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한국에서
새로운 밀레니엄인 2000년이 1년 남았다.
1999년의 시작을 가족과 보내려 했지만, 모스크바에서의 일이 안 끝나 이틀 늦게 온 것이다.
“하하, 벌에 쏘였지. 시간 지나면 가라앉을 거야.”
“네? 겨울에 웬 벌이?”
“크큭, 관장님 지인이 양봉하는데. 거기 혹시 꿀이 있는지 보려고 열었다가, 자던 벌들이 깨어나면서 공격을 했어요.”
옆에 있던 김 사범이 끼어들었다.
“크흠, 그냥 궁금해서 열어봤다니까!”
“에이, 제가 옆에 있었잖아요. 괜히 부끄러우셔서.”
“김 사범? 자네 왜 교육하다 말고 딴짓하나?”
아들과 딸 앞에서 무안해진 관장 박승철은 사범에게 트집을 잡아본다.
“학생들 휴식 시간을 잠시 활용 중입니다. 아이들이 여기 분들과 사진을 찍고 싶어 해서요. 그렇지요, 여러분?”
“네! 맞아요!”
아이들이 합창한다.
“보셨죠? 이렇다는데요?”
“아샤와 아진은 어때?”
설희가 작은 아빠인 박승철의 면을 살려주려고 먼저 나섰다.
둘이 거부 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설희가 태월을 돌아본다.
“오빠? 이 정도는 뭐 상관없을 거 같은데?”
“뭐, 다들 그렇다면야.”
태월이 어깨를 으쓱이며 찬성을 표하자, 아이들이 환호를 질렀다.
“와! 나 연예인이랑 사진 찍는다!”
“와아아! 난 엘프 누나 옆에 설 거야.”
“난 이쪽 누나!”
결국 세 여자와 아이들 12명이 사진을 찍었고, 관장과 사범까지 함께한 17명의 단체 사진도 추가했다.
도장 홍보용으로는, 여자 셋이 도복으로 갈아입고 포즈를 취했다.
당연히 태월은 카메라맨이 되었고.
“아들 수고했다. 이제 만으로 20살이지?”
“에이, 또 엉터리 계산하셨네요. 양력으론 올해 10월 5일이 지나야, 만 20세거든요. 우리나라 계산법으론 지금이 21살인 거고요.”
“에이, 성년식도 못 챙겨줬네!”
“요즘 누가 성년식을 해요? 오늘 일요일이기도 하니, 이제 홍대 집을 다녀올게요. 엄마는 낼 뵈러 따로 오고요.”
“그래, 가서 맛난 거 많이 먹고 낼 보자. 그런데 아들?”
“네?”
박승철이 가까이 오더니, 귓속말을 태월에게 한다.
“저기 둘 중 누가 여친이냐? 아들 능력 굉장한데?”
“헐, 그런 거 없어요. 그냥 가족인걸요.”
“에이, 첨엔 다 그런 거야. 하여간 잘해봐라.”
“......”
박승철은 아들 태월의 등을 토닥이며 응원을 보냈다.
태월의 시큰둥한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넷은 태권도장을 나와 홍대로 향했다.
벌써 집안에선 참기름 냄새가 온 사방에 진동했다.
“엄마!”
“호호, 어서 와 아들! 이젠 완전히 어른이 다됐네. 아픈 데는 없고?”
현관문만 열은 상태인데 벌써 반가운 인사가 오간다.
“제가 아플 일이 뭐 있긴 하겠어요? 아 참, 인사들 드려!”
현관문 밖에 있던 둘이 하나씩 들어오며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두 번째 뵙네요. 잘 계셨지요?”
“처음 뵙겠습니다. 신아진입니다.”
“어머머, 눈앞이 환해지네. 아샤야 원체 미인이라 그런가 하지만, 새로운 동양 미녀의 출현이네? 왜들 이렇게 이쁜 거야?”
“감사합니다. 어머님도 굉장히 미인이세요.”
“전보다 더 이뻐지셨는데요?”
“어머, 너희 예절 학원이라도 다니니? 어른을 막 띄우는 건 어디서 배웠을까?”
인사가 길어질 듯하여 태월이 껴들었다.
“아니 웬 음식을 이렇게 많이 해놨어요? 힘들었겠어요. 이 정도까지는 필요 없는데.”
“호호호, 아들이 온다는데 그럼 이만큼은 해야지. 그리고 나 별로 힘 안 들었어! 아줌마가 절반쯤 해주고 갔거든! 딸! 너 편한 옷 좀 찾아서 주도록 해. 자 다들 가볍게 손만 씻고 앉아요.”
