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화. 횟집의 서비스
회색 양복을 걸친 중년 사내가 앞으로 나섰다.
그는 최 씨를 힐끗 한 번 쳐다보고는 말을 잇는다.
“우리는 모델료를 지불하겠소. 과하지만 않다면 말이오.”
사내의 말에 최 씨가 인상을 쓰더니 자신도 앞으로 나섰다.
“김병석! 이야기가 다 끝났는데 왜 나서는 거야? 일부러 똥물 튀기려고 이러는 거지?”
“똥물? 말하는 뽄새 하고는. 이런 분들에게 모델료 지불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니야? 기껏 회 몇 점 썰어주고는 그걸로 퉁 치려는 석만이 자네가 양심 없는 거잖아.”
“이익, 회 몇 점이라니? 가게의 음식 재료를 다 동원할 건데.”
“나 원 참, 그깟 가게의 식재료가 얼마나 된다고 오바야?”
이웃끼리의 언쟁이 생기자, 권재희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두 분 다 그만 하세요. 사람들 있는데 창피하지 않으세요?”
둘의 다툼을 잠시 멈추게 한 그녀는 태월을 쳐다봤다.
“어떻게 하실래요? 조건은 들으신 대로고요.”
“돈은 그리 중요한 게 아니니 처음 이야기했던 분의 가게로 가죠.”
태월의 말에 긴장하던 최석만이 주먹을 불끈 쥐고 하늘로 쳐들었다.
“아자자! 하하, 어서 갑시다.”
이웃사촌인 김병석에게 어깨를 으쓱해 보여주고는 몸을 돌려 앞장을 섰다.
그의 뒤로 최석만과 연관된 청년이 리어카를 끌었다.
그 리어카 안에는 태월 일행의 수확물이 담겨있었다.
짐을 싣는 걸 태월이 도와주려 했으나, 최석만이 만류를 하였다.
딴에는 김병식의 시선이 신경 쓰였기 때문이다.
태월이 도착한 곳은 항구 쪽 근처에 위치한 40평 규모의 횟집이었다.
“이곳이 저와 식구들이 하는 가게입니다. 누추하지만 안으로 들어가시죠?”
말은 태월에게 하지만 그는 아진과 아샤의 눈치를 보았다.
최석만 역시 태월을 매니저쯤으로만 여기는 상태다.
가게가 그렇게 누추하지는 않았고, 여느 바닷가의 흔한 횟집 분위기였다.
“어? 아버지 오늘 쉬신다더니 어쩐 일이세요?”
“하하, 이쪽이 제 아들놈입니다. 인사드려라. 외국에서 유명한 분들이셔.”
최석만이 생각하는 미국은 아니지만, 태월과 그녀 둘이 러시아에서 나름 유명한 것은 맞다.
자기 아버지의 등 뒤로 서 있는 세 명의 낯선 사람을 그제야 보게 된 아들 최장구다.
“헙, 이, 이분들은?”
“왜? 굉장하시지? 어쨌든 안으로 모실 테니, 넌 병수가 가져온 해산물부터 다듬어라. 회는 오늘 내가 뜰 거야. 자세한 이야긴 조금 이따가 하자. 다른 손님들도 오고 있으니, 네 엄마랑 동생보고 빠릿빠릿 움직이라고 해라.”
“네, 아버지!”
태월 일행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에도, 대답과는 달리 아진과 아샤를 힐끗힐끗 보며 걸음을 옮기는 최장구다.
‘우와! 태어나서 처음 보는 미인들일세. TV에서도 저 정도 배우는 못 봤는데. 아버지는 어떻게 손님으로 모셨을까? 사인받을 수 있을까?’
횟집에는 방이 있긴 했는데, 전부 홀과 오픈이 되어 있는 그런 구조였다.
태월 일행의 뒤를 따라온 사람들은 일행별로 자리를 잡고 음식 주문을 했다.
그러나 주문보다는 방으로 향하는 시선이 대부분이다.
태월 일행의 좌석에 세팅을 하고 있는, 이 집의 막내딸인 18살 최진희는 연예인 지망생이었다.
그렇다고 특출난 외모는 아니었고 연기는 전문적으로 배운 적이 없다.
다만 중학교 다닐 때 연극반에 있던 게 다였다.
노래를 열심히 하긴 하지만, 이 주변에서나 조금 뛰어날 뿐 가수가 되기엔 무리가 있었다.
그래도 성격이 활발해서 친구들은 많았다.
요즘은 대학가는 걸 포기한지라. 학교 수업도 일찍 마치고 오는 편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친구들도 같은 처지였다.
