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신의 재능을 삼켜라-146화 (146/250)

146화. 노스님과 황지명

태월이 놀란 건 보리스가 총탄을 맞은 부상 부위가 하필이면 남성 중요 부위였기 때문이다.

혀를 끌끌 찬 태월은 배낭에서 수술 도구를 꺼내, 이미 시신이 되어버린 보리스의 상처를 소독하고 꿰맸다.

총알이 앞부분을 스쳐 지나가면서 그곳의 절반이 사라졌다.

절반 이상은 남아 있어 그걸 봉합하긴 했지만, 남성의 기능은 상실했다 봐야 한다.

“뭐, 종교에 귀의하게 하려던 건데, 상관없겠지? 아니어도 어쩔 수 없는 거고.”

태월은 보리스를 소생시킨 후 곧바로 병원으로 보내도록 했다.

그리고 며칠 후에 들려온 소식으론 참회의 눈물을 흘리며 수도원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보리스가 스스로의 죄를 자백함으로써 알렉세이는 명분을 얻었고, 마피아 보스의 자리에 저항 없이 오를 수 있었다.

러시아에 있는 마피아 조직의 파벌만 40개가 되는데, 그중에서도 다섯 손가락에 들어가는 대형 조직의 우두머리가 된 것이다.

모스크바에 자리를 잡고 있던 알렉세이의 조직은, 태월을 위해 이르쿠츠크의 소규모 조직을 흡수하여 하부조직으로 만들어 버렸다.

태월이 가족들과 함께 한국으로 떠난 한 달 후에 벌어진 이야기였다.

“외국대학 인정심사 접수는 다 했어?”

조민희는 태월과 차를 한잔 나누고 있었다.

“셋 다 했으니 결과야 기다려 봐야 하지만, 문제는 없을 거예요. 한국도 아포스티유 협약 가입국이거든요.”

아포스티유는 1961년 10월 5일 헤이그 국제사법회의가 제안한 국제조약이다.

조인국들 중 한 곳에서 발행한 문서를, 다른 모든 조인국에서도 합법적으로 인증해주는 규정이다.

그래서 문서의 하단에는 ‘Convention de La Haye du 5 octobre 1961’이라는 문구가 표기된다.

이 문구는 아포스티유 발효를 위해 프랑스어로 작성되는 것이다.

“어휴, 그래도 무슨 문서가 열 가지가 넘냐? 그래도 너희가 졸업 전에 의사나 약사 예비시험을 치렀기에 이 정도지.”

“저희가 직접 떼야 하는 거 외에는 우리 법무팀에서 모스크바 대학에 요청해 받은 거잖아요. 그래도 94년부터 가능해진 거라 다행이라 생각해요.”

“통보야 기다리면 나올 테고, 남은 기간에 뭐 하고 지내려고?”

“오랜만에 노스님도 뵙고, 스승님 아드님이 연락해온 것도 있어서 거기도 찾아가 봐야죠. 그리고 시간 되면 국내 여행도 좀 해야죠.”

“그래, 학교 다니느라 제대로 쉬지도 못했을 테니 그러는 게 좋겠다.”

건곤암의 노스님은 간간이 안부만 묻고 직접 찾아뵌 건 5년 만인 태월이다.

그리고 황서윤 스승의 아들에게서도 책에 관련해서 연락이 왔었지만, 차일피일 미루다 이제야 방문할 시간 여유가 된 것이다.

TW 본사를 나온 태월은 집에 들러 아진과 아샤를 데리고, 하남 검단산의 건곤암으로 향했다.

“여기가 설희 언니를 처음 만난 곳이란 거죠?”

“뭐, 인연이 있으니 그리되더라.”

차에서 내리는 아샤는 태월의 이야기에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호호, 오빠가 이곳에서 아기 스님처럼 지냈었다니 생각만 해도 신기해요.”

아진도 아샤의 말에 공감하는 눈빛을 보내며 주변을 감상했다.

그리고 여전히 절에 방문한 사람들이 많이 모여드는 건곤암 적호도 벽화 쪽으로 다가갔다.

태월은 그 둘을 지켜보다 노스님이 기거하는 곳으로 발을 옮겼다.

미리 연락을 해서인지 도명스님이 나와 있었다.

“오, 태월은 이제 장가가도 될 나이네?”

30대 중반이 되었을 도명스님도 여전히 그때와 변화는 많지 않았다.

있다면 과거보단 말투가 차분해졌다는 것 정도다.

“잘 계셨나요? 그동안 별일은 없었죠?”

“이곳 산사에 별일이랄 게 뭐 있겠어? 있다면 스님이 몇 명 더 늘었다는 것 정도지.”

