 거잖아. 그게 더 급한 거 아니야? 아, 근데 말발이 안 서네. 너 허리 안 굽혀?”
아웬의 키가 태월 정도가 되었기에 아루가 올려다보며 삿대질하던 참이었다.
“둘 다 시끄러워. 아까 그 동혈보다 이곳이 더 위험할 수도 있어. 뜬금없이 왜 뜨거운 바람일까? 좀 이상하네.”
울릉도에서는 1만9천 년 전 첫 화산폭발이 일어났다.
1만2천 년 전에 두 번째 폭발이 일어나 나리분지의 북쪽이 평평해졌다.
9천 년 전에는 세 번째 폭발이, 5,600년 전에는 네 번째 그리고 5,000년 전 작은 폭발이 있었다.
이로 인해 알봉이 생겨났었다.
사(死)화산으로 알려졌지만, 지열이 다른 곳보다 뜨거워 폭발할 가능성이 여전히 남았다.
“어쩌면 여기가 사(死)화산이 아니라 생(生)화산일 가능성도 있다는 말이 있었어. 그만큼 젊은 화산에 속하는 곳이야.”
태월의 말에 눈을 몇 번 끔뻑거리던 아루가 정령체로 변했다.
그리고는 루루의 등에 타더니 구멍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꽤 시간이 흘렀는데 얘들은 뭘 하는 거야? 텔레파시를 보내도 응답이 없네.”
구멍이 작아 사람은 들어갈 수 없는지라, 모호한 표정을 짓는 태월이다.
“제가 들어가 볼게요.”
“무슨 일인지 너도 조심하고, 상황 파악되면 딴짓하지 말고 바로 나에게 넘어와.”
“네, 삼촌!”
아웬이 본체로 돌아가 풍혈 속으로 넘어갔다.
30여 분 후에 아웬이 나타났다.
“일단 여기가 굉장히 깊어요. 그리고 누나와 루루는 불의 정수에 들어가 있더라고요.”
“불의 정수? 그게 뭐야?”
“살아 있는 마그마가 있었어요.”
마그마는 지구 내부에 자연적으로 생성되는 것으로 암석이 용융 내지는 부분 용융된 것이다.
마그마가 구멍을 통해 가스를 분리하고 나면 남는 부분이 용암이 된다.
그래서 고압 상태의 마그마는 볼 수 없고, 화산에서 분출되는 용암을 보게 되는 것이다.
“마그마란 단어는 또 어떻게 아는 거야?”
“그 오염된 정령이 가지고 있던 지식인데요? 그놈도 여길 알았나 봐요. 그곳에 불의 정수가 있다는 걸 알고 자신이 얻으려 고심했네요. 효율이 떨어지니 다른 방법을 찾고 있었어요.”
“불의 정령에게는 어려움이 없겠군.”
“네, 그래서 둘이 그 속에 들어가 있더라고요. 불러도 대답 못 하는 걸 보니, 정신이 없을 거 같긴 했어요.”
“에구, 말이라도 하고 행할 것이지. 하여간 아루는 즉흥적이야. 네가 해줄 수 있는 것도 없었겠네?”
“네, 가서 지켜만 보는 게 전부인데요. 그래도 모르니 가드나 서 볼게요.”
태월이 고개를 끄덕이자, 아웬은 다시 풍혈 속으로 들어갔다.
아리랑과 함께 밖에서 기다리며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너도 도움이 될 건데 아깝네.”
“난 관악산에서 좀 흡수했잖아요. 괜찮아요.”
“여긴 좀 덥긴 하다. 밖에 나가 있어야겠어.”
여름이 다가온지라 시원한 게 좋은 태월이다.
캠핑 장비 중 해먹을 꺼내 나무 사이에 걸었다.
평지 지형이 아니라 텐트를 꺼내진 못했다.
“바람도 솔솔 부니 졸리네. 한숨 자자.”
그곳에 누운 태월은 고양이 몸 상태인 아리랑을 안고 잠이 들었다.
그로부터 두 시간 정도를 자고 일어난 태월은, 여전히 돌아오지 않은 상황을 보고는 다시 풍혈로 돌아왔다.
풍혈 앞에 서서 아웬에게 텔레파시를 보냈다.
‘왜 이리 오래 걸려?’
‘그러게요. 아직도 그러고 있긴 한데, 정수가 거의 줄어들었어요. 저 상태로는 한 시간 정도는 지나야 끝이 날 거 같아요. 마그마 상태라서 가스 제거가 필요해 늦는 것 같긴 해요.’
아웬의 보고에 문제가 생긴 것 같진 않아 조금 안심이 되는 태월이다.
그렇게 한 시간 반쯤이 더 지나자, 아루와 루루 그리고 아웬이 돌아왔다.
전보다 커진 불덩이 형체가 사람으로 변했다.
“오, 아루가 이제 아진만 해졌네?”
“호호호! 나도 이제 꿀릴 일이 없어졌다 이거야! 어때? 이 멋진 몸매가? 바스트! 힙!”
“옷이나 입어!”
“더 감상하고 싶어 하는 거 같은데?”
“많이 봤는데 크게 다를 게 있나?”
“흥!”
태월은 웃으며 아진의 옷을 꺼내 아루에게 전했다.
불새인 루루도 전보다 커진 상태다.
아루만큼의 변화가 있었고, 붉은색이 더 선명해져 있다.
그리고 몸집도 커져 성체 독수리만 해진 상태다.
“아루가 횡재를 했구나.”
“호호, 그런 셈이지. 저 정도 정수면 불의 정령 둘은 생길 수 있겠더라.”
“가만 보니 아진보다도 키가 조금 더 큰가?”
“글쎄, 옆에 서봐야 알겠지. 아진이 166쯤 되지?”
“167이라던데?”
“그럼, 나도 최소한 167은 된단 거네? 으흥, 조금 커지긴 했네.”
덤덤한 척하지만, 입이 귓가에 걸려있어 내려오지 않는 아루다.
혼자 미성숙 상태여서 아샤에게 놀림도 많이 받아왔던 아루였다.
그리고 조금 큰 게 아니라 7센티나 커진 것이다.
더불어 몸매도 완전하게 성숙된 상태였다.
“좀 쉬었다가 내려갈까? 피곤해 보이는데.”
“아냐! 바로 내려가자!”
자신의 변한 모습을 그녀들에게 빨리 뽐내고 싶은 아루였다.
태월보다 앞서서 신나게 걷고 있는 아루의 걸음은 조금씩 더 빨라졌다.
일행이 기다리는 곳을 왔을 때는 노을이 지고 있었다.
“호호호! 다들 오래 기다렸지?”
“어머, 아루 언니? 얼굴은 알아보겠지만, 몸은 왜 그리 달라졌어? 그리고 그 뒤에 있는?”
“저예요. 누나! 아웬!”
“와, 진짜 이게 무슨 일이래? 풍혈에 이 정도의 효과가 있었다고?”
“어? 루루도 달라졌네. 독수리보다 큰 거 아냐?”
아샤와 아진 그리고 설희가 셋의 변화를 보고 호들갑을 떨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