‘와, 피부들 좀 봐봐. 얼굴은 또 어떻고! 정숙이와 초희가 보면 난리 나겠어. 걔들은 아직 연예인을 직접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외국 배우라고 했지? 진짜 엄청나네. 빨리 전화해줘야겠다.’
세팅을 마치기 무섭게 다른 손님들은 엄마에게 맡기고, 카운터의 전화기로 삐삐부터 치는 최진희다.
다른 손님 주문을 두 건 받고 나니 카운터의 전화기가 울려댄다.
엄마보다 더 빠르게 전화기를 낚아챈 막내딸은 3분간 수다를 떨었다.
그러나 억센 손 하나가 전화기를 잡아채 제자리에 갖다 놓았다.
“얘? 너 지금 수다 떨 시간이나 있니? 손님 주문 밀린 거 안 보여? 네 언니도 급하게 오라 했으니 서둘러!”
막내딸의 등짝을 찰싹 때리는 엄마 김진숙이다.
“잉! 알았어. 하면 되잖아.”
“너 혹시 저 손님들 때문에 친구들 부른 거 아냐?”
뜨끔 해진 최진희는 서둘러 변명을 했다.
“어, 어, 맞아! 오늘 가게가 바빠졌다고, 와서 일손 좀 도우랬어. 잘했지?”
“뭐, 도와주면 좋긴 하지만….”
막내딸의 진의가 의심이 가긴 하지만, 지금은 노는 손이라도 빌려야 할 판이었다.
가게 생긴 이래로, 오픈 첫날 빼고는 10년 만에 이 정도의 손님은 처음이었다.
밖에 펼쳐놓은 파라솔 테이블도 꽉 차 버렸다.
신랑의 흥얼대는 분위기만 봐도, 방에 앉은 손님들 때문인 것을 그녀도 안다.
‘자세히는 못 들었지만, 외국에서도 유명할 정도라고 했지? 뭐 저이의 성격상 공짜로 대접하는 것이겠지만. 아 아니구나. 저분들이 가져온 해산물과 횟감도 엄청나던데.’
태월이 가져온 생선들은 전부 수족관에 넣어두었다.
오늘 한 끼로 먹을 수 있는 양도 아니었고, 며칠간 먹어도 절반 이상 남을 것이다.
“자, 이게 우리 집 자랑인 물회와 곰치국입니다. 그리고 회는 오늘 잡은 감성돔과 벵에돔 그리고 우럭입니다. 제가 칼질 하나는 이곳에서 으뜸입니다. 다른 것들도 차렸으니 드셔 보세요.”
한 상 가득 차려진 테이블이다.
살짝 고개 숙여 감사의 의사표시를 한 태월 일행은 본격적으로 먹방에 나섰다.
물질을 하느라 셋 다 출출한데다, 음식의 식감도 꽤 식욕을 돋웠다.
“끄아, 진짜 미쳤어. 저게 인간의 외모냐?”
“어머머! 진희 말대로네! 아니, 말보다 더하네. 어느 나라 공주님들 아닐까?”
“저, 저기 고양이 좀 봐봐. 엄청 도도해 보이고 예쁘다. 그리고 너무 귀여워!”
호들갑을 떠는 양갈래 머리의 정숙이와 순정만화에 빠져 사는 초희의 대화였다.
“얘들아! 울 엄마 눈치 보이니 일이라도 좀 하면서 떠들어.”
“익, 너 혼자 결정해서 우릴 아르바이트 시키냐? 나도 오늘 손님으로 온 거거든? 저 근처에 자리 좀 내줘!”
“얼씨구, 너 분위기 봐봐라. 너희처럼 둘이서 물회 하나 딸랑 시켜놓고, 손님입네 하는 좌석이 어디 있냐? 그리고 너희 앉을 좌석도 없잖아! 이따가 물회 잔뜩 먹여 줄 테니, 일하는 시늉이라도 좀 해!”
“진희 이야기대로 하자. 그럼 우리가 저기 방 손님 전담 서비스를 책임질게.”
“오! 맞아. 역시 우리의 순정만화 마니아다운 아이디어야!”
“어휴, 그럼 그렇게라도 하자.”
자기 친구들의 요구에 응할 수밖에 없는 가게 내부 상황이었다.
“아, 이럴 때 하녀복 코스프레를 할 수 있는 기회인데, 그 옷을 못 가져왔네.”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신 막내딸 친구 초희는, 정숙일 데리고 태월 일행의 테이블로 왔다.
“안녕하세요? 전담 서비스를 맡게 된 하녀, 아, 아니 신초희라고 하고요. 이쪽은 제 친구 구정숙이라고 해요.”
여고생으로 보이는 둘이 와서 하는 인사에 태월은 황당했다.
‘이런 횟집에 무슨 전담 서비스 직원이 있단 말인가. 원래 관광지는 있나?’