“노스님은 안에 계시죠?”

“응, 들어가 봐! 내색은 안 하시지만, 꽤 들떠계셔. 그런데 혼자 온 거야? 동행이 있다는 걸로 들었는데?”

“둘은 절을 둘러보고 있어요. 일단 왔으니 문안 인사부터 드리려고요.”

도명스님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건물 안으로 앞장섰다.

태월이 어린 시절에 보았던 건물도 있긴 하지만, 그 후에 지어진 건물도 두 개나 된다.

귀신에 들린 여자를 구했을 때, 그 집에서 감사의 의미로 이 건물을 지어줬었다.

그 당시 노스님과 함께 간 태월의 노고도 담겨있는 곳이다.

“큰 스님! 태월이 왔습니다.”

“흠흠, 그래 들어오게 해라.”

목소리가 과거보단 좀 약해진 듯하지만, 노환 외에 깊은 병은 없어 보였다.

태월은 도명스님이 열어준 방문 안으로 들어가 큰절부터 먼저 올렸다.

“흠, 그래 타지에서 공부하느라 수고했다.”

“건강엔 문제가 없는 건가요?”

“허허, 부처의 자비가 나에게 너무 많이 온 거 같아. 나이가 더 들었다는 것 외엔 아직은 별달리 문제가 없구나.”

“오다 보니 팔당호 쪽으로 터를 닦아 놓으셨던데 거기에 뭔가를 지으려나 봐요?”

“아, 그거! 짓는 건 네가 해야 하지 않냐?”

“네? 그게 무슨….”

태월의 어리벙벙한 표정에 노스님 박치곤은 피식 웃어준다.

그리고는 뒤편에 있던 함 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앞으로 내밀었다.

서류 봉투 같기에 궁금증이 생긴 태월은 그 안의 내용물을 꺼내 보았다.

“어? 이거 부동산 등기 아녀요. 이건 왜요?”

“다음 장을 넘겨보면 알 거 아니냐.”

노스님의 말에 이상함을 느낀 태월은 곧바로 확인을 했다.

“어? 이게 왜 제 명의로 되어 있죠?”

“그거야 원래 네 것이었잖아. 성년이 되는 날에 맞춰서, 네 어머니를 만나 바꿔 놓은 거야. 그러니 그 터에는 네가 필요한 걸 지어야 할 거 아니냐.”

태월이 한국에 없어도 명의 변경이 가능했던 이유는, 아들의 인감도장을 조민희가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이건 제가 절에 기부한 거잖아요.”

“기부는 무슨? 그 당시만 해도 땅에 환장해서 눈빛 반짝이던 꼬맹이가!”

그 꼬맹이가 호기를 부려 사게 된 땅이, 건곤암 앞쪽의 임야를 포함한 5만 평이다.

15년에 산 땅인데 강 주변의 인기도와 적호도로 절이 유명해지면서, 이 일대의 가격도 그때보단 몇 배나 오른 상태였다.

빙긋이 웃으며 말하는 노스님의 본새가 태월을 놀려주고 있다.

“에휴, 그거야 저도 충분히 받았잖아요.”

“다른 말 할 것도 없어. 이미 등기된 건데 뭘 어쩌란 거냐. 나도 나이가 있어서 길면 오 년이다. 절의 명의로 가지고 있어 봐야, 종단에 있는 땡중들 배만 채워주게 할 뿐이다. 그러니 이 일에 대해 더는 왈가왈부하지 말자꾸나.”

“네, 스승님!”

늘 노스님이라고 부르던 태월이었다.

오늘 처음으로 태월이 그를 스승이라고 부르자, 노스님 박치곤의 입가에 미소가 더욱 감돈다.

“같이 왔다던 처자들은 어디 간 게야?”

“경내를 구경하고 있습니다. 데리고 올까요?”

“더 둘러보라고 해라. 그동안 네가 지내온 이야기들을 좀 듣자꾸나.”

태월은 노스님에게 두 시간에 걸쳐서 러시아와 일본에서의 일을 이야기했다.

긴 시간이 아님에도 그 내용은 하나같이 평범하지 않은 일들이다.

“허허, 나도 요괴는 딱 한 번 본 게 다였는데, 넌 참으로 특별하구나. 그런데 아진이란 여 시주와 약혼녀가 영혼 공유라는 걸 했었다니, 그건 또 다른 운명을 만든 격이구나.”

“재능 습득을 위해서 한 편법일 뿐이고, 한두 시간 정도였습니다. 지속적인 건 아니었고요.”

