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일본을 향한 발걸음
결국 그날 일로 인해 태월은, 조민희의 집중 공격에 간이 약혼식까지 치르게 되었다.
하객 초청 없는 순수한 가족들만 모인 약혼식이었고, 아샤의 위치만 바뀌었을 뿐 다른 변화는 없었다.
아들의 지인에서 예비 며느리로.
“아들? 아진하고는 뭐 문제가 있어?”
“네? 아니요. 잘 지내고 있는데요?”
박승태는 뭐가 아쉬운지 태월에게 몇 마디 더 조용히 건네더니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무슨 내기를 걸었다더니, 그게 뭐길래 저러실까? 아빠도 참….’
1월 중순이 되자 태월 일행은 러시아로 다시 건너갔다.
그리고 학교생활은 다시 시작되었다.
“뭐? 새롬기술을 팔았다고요? 벌써?”
“아들은 요즘 TW에 너무 무관심한 거 아니야? 아카의 인공지능 슈퍼컴이 도출한 날짜대로 팔았어. 우리가 적극적으로 뛰어들다 보니 예상 매도 시기가 보름이나 재조정된 거야. 3월에 매도할 걸 2월 말에 팔게 된 거거든. 그런데 수익이 너무 커서 좀 걱정이다. 너무 언론에 드러나 버렸어.”
“어느 정도길래요?”
“우리로 인해 원래 파이보다 두 배 이상 커져 버렸는데도, 무려 100배가 넘는 수익이야.”
“헐! 황당하네요.”
슈퍼컴 예측 최대 자본을 5조 정도로 보던 새롬기술에, TW와 RAON이 개입하자 규모가 10조를 넘겨 버렸다.
정점의 90%가 넘는 선에서 털어버린 두 기업이다.
그런데도 장세는 며칠간 더 유지되었다.
그렇게 잘나가던 새롬기술은 회사 내 운영권 싸움이 벌어지면서, 한 달 후 하강 곡선을 그리더니 폭락하기 시작했다.
두둑한 자금을 보유하게 된 TW는 공격적으로 사업을 확장해나갔다.
외국기업에 팔리려는 국내 기업들을, 아카의 정보를 바탕으로 흡수하기 시작한 것이다.
IMF로 휘청대는 한국을 노다지 금밭으로 보고 덤벼들던 외국기업들은, TW의 빠른 정보 앞에 늘 선수를 뺏겨버렸다.
3월 18일 중화민국(대만) 총통 선거에서 처음으로 야당의 후보인 천수이볜이 당선되었다.
그리고 3월 26일은 BATR 기업에게도 뜻깊은 날이었다.
블라디미르 푸틴이 러시아 대통령선거에서 당선이 된 것이다.
예정된 일이었지만 기업에 미치는 영향은 달랐다.
사전 작업의 결과로 BATR를, 해외투자자들의 롤모델로 러시아 정부에서 홍보하고 있었다.
경제개혁을 위해 달러가 필요했던 러시아 중앙정부는, 외국자본 유치에 적합한 기업으로 BATR가 이상적이긴 했다.
몇 년 전부터 패닉에 빠졌던 러시아 기업들을 인수해온 BATR는, 러시아 국민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고 있었다.
회사 규모는 단순히 알혼섬 관광에 그치지 않고, 사업 종목을 대거 확장하여 과거보단 10배나 더 규모가 커진 상태다.
러시아 기업순위 2위라는 막강한 파워를 가지게 된 것이다.
다국적 기업이긴 해도 표면상으론 러시아 기업이기 때문에 띄워주기도 적합했다.
러시아의 훈장도 아쿠는 3번이나 받았고, BATR 기업에도 수여되었다.
“러시아 연방 영웅? 종류도 참 다양하네.”
“영웅 칭호 중 하나야. 저번에 받은 노동 적기훈장과는 다른 의미지.”
소련 영웅 칭호가 소련이 해체되며 사라졌고, 러시아로 거듭나면서 이름이 바뀌어 부활한 것이다.
레닌 훈장이 없어진 이후, 러시아 최고의 칭호이기도 했다.
“너야 받아도 이상하진 않지만 난 왜 이걸 받는데? 이거 무공훈장 아니었어?”
“분야와 관계없이 최고라고 판단하면 주는 거야. 이건 외국인도 포함되거든! 비슷한 게 사회주의 노동 영웅 칭호인데, 그건 러시아인에게만 줄 수 있어. 그리고 영웅 칭호는 훈장보단 더 격이 높은 거야. 금성 메달과 함께 주어지거든.”
