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사냥
태월은 설희의 말에 깜짝 놀라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의 말대로 알이 불에 달군 듯이 빨개져 있었다.
태월이 아루를 쳐다보자, 그녀는 방으로 들어가자고 손짓을 한다.
“무슨 일인지는 알아?”
“여기선 좀 그렇고 들어가서 이야기를 해.”
특별히 비밀이랄 건 없지만, 박승철과 조민희에게 설명하려면 복잡해지기 때문이다.
그 부부는 아직도 아루나 아카 그리고 아쿠를 사람으로 생각한다.
고개를 끄덕인 태월은 방으로 들어갔다.
“불새 아기는 저 상태로 하루는 더 가야 할 거 같아. 낼쯤 깨어날 거로 예측돼.”
“원래 저렇게 태어나나?”
“나도 그거까진 몰라. 생명의 기운이 그렇게 느껴져서 말한 것뿐이야.”
“그럼 이 방으로 알을 옮겨 놔야겠다. 괜히 문제 생기면 곤란하니.”
알은 신속하게 옮겨졌고 혹시나 몰라서 돌판 위에 놓아두었다.
마당으로 다시 나온 태월은 박승철에게 승마법 기초를 다시 가르치느라 한 시간 정도를 소요했다.
그 사이 음식 준비가 끝났는지 둘을 부르는 소리에 집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오우, 진수성찬이네? 요리를 셋이서 하니 빠르긴 빠르네.”
“넷이거든요? 보조를 무시하면 안 되죠!”
“억, 숫자를 잘못 셌어. 아이고 우리 딸 미안. 고생했어!”
설희의 장난에도 땀 흘리는 박승철이다.
남들은 식사 준비로 바쁠 때, 마당에서 승마나 배우고 있었으니 혼자 찔리는 그다.
거실에서 다 같이 모여 앉아 식사하는 모습은 굉장히 화목해 보였다.
“사흘 후 예정대로 알혼섬으로 가실 거죠?”
“호호, 당연한 소릴 하는구나. 네 아빠가 거길 얼마나 가보고 싶어 했는데. 이틀만 모스크바 관광을 하고 그 후 열흘간 그럴 생각이야.”
사실 박승철을 제외하곤 한 번씩은 다 알혼섬에 와봤었다.
TW의 자본과 건설 수주도 들어갔기에 조민희도 한 번 왔었고, 비록 그때는 그녀가 태월을 만나지 못했지만 말이다.
“그런데 너희 둘은 약혼만 하고 결혼은 언제 할 거니?”
조민희의 말에 태월과 아샤가 눈을 껌뻑였다.
둘은 결혼에 대한 생각을 앞서 해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나이도 아직 적어서 결혼이란 단어는 먼 훗날 이야기로 치부했었다.
“아니 저희 나이가 몇인데 벌써 결혼해요?”
“오빠가 한국 나이로는 22살이고 만으로도 20살인데? 더구나 아샤도 한국 나이로 하면 20살이야.”
설희가 중간에 끼어들어 설명을 해줬다.
“어머? 너희 나이가 그렇게밖에 안 되었니? 태월이는 하도 어릴 때부터 어른스러워서….”
조민희가 태월의 나이를 깜박할 리가 없다.
다만 이렇게라도 운을 띄워 놔야 염두에 둘 거 같아서 꺼낸 말이다.
이 시기의 한국 남자들 결혼 나이대가 30대인 걸 감안하면, 조민희의 이야긴 너무 이른 것이다.
그리고 박승철 부부는 아들과 몇 년간 떨어져 살고 있기에, 아쉬운 대로 손주들이라도 생기면 좋을 거 같아서다.
“흠흠, 약혼 시기에 아이 낳는 경우도 있던데. 상관없지 않나?”
박승철의 말에 아샤가 딴청을 부린다.
태월과 아샤가 종종 함께 잘 때도 있긴 하지만, 아진과 아샤가 같이 잘 때가 더 많다.
셋은 거기에 별달리 이상함을 느끼지 않고 있어서, 오히려 더 자연스럽고 불만을 가진 사람도 없다.
태월은 화제를 돌리려고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알혼섬 관광을 마치면 저도 한국에 잠시 들어갈 거예요. 아, 아진과 아샤도 들어가고요.”
태월은 한국에 가야 하는 이유를 박승철과 조민희에게 차근히 설명해줬다.
“여긴 의학부를 졸업하면 러시아에서 따로 시험을 안 보고도 면허가 나온단 소리지?”
“네, 그리고 해당 나라에서 자격인증을 받으려면 그 나라의 시험을 따로 봐야 해요.”
