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화. 모터홈 캠핑카
태월과 마주한 정은희의 눈이 파랗게 빛났다.
“그놈이 부산으로 내려가는 바람에 제가 어찌할 수가 없었어요. 한동안 이곳에 있게 될 테니, 지금이 기회예요. 정신을 더 붕괴시켜 악몽 속에 살아가게 해주고 싶어요. 주오석이란 사람은 가볍게 맛만 보여준 거지만, 장덕진은 그 정도론 어림없죠. 참회하고 참회하고 참회하게 해줄 거예요.”
지박령에 가까운 형태가 된 정은희기에 부산까지 찾아갈 수도 없었다.
기껏해야 그녀는 강릉 지역 내에서만 이동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인제 와서 장덕진의 죄가 밝혀져 교도소에 들어간다 한들, 모든 걸 다 잃은 그자에겐 큰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정은희가 하려는 말의 뜻이 그것에 있었다.
“뭐, 틀린 말은 아니니, 당신의 생각대로 하세요. 감옥에 보낸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었고요. 그럼, 며칠이면 되겠어요?”
“나흘요. 그 정도면 충분해요. 평생을 밤마다 두려움에 떨며 살게 하고파요.”
태월이 악인에게까지 도덕군자 같은 타입은 아니기에 그녀의 청을 들어주었다.
정은희를 바이킹 주변에 데려다주고는 태월은 일행에게로 돌아갔다.
“오빠? 그럼 그 여자는 사흘 후에 천도재를 치른단 거네?”
“뭐, 그렇게 됐어. 그래도 죄를 밝혀내는 걸로 진행하면 더 오래 걸렸을 거야.”
태월의 말에 아샤는 고개를 끄덕이며, 식사를 준비 중이다.
“태월? 공간 배낭 안에 둔 돈들은 어떻게 할 거야?”
“글쎄, 특별히 생각해 본 건 없는데? 왜 필요한 게 있어?”
“우리 캠핑카를 사면 어때? 그럼 여행 다닐 때도 좋잖아.”
“뭐, 한국에 있을 때만 사용할 거긴 하지만, 나쁘진 않네. 일일이 숙소 신경 안 써도 되고 말이야.”
한국에선 숙박이 가능한 차량을 캠핑카라고 흔히 부르지만, 정확한 명칭은 아니다.
캠핑이 일상이 된 외국에선 캠핑카의 생김새에 따라 세세한 분류를 하고 있다.
한국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두 가지 종류는 모터홈과 카라반이다.
모터홈은 차 안에 생활공간이 있는 형태로 차량과 생활공간 분리가 불가능하다.
그리고 카라반은 자동차와 연결해 사용하는 캠핑카로, 차체와 분리할 수 있으나 생활공간이 좁다.
즉 아루가 말하는 건 모터홈인 것이다.
“호호호, 내가 심심해서 쭉 알아봤거든? 그런데 어떤 사람이 글을 남겼는데, 독일에서 가져온 캠핑카가 있대. 한 일 년 썼는데 지금은 쓰지 않고 있어서 팔려고 한다는데? 카라반이 아니고 모터홈이야. 허가까지 받았다고 하니 편하잖아.”
유럽에서도 캠핑카 문화가 가장 발달한 곳이 독일이었다.
“그리 말하는 거 보니 연락도 해봤나 보네?”
“당연하지! 가격도 물어봤는걸!”
“얼마 달래?”
“육천! 그 이하는 안 된다고 하더라. 풀옵션이라 두 배는 들었다던데.”
“그 정도면 캠핑 마니아였나 보네. 어디서 파는데? 몇 인용이고?”
“뭐 강릉까지 가져다준다던데? 하긴 한두 푼짜리가 아니니 그런 거겠지만. 테스트할 겸 가져오게 하는 것도 괜찮잖아? 6인용이야.”
자동차 정비 재능도 가지고 있던 태월인지라 문제 있는 차를 살 실수는 범하지 않을 것이다.
시동 걸린 소리만 들어도 문제 있는 부위의 유추가 가능했다.
“1억이 넘는 캠핑카였다면 꽤 쓸 만하긴 하겠네. 6인용이라면 4인이 쓰긴 넉넉하겠어. 좋아 오라고 해봐.”
이 시대에 한국에선 캠핑카가 흔하지 않았다.
더구나 아루가 말한 모터홈은 험지를 달리는 군용트럭을 개조하여 제작된 것이다.
국내의 캠핑카 제작기술이나 내구성이 부족했던 터라, 긴 역사를 가진 독일의 캠핑카를 아루가 탐낸 것이다.
사흘을 더 강릉에서 있어야 했기에 시간이 한가해진 태월 일행이다.