금성 메달은 순도 95%의 금으로 제작되었다.
“아, 이거 혹시 소비에트 연방 영웅을 계승한 그 훈장 아냐?”
“맞아! 원래는 무공훈장이었는데, 중간에 다른 분야 사람들도 받았어. 하다못해 1964년엔 우주에 간 의사인 보리스 예고로프도 받고, 그전엔 북극 탐험가이자 과학자인 오토 시미트도 받은 거거든?”
“거절하면 문제 되려나?”
“괜히 잘나가는 BATR에 찬물 끼얹고 싶어? 그냥 받아. 그들도 예외 적용해서 특별히 선심을 쓰는 거잖아.”
“아, 이거 한국 국정원에 괜히 밉보이는 거 아냐? 한국 가기 겁나네.”
1999년 1월 20일까지는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였다가, 현재는 국가정보원(국정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후훗, 현재 한국이 러시아를 깔볼 그런 위치는 아니잖아? 영웅 칭호를 가진 사람을 핍박하는 게 드러나면, 오히려 국정원이 도마 위에 오를 거야. 신경 안 써도 돼!”
결국 아쿠와 아카 그리고 태월이 그 칭호를 받게 되었다.
아카가 바쁜 상황임에도 일부러 와서 받는 걸 보면, 사업적인 물밑작업도 있었으리라 여겼다.
태월도 자세히 알려 하지 않았는데, 자신이 없어도 잘 굴러가기에 굳이 관여할 이유가 없어서다.
***
방학을 보름 앞둔 5월 14일, 오부치 게이조 일본 총리가 뇌경색으로 사망했다.
“일본에 영향력을 키울 수 있는 좋은 계기긴 한데, 우리가 오히려 역풍을 맞을 수도 있어. 그리고 뇌경색이면 소생시킨다고 해도, 정상으로 돌아온다고 장담은 못 해.”
“4월 1일에 이미 혼수상태에 빠져서, 수상의 직위는 모리 요시로가 계승했잖아. 조금 아쉬운 감이 있지만, 그에게는 국민들의 지지가 있어. 기회는 아직 남아있단 소리야.”
1998년 7월 내각이 발족할 당시, 총리 오부치 게이조에 대한 일본 국민들의 시선은 싸늘했다.
오부치가 그동안 맡은 관직이 관방장관과 외무장관이 고작일 뿐, 경제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일본의 침체한 경제를 살릴 수 있는 총리를 원했던 탓에 그런 시선은 어쩔 수 없었다.
3일이면 오래 간다는 소리도 들리고, ‘식은 피자’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까지 얻었다.
그러나 자민당 출신 오부치는 그런 부정적 시선을 뒤집으며, 취임 1년 만에 지지율 50%가 넘는 반전을 일으켰다.
강력한 경제 회생 정책을 펼쳐, 최악의 위기에 빠졌던 일본 경제를 끌어올려 살아나게 했다.
그런 그는 휴식을 모르는 평소 습관으로 인해 건강 관리에 소홀했었다.
그러다 연립정권을 이루고 있던 자유당의 연정 탈퇴로 큰 스트레스를 받아 뇌경색이 생겨난 것이다.
“사토 유마를 오부치의 정치적 배경으로 융화시킬 좋은 기회잖아?”
사토 유마는 마음을 읽는 요괴였던 토리의 분신이며, 현재 일본의 중의원으로 있다.
“흠, 그렇긴 하네. 이번엔 수업을 빼먹어야 하나? 방학이 얼마 안 남았는데. 그리고 아진과 아샤는?”
“태월만 가면 되잖아! 아진과 아샤는 방학 후에 지겹게 붙어 있을 건데 뭘 그래.”
늘 같이 있다 보니 이젠 한 몸처럼 여겨져서, 태월의 입에서 저절로 둘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아쿠의 표정으로 봐선 태월이 수긍할 때까지 종용할 기세였다.
“아쿠답지 않네? 너 혹시 아카에게 사주받았냐?”
“그, 그게 뭐가 중요해? 어쩔 거야? 일본의 일에는 너무 무관심했잖아.”
“사주받은 게 맞네. 뭐, 어쨌든, 우리에게 유리한 일이니 가도록 할게. 그런데 시간이 없지 않나? 24시간 내로 가능해?”
“호호! 걱정하지 마시라! 특별기가 준비되어 있거든? 그리고 오부치의 시신에 접근하는 것은 사토 유마가 맡아주기로 했어! 그리고 비자도 다 되어 있고!”