“하긴, 아샤는 몰라도 아진은 한국 국적이니 그게 필요하긴 하겠다.”
태월은 다음 날 같이 졸업한 알렉세이에게 전화를 걸어, 시일을 며칠 앞당기기로 했다.
사흘간 가족들의 모스크바 여행은 아샤와 아진이 책임지기로 했다.
아카는 미국의 일이 바쁜지라 바로 공항으로 향했고, 아쿠도 알혼섬으로 떠났다.
아루는 알의 상황을 지켜봐야 하기에 모스크바에 남기로 했다.
그래서 알렉세이를 만나러 가는 길엔 태월과 아루만 함께했다.
물론 아루의 품에 안겨진 고양이 모습의 아리랑도 함께했고.
“어서 오십시오. 마스터!”
“며칠 일찍 시작되어서 준비가 좀 부족하겠네?”
“아닙니다. 혹시나 몰라 졸업에 맞춰놨기 때문에 큰 문제는 없습니다. 완벽하진 못해도 90% 이상은 장담합니다.”
옆에 있는 미하엘이 고개를 끄덕여 알렉세이의 말에 공감을 표하고 있었다.
“데니스가 이 자리에 없는 걸 보니 현장 주변에 있단 소리군.”
“네, 만반의 준비를 마쳐놨습니다. 보리스는 생각도 못 하고 있을 겁니다. 최소 일 년 정도 후에나 덤비든가 포기하든가 할 거라는 예측을 했다더라고요.”
보리스는 알렉세이의 배다른 형이다.
형제라고는 둘밖에 없는 상황이지만, 어릴 때부터 사이는 좋지 않았다.
친모가 오래 살지 못하고 교통사고로 죽은 것도 보리스의 모친이 개입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증거를 찾지 못했었다.
그러나 어릴 때 술에 취해 아들 보리스와 이야길 나누던 것을 알렉세이는 우연히 들은 적이 있었다.
그때부터 엇나가기 시작했고 자신이 힘을 갖추게 되면 그 한을 풀려 했었다.
그 방식이 비인간적이고 옳지 못했지만, 이미 영혼이 바뀐 줄 아는 알렉세이를 태월은 벌을 주지 못했다.
대신 그에게 그 몸 자체가 저지른 범죄에 대해, 피해를 본 당사자나 가족들에게 물질적으로나마 돕게 했을 뿐이다.
“보리스의 오늘 일정이 어떻게 되지?”
“오전 11시에 아버지를 만나고 두 시간 후에 중간보스들과 어울려 사냥을 떠납니다.”
“사냥? 뭘 잡는데?”
“야생동물입니다. 불법적이긴 한데 곰 같은 걸 잡기도 하고요. 주로 잡는 건 사슴이나 멧돼지 그리고 새들이죠. 가끔은 눈에 거슬리는 사람을 처리하기 위해 그걸 이용하기도 하고요.”
보리스는 알렉세이보다 더 악질이었다.
평판도 좋지 않았지만, 첫째 아들이라는 이유로 넘어가기 십상이었다.
“음, 교통사고보다 그게 더 나을 것 같은데? 너도 봤지? 백호.”
“아, 그 백호도 데리고 왔습니까? 그, 그러면 그게 더 나을 것 같습니다. 교통사고는 아무래도 보이지 않는 시선에 드러날 수 있거든요. 자백할 사람도 구해놨지만, 사람 일이란 게 모르잖습니까? 돈에 매수되면 쉽게 등을 돌리기도 하니까요. 더구나 사냥 때는 흩어지니, 따로 일을 도모하기가 수월합니다.”
“그런데 내가 하려는 일은 보리스를 죽이는 게 아니야. 그의 영혼을 바꿔치기해서 참회시킨 후 종교에 귀의하게 하려는 거지.”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알렉세이가 정화되지 않은 영혼이었다면, 절대 응하지 않을 태월의 제안이다.
자신의 영혼이 알렉세이에게 들어왔다고 믿기에 저런 소릴 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냥 때는 자신의 강골부하들을 데리고 다닙니다. 같이 처리하기가 쉽죠.”
“그럼 그들 외엔 다른 부하들은 어떤데?”
“아버지가 따르라고 해서 따르는 것일 뿐, 그들은 대세가 기울면 저를 따를 것입니다.”
“그 아버지도 악당이고 정상적이지 않던데, 큰아들이 그렇게 된다고 해서 네가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나? 부자간에도 권력을 나누지 않으려는 그들이잖아.”
“다들 쉬쉬하지만, 아버지는 몇 년 못삽니다. 지병이 있거든요. 제 머릿속 기억으론 심장에 문제가 있는 걸로 나와요.”