다음 날 그 차량이 도착했다.
“오, 굉장히 단단해 보이는데요?”
“하하, 그럼요! 유럽 여행 갔던 이유도 캠핑카 전시회에 참가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제작사의 모델을 보고 한눈에 반해버렸지요. 한국처럼 도로 기반이 약한 곳도 가능한 크기로 특별주문했거든요.”
“6인승이라니 마음에 듭니다. 이보다 더 대형이었으면 부담이 되었을 거 같네요.”
태월과 캠핑카 주인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아루는 차 안으로 들어가 이것저것을 살피고 있었다.
“태월! 내부도 거의 새 거야. 굉장히 조심스레 사용했나 봐.”
“하하, 당연한 말씀을요. 마니아는 원래 가족처럼 그걸 아끼게 되어 있잖아요. 그리고 차량 등록상 1년이 된 것일 뿐, 실제론 얼마 타지 않았습니다. 두 달 후에 이민 갈 예정이라, 급하게 처분하는 겁니다. 이 정도에 반값이면 저렴하지 않나요? 시험 운전해 보시겠습니까?”
“하하, 그리하지요.”
태월은 키를 받아서 시동을 켜고 주변을 돌아다녀 보았다.
‘흠, 기록으로 봐도 얼마 타진 않았네. 소리만 들어도, 차량 관리가 이 정도면 상급이고. 사고 난 것도 없고, 꽤 괜찮은데?’
제자리로 돌아온 태월은 그에게 키를 넘겨주었다.
“뭐, 별문제는 없는 차로 보입니다.”
“아저씨! 현금으로 살 건데 네고를 더 해주세요. 너무 비싸요.”
“에고, 아가씨 그건 안 됩니다. 그리고 저 차량 뒤쪽에 보시면 박스들이 있지요?”
아루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뭔지 모르지만 잠겨 있던데요?”
“그거 이 모터홈의 주요 부속품들입니다. 외제차량은 부속 구하기가 아주 힘들거든요. 그래서 자주 쓰이는 걸 여벌로 사놨습니다. 그거에만 1천만 원 정도가 더 들어간 겁니다. 그걸 제 서비스라고 생각하시면, 네고를 추가로 해드린 게 되지 않을까요?”
아루가 태월을 빤히 쳐다본다.
그에게 어찌할 거냐고 묻는 것이다.
“흠, 뭐 깎는 것보다 그게 더 실용적이네요. 좋습니다. 6천에 사도록 하죠.”
“하하, 감사합니다. 역시 뭔가를 아시는 분이군요.”
태월은 이 모터홈 캠핑카를 역시나 TW의 법인차량으로 등록하기로 했다.
그게 관리하기가 편해서였다.
관련 서류와 함께 키를 받고 그 즉시 현금다발이 든 가방을 건네니 조금 놀라는 눈치다.
“입금을 해드릴 수도 있지만, 미리 찾아 놓은 게 있어서요.”
“하하, 뭐 이것도 좋지요.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잘 다뤄주시기를 바랍니다.”
팔고 나서도 못내 아쉬운지,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며 가는 40대 남자의 아쉬움이 남겨졌다.
“애인을 남기고 입대하는 남자 같네.”
“에이, 태월이 그걸 어찌 알아? 군대도 면제되어 가보지도 않았으면서.”
“크, 그렇긴 하네.”
5톤 트럭 크기의 독일산 캠핑카가 한적한 곳을 벗어나 시내로 들어섰다.
그러자 행인들의 시선을 한눈에 사로잡았다.
“와, 저게 뭐야? 저런 차도 있었나?”
“저게 말로만 듣던 외제 캠핑카 같은데? 꽤 비싸겠어.”
태월이 운전 중인 캠핑카는 총 길이가 5m다.
일반적인 5톤 트럭에 비해 약간 작은 것이다.
아진과 아샤가 기다리고 있던 호텔 앞에 정차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둘이 폴짝 올라탄다.
“와아 진짜 화려하네? 일반 가정집보다 더 시설이 고급이잖아. 호텔급은 되겠어.”
아샤가 아리랑을 안고 침대 위에서 통통 튀고 있었다.
“주방 시설과 샤워 시설이 너무 좋네요.”
아진은 성격답게 꼼꼼히 여기저기를 살피고 있었다.
“체크 아웃은 하고 나온 거지?”
“응, 그렇게 했어. 프론트에서 못내 아쉬워하는 남정네의 눈빛을 감수하면서 말이지.”
“아이고 그러셨어요? 고생하셨네요. 자 이왕 탄 김에 정동진으로 가볼까?”
“오, 일출 보는 걸로 유명하다던 그곳?”