“글쎄다. 영혼이란 게 네 말처럼 합쳤다 떼어냈다 할 수가 있다지만, 아무런 영향이 없을까? 요괴들이라면 어떨진 몰라도, 사람의 영혼은 또 다를 거다. 속세에서 흔히 쓰는 말 중에, 영혼의 동반자 어쩌고 하는 말이 있잖니. 사랑하는 부부간에 그리 부르던데, 그럼 그 동반이 깨져 이혼하면 아예 없던 일이 되냐?”

“음….”

“죽은 자의 영혼으로서 아진이란 시주가 네게 귀속되었다고 해도, 약혼녀는 그런 게 아니잖아. 순수한 영혼일 거 아니냐.”

“네, 그건 그렇습니다.”

“나도 처음 듣는 내용이라서 확신은 하지 못해. 그러나 인과율이란 건, 그것에 맞게 작용하거든. 단순히 재능을 받기 위해 그런 시도를 한 건 성급했던 게 아닐까 한다. 뭐, 이것도 너의 전생과 연관된 업보였을지도 모르지.”

“네….”

“너무 상심할 것까진 없어. 무슨 문제가 될지는 이 사부도 모른다. 그냥 노파심으로 해 본 말이다. 그리고 앞으로 어긋나지 않게 살면 얽힌 것도 풀릴 거야. 누가 보면 내가 너 야단친 줄 알겠다. 그 처자들이 지금 네 표정을 보면 날 원망하겠네.”

“하하, 아닙니다. 전생의 업보라면 감수해야 할 일이죠. 지금 미리 걱정한다고 달라질 것도 없는데요. 뭐.”

“이제 식당으로 가볼까? 처자들도 만나보고.”

“하하, 절에서 식당이라고 하니 이상하네요.”

“여기 오는 시주들도 많기에 식당처럼 꾸며 놓게 된 거야. 우리 절밥이 맛있다고 소문났다니까!”

장난스레 자랑하듯이 말한 노스님은 태월과 함께 방을 나섰다.

그냥 나가려던 태월의 품에, 부동산 등기부를 꼭 넣어주면서 말이다.

“안녕하세요. 신아진입니다.”

“안녕하세요? 스님 할아버지! 전 아나스타샤라고 해요. 아샤라고 부르시면 돼요.”

“허허, 이 처자들은 우리 절에 너무 자주 오면 안 되겠어. 땡중들의 염불 소리가 점점 줄어들겠어.”

“에구, 스승님도 참.”

“뭐가 에구야 에구긴? 저기 봐라! 오죽하면 도명이도 힐끗거리잖아.”

노스님의 지적에 식반을 챙기며 딴청부리던 도명스님이 화들짝 놀란다.

“아, 전 아니라고요. 눈에 날파리가 들어가서 찔끔거린 거라니까요?”

“소심하긴! 머라 안 할 테니 열심히 해. 부처님이 숲에 핀 꽃을 본다고 혼내진 않잖니?”

“맞, 맞습니다.”

“저 봐! 도명이가 힐끗거리며 본 게 맞잖아.”

뜨끔해진 도명스님은, 어린 스님 둘을 데리고 재빨리 좌판을 챙겨 배식받으러 가버렸다.

“두 처자가 인종이 다른데도 묘한 닮은 느낌이 드는 게, 아무래도 네가 말한 것과 연관이 있는 거 같구나.”

“저야 자주 같이 지내니 눈에 익숙해서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아니었나 보네요.”

“살다 보면 부부도 닮는다잖니. 네 말도 무관하진 않다. 자 이제 처자들도 발우공양 체험을 해 볼까?”

노스님이 식사를 시작하자, 태월과 아진 그리고 아샤도 수저를 들었다.

“네, 잘 먹겠습니다.”

“저 채소 많이 좋아해요. 향도 굉장히 상큼하고 식감이 아삭거려요.”

태월 일행의 식사가 끝이 나자, 후식을 겸해서 담소를 나누며 차를 마셨다.

“그런데 어제 지명이가 다녀갔어.”

“네? 도명스님의 같은 항렬 분이 계신가요?”

“아, 이름만 부르니 네가 헷갈렸나 보다. 황지명 말이야.”

“아, 스승님 아들분! 그런데 여길 왜요? 연락이 되었길래, 며칠 후에 찾아가려 했는데요?”

“급히 어딜 가야 한다면서 네게 넘길 물건을 가져왔더라. 전부 서적 같던데?”

“네. 그렇긴 한데 무슨 일이길래 그리 급했을까요?”

“말을 하진 않던데, 안색이 좋지 않았어. 혹시 넌 아는 게 없냐?”

“아, 설마!”

태월은 노스님에게 양해를 구하고, 급히 전화기를 꺼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