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나고야의 하루
태월과 키쿠리히메는 한 시간 정도를 대화 나누었다.
“부활과 은혜의 여신으론 이름값을 못 하는 상황이겠네. 현재 가능한 것은 약간의 작은 치유 능력이 전부고….”
“작은 거라뇨? 그 정도만 해도 다들 좋아한다고요. 너무 무시하는 거 아녀요?”
“그 정도면 무시해도 돼! 일단 중급신의 반열에 올라야 제대로 된 치유가 가능할 거고. 나아가 상급신은 되어야 부활이 된단 거잖아!”
“네, 뭐. 그렇죠.”
“상급신은 당장은 어렵지만, 중급신은 가능해. 인간에게 해를 끼치는 다른 잡신들을 잡아서 네게 줄 테니 흡수를 하도록 해. 정화는 시켜줄 테니 문제는 없을 거야.”
“어머! 정말요? 그럼 열심히 할게요. 뭐든지 시키세요! 밤에 시중이라도!”
“그건 됐거든?”
다방 마담처럼 구는 키쿠리히메에게 태월은 손을 내저었다.
태월이 방문을 나서자, 여우의 모습이던 키쿠리히메가 사람으로 변신해서 뒤를 따랐다.
2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발랄한 사회초년생의 모습이었다.
하급신쯤 되니 모습이야 자유자재겠지만.
“어이 요괴? 넌 누나에게 인사도 안 하냐?”
사토 유마의 계략에 자신이 걸렸다고 생각하니 말투가 불퉁해지는 키쿠리히메였다.
“인간 세상에 사는데 그 모습으로 누나 취급받으면 남들이 우릴 정상으로 볼까요?”
지지 않고 받아치는 사토 유마의 모습에 키쿠리히메가 인상을 찡그렸다.
“그럼 아가씨라고 불러! 그럼 되잖아! 요괴라서 그런지 융통성이 없네.”
“아, 네! 소쿠리 아가씨!”
“야! 키쿠리거든? 똑바로 안 해?”
키쿠리히메에서 히메는 일종의 존칭이다.
히메는 여성을 존중하는 서양의 레이디와 유사한 의미를 지닌다.
그리고 일본의 신들에게 붙이는 존칭도, 남신은 히코 여신은 히메라고 이름 끝에 붙인다.
투덕거리는 둘을 데리고 하쿠산을 빠져나온 태월은 뒤를 돌아봤다.
“신사에 말을 안 해주고 나와도 되나?”
“그걸 제가 일일이 말하고 다닌 적이 없어요. 심심할 때만 거기에 갔거든요.”
“어쩐지! 그러니 신도가 그리 적지요?”
“어쭈? 또 누님에게 덤비냐?”
“둘 다 시끄러워! 토리는 다음 목표지로 안내해. 가다가 적당한 곳 나오면 식사도 하고.”
“네, 마스터!”
“이 힝!”
태월은 키쿠리의 칭얼거림을 무시하고 차에 올랐다.
옆에 같이 타는 그녀를 보던 태월의 속마음은 어이가 없었다.
‘아니! 하급신이 왜 이래? 어디 불량품 아냐? 철없는 여동생 하나 추가된 기분이네.’
여신이라고 해서 정숙하고 근엄할 줄 알았더니, 예측불허의 사춘기 소녀 같았다.
사토 유마의 몸을 가진 토리는 차를 몰아 나고야로 향했다.
“어디로 가는 거야?”
“나고야의 아츠타 신사로 가고 있습니다.”
“거기도 하급신이 있나? 남신? 여신?”
“아, 거긴 검을 신으로 섬기고 있습니다.”
“헙. 일본에 그런 신들이 많다곤 하더니만, 나름 흥미롭군. 나쁘진 않겠어.”
아츠타 신궁이라고 불리는 이곳은 일본 왕실의 세 개의 신기 중 하나인 쿠사나기노츠루기 검을 최고의 신으로 숭배한다.
일본 최고의 신궁으로 평가받는 이세신궁 다음으로 유서 깊은 신궁이었다.
‘아츠타사마’ 혹은 ‘미야신궁’이라고도 불린다.
“매년 900만 명의 사람들이 새해 소원을 빌러 오는 곳이기도 합니다.”
“아, 괜히 그 사람들에게 미안해지는데?”
“오호호, 그거야 제가 흡수한 후 그 역할도 감당하면 같은 거 아닐까요?”
이론상으론 같긴 해도, 실제는 다르다.
태월은 키쿠리와 길게 대화해선 피곤할 듯해서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야마타노오로치라는 큰 뱀의 몸에서 나온 칼이라고 합니다. 머리와 꼬리가 여덟 개나 되며 몸집이 산보다 더 큰 뱀이라 전해집니다.”