고개를 끄덕인 태월은 알렉세이가 준비한 차량에 올라탔다.
태월은 한동안 바빠서 그와는 많은 대화를 나누진 못했었다.
그래서 그 집안 사정을 이제야 듣게 된 것이다.
악당들이 벌이는 싸움에 자신은 굳이 끼지 않으려 한 이유도 있었다.
그러나 이왕 필요악 중 하나를 써먹으려면 자신의 측근이 되는 게 나았다.
아쿠도 그걸 원하기도 했었고.
알렉세이는 조수석에 앉아 데니스와 통화를 하고 작전 변경을 알렸다.
그 후 차는 출발을 했다.
“사냥터로 바로 가는 건가?”
“네, 아직 시간 여유가 있습니다. 보리스의 측근과 중간보스들을 분리하는 함정을 팔 생각입니다.”
두 시간 정도를 가고서야 알렉세이가 말한 사냥터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여긴 사람들이 잘 오지 않는 곳인가 보군. 오면서 민가도 아예 안 보이고 말이야.”
“이 일대가 저희 패밀리의 땅입니다. 산지기 정도만 있을 뿐이죠.”
특별히 경관이 빼어나거나 하진 않았다.
깊은 숲속의 느낌만 전해줄 뿐이다.
알렉세이의 일행 차량들이 속속들이 들어왔다.
10대의 차량이 들어온 걸로 봐서는 최소 40명 이상이 집결했다는 의미다.
아직 데니스 쪽의 사람들이 오지 않았음에도 말이다.
“차량이 이렇게 많이 들어오면 흔적이 남지 않겠어?”
“아, 보리스가 주로 애용하는 길은 이쪽이 아닙니다. 동쪽 편의 강 쪽 길을 타고 올라오거든요. 그리고 이곳이 그들의 최종 목적지기도 하고요. 이 목적지에 도달해서야 저희를 발견하게 됩니다.”
“흠, 그럼 그렇게 알고 좀 쉬고 있으마. 준비가 다 되면 그때 부르도록 해.”
“네, 마스터!”
다들 밖으로 나가자, 태월은 작게 음악을 틀어놓고 아루와 휴식을 취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이십여 대의 차량이 들어오고 나갔다.
눈을 감고 음악감상을 하던 태월은 시간이 꽤 흘렀음을 느껴 눈을 떴다.
“어? 인제 보니 이 차만 빼고 차량은 전부 다른 곳으로 보냈네?”
“저쪽 뒤 숲에 숨기던데. 나무에 가려져 여기선 보이질 않아. 시간도 다 되어가는 것 같은데, 나도 준비를 할게.”
태월이 고개를 끄덕이자, 아루는 옷만 남기고 정령 본체로 돌아갔다.
“오? 아루도 조금 몸이 커졌는데?”
“호호, 그럼 내가 언제까지 숙녀일 줄 알았어? 어때 볼만하지?”
“풉, 불덩이인데 뭘 볼 게 있어?”
“흠, 나의 내면을 보란 말이야!”
태월은 아루의 말에 불 속을 잠시 쳐다보더니, 한마디 했다.
“불 속에 단단한 구체 같은 게 생긴 거 같네?”
“오, 이제 날 제대로 보는군.”
“그럼 그거 불알이네?”
“뭐?”
“불 속에 동그란 게 알처럼 뭉쳐 보이잖아. 그러니 불알이지!”
“어머나! 어떻게 숙녀에게 그런 비속어를?”
“이제 숙녀가 아니라며?”
아루를 놀리고 있던 참에, 멀리서 알렉세이가 허둥대며 다가오고 있는 게 태월의 눈에 들어왔다.
태월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차 문을 열고 나왔다.
알렉세이는 태월이 모습을 드러내자 급히 다가왔다.
“왜? 무슨 일이야?”
“좀 이상합니다. 아버지가 동행했어요.”
“심장이 나쁜 사람이 왜 여길 와? 사방에 총소리에 산짐승도 들끓는데.”
“보리스 쪽에 심어둔 자에게서 짧은 연락만 온 게 전부였습니다. 그도 신변에 위험이 다가온 듯하고요.”
“어떤 내용이었는데?”
“보리스가 아버지를 설득해서 이곳에 왔다는 내용이 전부입니다. 목적까지는 듣지 못하고 끊겼습니다. 아마 급박하게 무슨 일인가 벌어지고 있는 듯합니다. 전날까지도 예정에 없던 일입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인데?”
“미하엘과 상의했지만, 지금은 최악의 경우도 생각해야 합니다. 마스터는 일단 피하시는 게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