“끄응! 결국 미리 결론을 다 내어놓고 나에게 그런 거네. 에고, 알았다 간다 가!”
결국 태월은 모스크바 공항에 준비된 특별기를 타고서 홀로 일본으로 날아가게 되었다.
공항에 도착해 출국장을 나서자, 오랜만에 보는 토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마스터! 어서 오십시오. 정말 오랜만에 뵙습니다.”
사토 유마 뒤에 있던 보좌관들도 태월에게 고개를 90도로 숙였다.
“토리 그만해! 이제 너도 사회적 지위가 있잖아. 남들 보기 전에 빨리 이동하자!”
“네. 그럼 앞장서겠습니다.”
사토 유마가 앞으로 나서자 보좌관들이 태월을 호위하면 걸었다.
태월이 그들의 면면을 그제야 살피게 되었는데, 그들은 고베 대지진 당시 태월에 의해 소생되었던 자들이었다.
태월이 마련된 차를 타자, 뒷좌석에 같이 앉은 사토 유마가 상황을 설명했다.
“자민당 쪽에 저희 사람이 있습니다. 그에게 연락해서 20분 정도를 할당받았습니다. 지금 사망한 지 15시간이 지나고 있습니다.”
“그래! 수고했어. 바로 출발하도록 해!”
운전대를 잡은 보좌관이 차를 출발시켰다.
1시간 정도를 지나서야 목적지에 도착했는데, 또 다른 무리들이 그들을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마스터! 그리고 사토 유마 의원님!”
“아, 그대도 낯이 익네! 이쪽 사람이었군.”
“마스터! 기억해 주셔서 영광입니다!”
“하하, 미안하네. 이름까진 모른다네.”
“그 정도만 해도 충분합니다. 시간이 없으니 저를 따라오십시오.”
자민당 중간 간부라는 그 남자의 뒤를 따라 조용히 이동했다.
아직 정식으로 빈소를 차리지 않은 건 이 남자의 솜씨였다.
영안실 같은 곳에 도착한 태월은, 오부치 게이조의 시신과 마주하게 되었다.
“흠, 다행히 영혼이 다른 데로 가지 않았어. 이제 시작하지?”
태월의 말에 주변에 있던 자들이 입구 밖으로 나가며 통제를 시작했다.
태월은 왼손을 뻗었다.
영혼만 회수하여 소생하려던 생각을 바꿔 시신까지도 삼키기로 한 것이다.
육신에 뇌경색이 진행된 상태기에 그걸 해소하려는 생각에서다.
처음 시도하는 뇌경색이기에 결과는 태월도 자신할 수 없었다.
-슈아악!
시신마저 삼켜버린 문신은, 생각보다 조금 더 시간을 끌더니 시신과 영혼을 뱉어내었다.
-우웨엑! 털썩!
‘15분씩이나 걸리는 건 드문 일인데. 그만큼 필요했단 소리겠지? 결과가 나쁘진 않겠어.’
태월은 정화된 영혼 구슬을 시신의 입에 물렸다.
그런데 밖이 조금 소란스러웠다.
시계를 보니 약속했던 20분이 다 되어 있었다.
옆에 있던 사토 유마에게 고개를 끄덕이자, 비상문을 열어 태월이 빠져나갈 수 있게 해주었다.
“오늘 저녁에 오부치 게이조가 찾을 것입니다.”
“그래, 미리 소생 교육을 해두도록 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한두 번 한 것도 아닌데요. 완벽하게 해두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태월은 비상문을 나섰다.
사토 유마는 앞문으로 다가가, 살며시 잠긴 문을 해제하며 노크를 두 번 했다.
그러자 소생자인 자민당 간부가 제일 먼저 들어와서 시신을 살핀다.
“아! 역시 마스터님이시다!”
손으로 호흡을 체크하고 심장의 박동을 확인한 그는 밖을 향해 소리쳤다.
“이봐! 오부치 총리님이 깨어나셨다. 돌아가신 게 아니었어! 기사회생하셨어!”
그 소리에 방문이 거칠게 열리며 새로운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뭐? 뭐라고? 살아나셨다고?”
“무슨 헛소리야!”
5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믿지 못하겠단 표정으로 그 남자를 노려보았다.
망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어이? 뭘 째려봐?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확인을 해보란 말이야! 의사부터 불러!”
들어왔던 남자 중 둘이 급히 시신을 확인한다.
“으악!”
“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