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화. 해변의 땅
언제 들어왔는지 횟집 안에는 김병석이 다른 이와 함께 서 있었다.
태월이 처음 보는 그 사내는 영혼의 색이 짙은 회색이었다.
‘좋은 의도로 온 놈이 아니군.’
최석만은 그 사내를 아는지 인상을 찌푸렸다.
그래도 자신의 손님에게 폐를 끼치기 싫었던 그는 앞으로 나서며 그들을 제지했다.
“여긴 내 가게니, 이곳에서 소란은 안 돼! 이만 나가게! 다 끝난 일로 이러는 건 본인에게도 좋을 게 없을 텐데?”
“하쭈? 이 형님이 왜 이러실까? 나 몰라요? 광견이요, 광견! 물리고 싶소?”
둘의 이야기에 듣고 있던 아샤가 아진에게 묻는다.
“광견이면 뭐야?”
“미친개란 뜻이야.”
“풉! 사람이 아니란 거잖아.”
아샤가 한글을 배우긴 했어도, 한자권의 나라 태생이 아닌지라 종종 한문에선 헷갈려 했다.
두 여자의 목소리가 맑고 또렷해서, 가게 안의 모두에게 들렸다.
광견이란 자는 두 여자를 보더니, 먹잇감을 본 하이에나처럼 눈을 빛내며 다가왔다.
“와! 이거 눈이 호강하네? 외국 년이 한국말도 유창하고? 오늘 나랑 한번 찐하게 놀아볼까?”
“저기, 사진을 찍는 게 먼저네! 얼굴에 흠집이 가선 안 돼!”
“아이고, 걱정하지 마세요. 몸 좀 어루만져주면 고분고분해질 겁니다.”
그 둘이 가까이 다가와서 떠드는데도 태월은 그냥 놔두었다.
만만히 보는 여자에게 좀 맞는 게 더 착실한 교훈이 될 거 같아서다.
“어, 언니? 쟤가 지금 나보고 년이라고 한 거 욕 맞지?”
“응, 쌍욕이지 뭐.”
“뭐? 쟤? 하하 이게 날 뭘로 보고? 오늘 내 아래서 헐떡이게 만들어 주마!”
손을 휘두르며 아샤의 손을 잡아가는 광견이란 사내다.
“개라며? 그리고 너 오늘 개 맞듯이 나한테 좀 맞아보자.”
다가온 손을 잡아끌어 당겨, 가까이 다가온 사내의 왼쪽 뺨을 후려쳤다.
-짝! 컥!
오른쪽으로 몸을 휘청인 사내의 턱을, 아샤는 몸을 기울이며 오른쪽 발등으로 차버렸다.
일반 남자의 각력보다 좋은 아샤의 타격에, 그는 뒤로 넘어지며 의자와 함께 뒹굴었다.
아샤는 쓰러져 꿈틀대는 그를 잠시 지켜만 본다.
“멍멍아? 그만 일어나!”
순간적으로 당했다고 여긴 광견은 머리를 흔들더니 의자에 의지해 일어섰다.
“하, 씨발. 오늘 내가 감기 기운이 있어서 힘을 못 쓰니 이런 경우를 당하네. 방심했다는 걸 인정하지.”
그 사내는 쪽팔렸는지 쓸데없는 핑계를 대고 있었다.
“풉, 꼴에 사내라고. 아니지 수캐인가? 방심 안 하게 해줄 테니 이리로 와서 덤벼!”
아샤가 손가락을 까딱거리자, 얼굴이 뻘게진 사내는 멧돼지처럼 돌진했다.
-쫘아악! 컥!
순간적으로 피하며 이번에도 왼쪽 뺨을 아샤가 휘갈겨 쳤다.
“얘? 거기 코에서 피 나잖아? 냅킨으로 좀 닦아 봐. 또 맞을 건데. 내 손에 더러운 게 묻음 어떻게 해?”
주변에선 벌써부터 손님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질 나쁜 깡패를 만나 혹시나 여자들이 다칠까 봐 마음을 졸이며 태월을 몰래 욕하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상황은 정반대로 가고 있었다.
참을 수 없는 모욕이라고 느꼈는지, 테이블 위에 있는 맥주병을 깨더니 아샤에게 돌진했다.
태월도 카메라를 꺼내 촬영을 시작한다.
“죽어! 이년아!”
“하이고, 멍멍이가 학습 능력이 부족하네.”
흉기가 된 깨진 병을 들고 찔러오는 그에게 픽하고 웃어주고는, 오히려 돌진하는 아샤다.
쓰러져 있던 의자를 오른발로 딛고 점프해서 깨진 병을 피한 후, 사내의 등판 너머 반대쪽 어깨를 강하게 차버렸다.
오른쪽 어깨가 부러지며 손에 들고 있던 병이 바닥에 떨어져 부서졌다.