“하하, 맞아. 해가 뜨는 동쪽의 정중앙이라서 정동진이라 부른 거지.”
“그럼 오늘 정동진 가서 이 차에서 하루 보내고 오면 되겠네? 첫날밤이잖아. 그리고 일출도 보면 좋잖아.”
“하하, 알았어.”
“야호! 신나는 캠핑이다!”
“아자자!”
활달한 성격답게 아샤와 아루가 손뼉을 서로 치며 즐거워했다.
정동진에 도착하여 해변이 보이는 곳에 캠핑카를 주차시켰다.
몇몇 행인이 가까이 다가와 기웃대는 일이 많아지자 태월은 변신 가면을 사용했다.
“와, 오빠 완전 조폭 컨셉이네?”
“어때? 힘 좀 쓰게 생겼냐?”
“응, 꼭 양아치 같아.”
“헐, 무슨 그런 말을….”
아샤의 말을 들으며 캠핑카 내부에 있는 전신 거울을 들여다보는 태월이다.
그런데 아샤의 말대로 너무 상상을 그런 식으로 해서인지, 험악한데다가 비열해 보이기까지 했다.
‘야, 조폭의 이미지를 내가 이렇게 가지고 있었던 거네? 크, 황소파 애들이 보면 형님! 하겠는걸?’
차 밖에 차박용 텐트를 치고 바다를 감상하고 있는데, 승합차 한 대가 가까이에서 정차했다.
그리고는 무리를 이룬 사람들이 태월 방향으로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5명 정도의 20대 초중반 청년들이었다.
태월이 그들을 빤히 쳐다보자, 앞에 서 있던 남자가 움찔거린다.
“거기 뭐요? 여긴 우리밖에 없는데 이리로 왜 온 거죠?”
“당, 당신이….”
“야, 박용호! 이름답게 굴어. 네가 할 수 있다며? 왜 버벅대냐?”
박용호란 사람의 뒤에 있던 청년이, 그의 등을 쿡쿡 치며 말을 했다.
“흠흠, 당신이 여자들을 납치했다고 들었소.”
“들었소? 어이 지금 나랑 맞먹자는 거야?”
“아, 들었습니다!”
“납치 아닌데? 가족들이거든?”
박용호가 뒤를 돌아보며 친구들을 쏘아본다.
“야, 시끼들아? 가족이래잖아!”
“야 다들 그렇게 말하지. 납치범이 납치했다고 하겠냐? 생각을 좀 해라.”
태월은 그냥 웃음이 나와 그들의 하는 꼴을 지켜보는 중이다.
동시에 험악한 인상이 얼마나 잘 통하는지 테스트도 하는 중이었고.
그런데 그때 시끄러워서인지 차 안에 있던 아진이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덩달아 아루가 문밖으로 고개를 쏙 내밀었다.
“헉, 어, 엄청 이쁘다!”
“저, 저 봐! 엄청난 여자분들을 저치가 납치한 거잖아. 뭘로 봐서 가족으로 보이냐?”
“아가씨들! 우리가 구하러 왔습니다!”
아진은 청년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구하러요? 뭘 빌리러 온 건가요?”
“그게 아니라, 악당으로부터 공주님들을 구하러 왔습니다!”
“풉! 악당이래!”
아루가 그 청년의 말에 웃음을 뱉어냈다.
“저기요? 우린 가족들 여행 온 거예요. 구하긴 뭘 구해요?”
이번엔 아샤가 고개를 내밀고 말을 하자, 청년들의 눈이 커졌다.
그리고는 자기들끼리 속삭인다.
“진짜, 가족들인 거 아냐?”
“참나, 진짜 가족이면 내가 성을 간다.”
“너 저번 달에도 성을 갈아놓곤 또 가냐?”
“용호야? 너 마지막 고개 내민 공주님 봤지? 눈에 눈물이 글썽였잖아.”
“어떤 협박을 받는 거 같긴 했어. 공주가 아무 때나 눈물을 흘리진 않잖아.”
근거도 없는 말을 해 보는 간이 커진 박용호다.
“우리 다섯이면 아무리 조폭이라도 당해낼 수 없을 거야. 작년에 인천에서 왔던 그 조폭 둘도 우리가 작살 냈잖아?”
이들의 말대로 작년에 인천에서 인상 더러운 두 남자가 오긴 했었다.
단지 그들이 조폭이 아니라 그냥 인상 더럽고 껄렁거리는 일반인이었을 뿐이고.
“준비됐나?”
용호의 말에 친구 4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품속으로 손을 넣더니 뭔가를 꺼내 태월에게 일제히 던졌다.
“컥, 이, 이게 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