“으아아, 나 뱀 싫은데!”
“참나, 뱀이 아니라 그 속에서 나온 칼이라잖아! 무슨 하급신이 이럴까?”
“저, 이건 일종의 애교거든요?”
“헐, 하나도 안 귀엽거든?”
“칫!”
새벽에 도착한 태월 일행은 료칸에서 잠을 청했다.
굳이 잠을 잘 필요가 없이 아침이 되기 전에 처리하려던 계획은, 키쿠리로 인해 연기되었다.
“아니, 무슨 목욕 재개가 새삼 필요하다고 저러는 걸까요?”
“어휴, 난들 아나. 좀 철부지 여신 같기만 하네. 원래 저런 걸까? 아니면 컨셉?”
태월은 학교에 시간을 유예받았고, 그걸로 인해 결석 시간만큼 방학 때에 보충해야 한다.
영웅 호칭으로 인해 그나마 가능한 학교 측의 배려였다.
그러기에 이러는 시간이 그에겐 낭비다.
아침에 일어난 태월은 식사를 마친 후 남는 시간에 관광을 즐길 수밖에 없었다.
관광객이 없는 시간에 처리해야 하니, 밤 10시까지는 프리타임이 된 것이다.
“나 옷부터 사야겠어요. 이 차림으론 눈에 너무 띄잖아요?”
태월이 생각해도 그렇긴 했다.
키쿠리의 옷은 그림 속 선녀나 입을 새하얀 드레스다.
그것도 현재 복식이 아닌 고전 복식으로.
그래서 그녀에게 엔화를 넉넉하게 건네주었다.
여성 옷가게로 향한 태월은, 점원에게 키쿠리가 입을 만한 옷을 추천해달라고 말을 해두곤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30분 후에 나온 키쿠리의 옷을 본 태월은 후회했다.
그전과 비교해 눈에 띄는 건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아니 무슨 18세 낭랑도 아니고! 무슨 옷을 그리 입어? 아니 입은 건 맞나?”
“아니? 이게 어때서요? 요즘 신주쿠에서 유행이라던데?”
키쿠리의 상의는 그럭저럭 봐줄 만했지만, 하의 치마는 짧아도 너무 짧아서 엉덩이 끝이 드러날 정도다.
“신도가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리 입으면 창피하지 않아? 여신이면 기품이 있어야지 않나?”
“어머, 너무 고지식하시다. 이건 유희잖아요! 다 이렇게 하면서 풀어야 긴 세월을 권태감 없이 보낼 수 있거든요? 아, 이래서 사물에 깃든 만물령은 신이 되어도 고지식하기만 하다니깐! 대리인이 그쯤은 알아야죠!”
태월의 문신 자체를 키쿠리는 만물령으로 생각했다.
그래도 태월을 그 만물령의 사도가 아닌 대리인으로 여겨주니 다행이긴 했다.
그리 생각하는 이유 중 하나가 문신에 귀속된 것이 아니라, 태월의 영혼에 귀속이 되었기 때문이다.
‘흠, 꼭 아루나 아쿠 같네. 다 같은 노출 마니아인가? 하긴 그들에겐 인간의 몸은 아바타 같은 거라 별 부담이 없긴 하겠네. 그러고 보니 아샤도 이상한 걸 따라 해서 큰일이네.’
아쿠와 아쿠와 오래 지내다 보니 그녀의 사고관도 그녀들과 많이 닮아가고 있다.
아진은 원래 자신의 육신이 아니라서 그런 거지만.
키쿠르와 다니다 보니 사람들 시선이 자주 쏠렸다.
그런데 일행 중 누구도 그것에 신경 쓰지 않았다.
태월은 그녀들과 다니며 많은 경험이 있다 보니 익숙한 것이고, 요괴인 토리에겐 시시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곳은 나고야를 대표하는 나고야성입니다. 오사카성, 구마모토성과 함께 일본 3대 고성에 속합니다. 또 이곳이 벚꽃 축제가 열리는 명소로도 유명하고요.”
“그래서 사람들이 더 많았던 거군.”
“오오오, 벚꽃 향이 나를 감싸네. 역시 한낱 꽃도 척 알아보고 나를 숭배하는군.”
꽃 하나를 따더니 향을 잠시 음미한 후 자신의 머리에 장식해보는 키쿠리다.
“키쿠리 아가씨? 잘 어울리네요? 종종 그런 컨셉인 분들이 있거든요.”
“호호호, 꽤 멋스러움을 아는 여자들이네.”
“네, 너무 미칠 정도로 멋스러웠지요.”
“.....?”
토리가 말하는 여자는 머리에 꽃을 꽂고 다니는 광녀 이야기다.
태월은 둘의 이야기에 피식 웃으며 주변 경관을 눈에 담았다.