-퍼억! 빠각! 끄아악! 채챙!
어깨가 부러지는 일은 흔한 일이 아니다.
그만큼 강력한 타격이 그를 덮친 것이다.
나뒹구는 사내에게 다가간 태월은 샌들을 신은 발로 왼쪽 어깨를 밟았다.
“또 해볼래? 이거 은근히 재밌네.”
“크읔, 두고... 보자...”
“부러진 어깨를 안 밟아주니 입은 살았네.”
양쪽 어깨를 다 쓰지 못하는 상태기에 몸을 일으키려고 발버둥치는 그였다.
그러다 아샤의 허벅지까지 오는 치마에서 무언가를 발견한 사내의 눈이 커졌다.
‘큭, 보, 보인다!’
“오! 꼴에 사내라고 고통 속에서도 할 건 다 하네? 고맙지?”
오른발에 힘을 줘 왼쪽 어깨를 탈골시켰다.
“끄흑!”
이 사내는 앞으로 오른쪽 팔을 정상으로 쓰지 못하게 될 것이다.
한편의 활극을 본 듯한 영화 같은 장면이 이어졌고, 다들 꿈을 꾸는 기분이었다.
시간은 불과 3분 정도였으나, 그 박진감은 손님들을 흥분시키기에 충분했다.
-짝짝짝!
“와! 대단해요, 대단해! 자 박수를 보냅시다.”
-짝짝짝! 짝짝! 짝짝짝!
홀 안의 김병석을 제외한 모든 이들이 손뼉을 쳐댔다.
그는 눈치를 보며 도망을 치려다가 최석만의 아들인 최장구에게 제지를 당했다.
평소 자신의 횟집에 시비를 자주 걸었던 작자였기에, 이참에 잘되었다고 여기는 최장구다.
누군가 신고를 했었는지 5분 후에 경찰이 들이닥쳤다.
“어? 이 자식 광견 아냐? 또 사고 쳤나 보네. 그런데 왜 기절해있지?”
“하하, 그게 말입니다.”
최석만이 나서서 그 일에 관해 설명했고, 주변 손님들도 증언을 했다.
흉기로 사용된 병 조각들을 모은 경찰 둘은 비닐 팩에 잘 챙겨 넣었다.
그동안 사고를 칠 때마다 교묘하게 빠져나가던 광견이 잡혔으니 경찰에겐 오히려 잘된 것이다.
“뭐 부상이 심각해 보이긴 합니다. 그러나 주변 증인들에 의하면 목숨을 지키려 한 것이라니 정황상 일치합니다. 간단하게 조서만 작성 부탁합니다.”
태월이 아샤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도 부담 없이 협력을 하였다.
그리고 태월은 이미 그전에 카메라로 촬영한 부분이 있었는데, 굳이 이 상황에서는 사용하지 않았다.
피하고 충분히 제압할 수 있음에도, 과잉방어로 보일 장면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김병석 또한 머리가 나쁘지 않았기에, 이대로 가다가는 자신이 살인미수와 엮여버린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또한 다른 손님들과 같은 증언을 했기에, 아샤의 행위를 과하게 보는 경찰은 없었다.
‘이 사람도 어지간하군. 서로 필요에 의해 잠시 결탁한 거 같기는 한데. 그냥 둬야 하나? 한편으론 너무 괘씸하단 말이지.’
광견과 엮어도 되긴 하지만, 그렇게 했다간 많은 시간을 강릉에서 허비해야 한다.
태월이 김병석을 어찌 처리할까 고민하던 중에 최석만이 그를 살짝 부른다.
“고민하는 듯해서 제가 뵙자고 했습니다. 사실 저 김병석은 안하무인이긴 합니다만, 따지면 저의 인척과도 연관되기에 애매합니다. 차라리 이러면 어떨까요?”
“네? 어떤?”
“저 자식이 물려받은 재산이 많다 보니 저렇게 제멋대로인 면이 있어요. 형사까진 가지 마시고 심적 보상으로 민사 식으로 처리하면 어떤가요? 저놈 재산의 반쯤을 협상 조건으로 내세워도 응할 겁니다.”
“제가 돈은 그리 필요가 없어서요. 쓸 만큼은 있거든요.”
“에이, 그거야 저도 척 보면 알지요. 그냥 강릉에 별장 하나와 배 한 척 둔다고 간단하게 여기셔도 되지 않을까요? 집어넣는다고 해도 사장님께선 별 의미 없잖습니까?”
사실 이 사건은 크게 확대하면 한없이 커질 수 있지만, 흔한 폭력 사건으로 처리해도 될 일이다.
경찰이 원하는 것은 광견의 범죄이지, 동네 유지 중 하나인 김병석의 구속은 아니었다.
“그럼 제가 일행과 이야길 좀 해보겠습니다.”