태월이 인사를 받아주려 머뭇거리는 사이에, 신초희의 손이 더 빨랐다.
“이 그릇은 다 드신 거 같으니 치워 드릴게요. 또 필요한 게 있는지는 저희가 잘 살펴서 채우도록 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그녀의 손엔 빈 접시가 들려있었다.
그리고 크고 작은 그릇을 가리지 않고, 하나가 빌 때마다 와서 치워주고 채워줬다.
처음에는 태월 일행도 그게 귀찮았다가, 나중엔 익숙해져서 그러려니 했다.
“아, 이제는 그만 먹어야겠어. 배가 너무 부른데. 커피라도 먹을까?”
“응, 그래 그러자. 오빠는 어때요?”
“나도 더 먹긴 힘들겠다. 이 집 음식은 그래도 꽤 먹을 만한데? 커피는 그냥 달달한 거로 해야겠다.”
“나도!”
아샤까지 태월의 커피 취향을 따르자, 아진도 고개를 끄덕였다.
“곧, 대령하겠습니다!”
신초희는 구정숙에게 눈치를 줬고, 그녀는 커피를 타러 자리를 떴다.
태월은 그녀들의 어설픈 하녀 흉내가 그냥 웃기면서도 기특하기도 했다.
아까부터 눈치를 보건대, 이 집 막내딸의 친구란 걸 느끼고 있는 터였다.
구정숙이 커피까지 가져오자 셋은 기꺼이 받아 마셨다.
“원래 이런 서비스를 받으면 팁은 기본이지.”
태월이 지갑에서 6만 원을 꺼내 신초희에게 내밀자, 금액에 놀란 그녀는 머뭇거렸다.
“괜찮아. 전담 서비스엔 이런 금액은 기본이거든?”
태월의 말에 잠시 고민을 하던 그녀는 엉뚱한 소리를 내뱉었다.
“저기, 저희는 학생이라 이런 큰돈은 필요 없고요. 대신 추억으로 삼게 사진을 한 장 같이 찍을 수 있을까요? 더불어 사인도 한 장 해주시고요.”
“흠, 글쎄다. 당사자들 의견을 들어보마.”
태월은 아진과 아샤에게 눈빛으로 의향을 물었다.
그녀들의 입장에선 어차피 이 집 사장과 사진 찍어야 했기에 별 부담을 느끼지 않았다.
다만 사인이 문제다.
“네가 뭔가 오해하는 것 같은데? 우린 여배우 같은 그런 연예인이 아니야. 그래서 사인 같은 게 무슨 의미가 있겠니? 사진은 그리하도록 할게.”
아샤의 말에 신초희의 눈이 커졌다.
그녀의 눈 표정을 본 아샤는 손을 가리고 웃었다.
그런데 신초희가 놀란 포인트는 이들이 비연예인이라는 것에 있지 않았다.
“어머? 한국말을 이렇게 유창하게 하세요?”
그녀의 궁금증이 아샤의 생각관 달랐지만, 기분이 좋은 아샤는 친절히 대답해줬다.
“그럼, 우리 오빠가 한국인인데 당연히 나도 그 정도는 하지. 우린 한 가족이거든?”
“아, 얼굴이 많이 다른데요?”
“친 혈족이란 소리가 아니라, 가족과 같단 소리야. 따지면 이 오빠와 난 예비부부야.”
아샤가 장난스럽게 태월의 뺨에 입맞춤했다.
아진도 아샤의 장난에 장단을 맞춰 그 반대편 뺨에 뽀뽀를 한다.
그런데 얼굴이 빨개지는 건 태월이 아니라 신초희였다.
횟집 손님들이 조금 웅성거린다.
아샤와 아진은 주변의 시선에 신경을 안 쓰는, 달관한 캐릭터들인지라 자연스러웠다.
“그, 그래도 추억으로 삼을 건데 사인은 꼭 해주세요.”
연예인이 아니라는 데도 부탁을 하는 신초희에게 어쩔 수 없었다.
결국 아샤와 아진은 종이를 가져오게 했다.
부리나케 달려가 종이 두 장을 가져온 그녀는 결국 추억을 하나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사진 촬영도 이어졌고, 태월이 사진사가 되어 자신의 카메라로 다섯을 찍어줬다.
이 집 막내딸까지 포함된 숫자다.
“저, 저희도 부탁합니다.”
최석만 내외와 아들 그리고 둘째 딸까지 포함된 사진을 찍게 된 아진과 아샤다.
새 필름으로 갈아 넣고 찍은 것이지만, 단 두 장의 현상을 위해 필름을 꺼내려 했다.
그런데 어디선가 불만에 찬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이러는 게 어딨소!”
“저! 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