한국의 벚꽃 축제와 그리 다를 건 없었다.
“여기저기 빈터들이 있는데?”
“2차 세계대전 때 대부분 건물이 파괴되었습니다. 천수각과 혼마루어전도 소실되었고요.”
키쿠리는 벚꽃 구경을 하면서도, 노점상들이 팔고 있는 음식들을 맛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태월이 그녀를 위해 현금을 줬는데 그걸 이참에 다 쓰려는 모양새다.
“그렇게 먹다간 점심을 먹기 어려울 건데? 배가 불러서 들어가겠어?”
“소 한 마리 정도도 먹어본 적이 있거든요?”
“헐, 그 배가 공간 가방이었네.”
“어? 그거 어찌 알아요? 나 그 가방 하나 있는데.”
손에든 작은 가방을 흔들어 보인다.
“어라? 하급신이 그런 걸 가지고 있다고?”
“원래 제가 가지고 있던 게 아니고요. 이름 없이 소멸한 신이 있었는데, 그 유적에서 발견했어요.”
“그 가방은 얼마나 들어가지?”
“소 3마리 정도요!”
대략 컨테이너 하나 정도의 분량이란 소리다.
태월이 가진 공간 배낭의 절반 크기였다.
“그런 배낭은 격이 어느 정도가 되어야 만들 수 있지?”
“상급신 중에서도 창조 특성이 있어야 할 거예요.”
“그런 신을 알고 있나?”
“당연히!”
“당연히?”
“없죠!”
기대를 품고 키쿠리를 쳐다보던 태월의 표정이 무방비로 풀려버렸다.
“아니 있었으면 제가 왜 유적을 뒤지고 다녔겠어요! 철거업체 직원도 아닌데.”
두 번째로 향한 곳은 나고야 TV타워였다.
1954년 180m 높이로 지어진 일본 최초의 전파 철탑이었다.
나고야 도심을 관통하는 도로인 히사야 오도리 중앙에 위치했다.
타워로서는 처음으로 국가등록 유형 문화재에 이름이 올라가 있다.
“오오, 시내 전체가 한눈에 보이다니, 인간의 가상함이 엿보이네. 야경이면 꽤 멋지겠어.”
엘리베이터를 타고 실내 전망대로 올라온 키쿠리가 내뱉는 말이다.
이상한 말을 덧붙일 것 같아서 태월은 일행이 아닌 척 거리를 뒀다.
귀를 닫고 나고야의 전경을 눈에 담으며 나름 시간을 즐겼다.
마지막 세 번째는 오스칸논이었다.
오스 지역을 대표하는 랜드마크로 관세음보살을 모시는 불교사원이다.
이곳엔 고대 일본의 신화와 사적을 기록한 ‘고사기’의 가장 오래된 사본을 비롯해 다수의 고서적이 소장돼있다.
그리고 18일과 28일에 골동품 위주의 다양한 잡화를 판매하는 벼룩시장도 열린다.
“우와! 뭔 비둘기가 이렇게 많아! 다들 토실토실하네. 차라리 닭을 이렇게 키울 것이지!”
“키쿠리? 살살 말해. 다들 쳐다보잖아.”
“에이, 유희잖아요! 유희! 아휴, 알았어요. 조용히 할게요. 메~.”
태월이 지그시 쳐다보자 혀를 살짝 내밀며 억지로 수긍을 한다.
그러더니 비둘기가 모인 곳으로 뛰어가 새들을 놀라게 하고 있다.
-후다다다다! 파다다닥!
비둘기들이 일제히 날아가는 건 장관이긴 하지만, 괜한 소란이기도 했기에 태월은 고개를 흔들 뿐이다.
“풉! 꼬시다!”
토리가 점잖은 모습으로 있다가 애들 같은 말투를 내뱉었다.
어리바리한 비둘기 한 마리가 놀란 상태에서 날아오른다는 게, 키쿠리의 치마 속으로 뛰어든 것이다.
주변 관광객들도 소리 없이 웃느라 난리였다.
인상을 찡그린 키쿠리의 표정에 토리가 잽싸게 다가가 그녀를 데리고 왔다.
괜한 사고를 쳐서는 곤란한 것이다.
“키쿠리 아가씨! 저기 벼룩시장으로 가죠? 거기 눈요기할 게 많을 거예요.”
“에이씨, 알았어. 한 번 봐주도록 하지.”
태월도 함께 그곳으로 이동했는데, 사람들이 꽤 많았다.
“주워 온 물건 같은 것도 있고, 집에 있던 것들도 가지고 나왔네. 옛날 카메라에 목상들도 있고, 거기에 질그릇들도 보이고.”
태월은 인사동과 황학동을 섞어 놓은 듯한 곳에 온 기분을 느끼며 노점을 지나치고 있었다.
“어? 저게 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