“하하, 감사합니다. 그럼 저도 김병석과 이야길 잘 이끌어보겠습니다.”
태월이 일행에게 돌아가는 것을 본 최석만은 김병석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에구, 자네 이번 일은 과해도 너무 과했어. 아무리 내가 미워도 그렇지, 관계도 없는 사람을 죽이려고 해?”
“헉, 무, 무슨 소리야? 그냥 나도 사진만 찍으려 했던 거라고. 그런데 그 개자식이 사고를 친 거잖아. 너도 보면 알잖아? 내가 또라이긴 해도 사람을 상하게 하지 않는다는 걸.”
“너 해변에서도 들었겠지만, 저분들 유명한 외국 배우인 건 대략 알지?”
“그, 그렇게 나도 여기긴 했지. 그래서 내가 사진 찍으려 한 거고.”
“어쩌면 국제 변호사를 선임할지도 몰라. 아까 그 여자는 유명세가 클 외국인이잖아. 그들이 이대로 넘어가겠나? 자네 살인미수에 대해 감당할 자신은 있나? 한국도 아닌 국제 변호사가 참여하는 재판이 될 거야. 한국이 미국에 쩔쩔매는 건 알고 있지? 주한미군 범죄만 봐도 다 알잖는가!”
국제 변호사를 언급하며 거창하게 떠드는 최석만의 엄포에 기가 죽은 김병석이다.
“그래도 저 여자분이 다치진 않았으니, 합의금으로 해결할 수 없겠나? 돈이라면 내가 어느 정도 마련해보겠네.”
“내가 듣기론 저들이 돈에 구애받지 않을 수준이던데. 특히나 저 외국 여자는 꽤 돈이 많은 부잣집 상속녀라고 하는 것 같았어. 대충 넘기려 하면 아마 반발이 바로 일어나지 않겠나? 혹시 성의 표시만 하려는 건 아니겠지?”
아샤가 상속녀란 건 최석만의 구라였다.
“최대한 주겠네! 집 한 채 정도면?”
“무슨 집? 혹시 저쪽에 있는 쪼그만 아파트?”
최석만이 김병석을 빤히 쳐다보자, 헛기침을 한 번 하며 고개 내젓는 그다.
“날 뭘로 보고! 재산의 20%가 되는 시내의 땅이면 어떨까?”
“에이, 이 사람이 아직 정신을 못 차렸어. 살인미수야 살인미수! 내가 미안해서 말을 못 하겠어. 자네가 직접 하게.”
사실 최석만이 김병석을 이렇게 몰아치는 것은 이유가 있어서다.
그 전부터 돈지랄하면서 자신의 가게를 집어삼키려고 몇 번이나 시도했던 적이 있었다.
지금처럼 재산이 절반쯤 날아가면, 그런 시도는 이참에 해결되는 것이다.
더구나 김병석의 해변 땅이 자신의 가게와 연결되기에, 그가 더욱 욕심을 부렸었다.
그냥 큰 땅에 붙은 땅일 뿐인데, 그 작은 것마저 차지해야 속이 후련한 인간이 김병석이었다.
“그럼, 얼마나?”
“70%?”
“헉! 말도 안 돼! 너무 과해! 30%!”
“지랄! 니가 알아서 해!”
최석만이 화난 척하며 등을 돌리려 하자, 급히 그의 팔목을 잡는 김병석이다.
“절, 절반! 그럼 되잖는가! 서로 20%씩 양보!”
김병석의 말에 턱을 몇 번 긁적대던 최석만은, 인심을 쓰는 척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딸들이 고새 저 여자분하고 친해져서 언니 동생 하거든? 아마 잘 말해줄 걸세. 기다려 보게! 아 참, 자네 딴소리하면 난 손 떼네!”
“도, 도와만 주게!”
“자네의 재산의 절반 정도면, 여기 해변가 땅이 그 정도잖아? 자네도 알다시피 바다를 좋아하는 분들이고, 다른 건 씨알도 안 먹힐 거야.”
“그, 그렇게 하겠네.”
최석만은 태월에게 손짓을 해서 다시 그와 만났다.
“여기 해변의 땅이 꽤 됩니다. 뭐 미국의 해변과는 비교할 수 없긴 하겠지만요. 그래도 이곳 주변에선 최고의 절경을 가진 곳이거든요. 위치도 아주 알짜배기고요.”
“흠, 경치가 좋다니 마음에 드네요. 그런데 그 땅이 여기서 거리가 먼가요?”
“하하, 바로 눈앞에 있지 않습니까? 여기 가게 옆에서부터 저기 하얀 창고 같은 곳 보이시죠? 거기까지예요.”
최석만이 가리키는 하얀 건물을 보던 태월의 눈이 살짝 찌푸려졌다.
‘허, 저 건물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