“엄마? 옷은 따로 가져왔어요.”
“등에 멘 배낭이 옷 가방인가 보네?”
태월의 등짝을 보며 갸웃거리는 홍미연이다.
“뭐 잡다한 게 많이 들어있긴 해요.”
배낭에서 옷을 꺼내 아진과 아샤에게 주는 태월이다.
설희가 안내해준 손님방에서 둘은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어머! 이거 굉장히 이쁜 트레이닝복인데? 어디 브랜드야?”
“하하, 제가 무늬 없는 옷에다가 그림을 그린 거예요. 괜찮나 보죠?”
“뭐랄까? 입은 사람이 건강해 보이고 매력이 넘쳐 보여.”
“흠, 그런 효능을 집어넣긴 했어요. 활력과 매력요. 엄마 거랑 설희 거도 가져왔으니, 이따 보세요.”
“오! 우리 아들의 수제품이네? 호호호.”
식탁에 다들 앉아 저녁 식사를 시작하였다.
“너 하반기엔 본과 4학년이지?”
“아니요. 본과 5학년이 돼요.”
“어? 내가 잘못 안 건가?”
“원래 월반은 없는데. 저와 아진이가 공동 1등을 쭉 해오고, 교수들을 앞지르는 분야도 있다 보니 그리됐어요. 특별한 경우긴 해요. 그걸 마무리 짓느라, 이틀 늦게 서울에 온 거예요.”
“그럼 1년 반만 있으면 졸업?”
“네, 의대가 조기 졸업이 되지 않는 학과라서 그나마 줄인 게 1년인 거죠.”
“난 지금도 아들이 그림 쪽으로 안 가고, 의대 간 게 신기하긴 해. 뭐, 이유야 알긴 하지만.”
“그림은 굳이 학교까지 다닐 필요는 없어서요. 지금도 시간이 날 때 틈틈이 그리거든요.”
“오빠가 그림을 벌써 36개나 그려놨어요. 전시회를 해도 될 정도예요.”
아샤가 나서서 태월을 거들었다.
“오! 진짜 많이 그렸네?”
“제가 특별하게 취미활동 하는 게 그거밖엔 없잖아요.”
“미국에서 전시회를 한번 하지? 아니면 그 베니스에서 하든가.”
“지금은 바빠서 안 되고요. 졸업 후에나 하려고요.”
태월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주는 홍미연이다.
“김치가 아주 맛있네요? 이거 갈 때 좀 싸 가야겠어요.”
“응? 비행기 타는데 괜찮겠어?”
“하하, 조금 후에 알려드릴게요.”
1시간에 걸친 식사 시간이 끝나고, 치우는 시간은 30분밖에 안 걸렸다.
다섯이서 치우니 금방이다.
“자, 이건 엄마 거, 그리고 설희 거!”
“오! 진짜, 트레이닝 디자인이 쌈박하다.”
“호호호, 이거 산책할 때마다 입고 나가야겠어. 명품 느낌인데? 아들 이거 공장 생산도 가능하나?”
“음, 연료를 잘 선택해야겠지만, 효능은 절반쯤? 그런데 그건 왜요?”
“어머, 그게 가능하단 거지? 그럼 엄마가 명품회사를 만들어도 될까? 기존명품과 전혀 다른, 인간을 위한 명품 브랜드를 만드는 거야.”
“아, 나쁘진 않네요. 그런데 제가 요즘 시간이 없으니, 소형 공장에서 샘플 정도만 만들어 볼게요. 1년 반 정도는 연구 기간도 필요하잖아요.”
“호호! 그럼 그럼 당연하지! 브랜드 이름도 생각해야 하고, 로고도 만들어야 하는데.”
홍미연은 새로운 도전에 의욕을 내세웠다.
아들과 관련된 일이 될 테니, 더욱 그런 것이다.
“그리고 이건 러시아에서 산 유럽 식자재예요.”
태월이 배낭에서 꺼내기 시작한 통조림류와 햄 그리고 각종 소스.
해산물에다가 육포까지 나왔다.
거의 과일 상자만 한 게 15박스다.
“어? 그 작은 배낭에서 이렇게 많이 나온다고? 이게 무슨 일이니?”
“음, 그냥 마법 가방이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내부에 공간이 확장돼있거든요.”
“응? 그 무슨 황당한 이야기야?”
태월은 결국 일본에서 있었던 일들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어머, 우리 아들이 신을 소멸시킬 정도야?”
“음, 그게 하급신이에요. 뭐 중급이나 상급도 아니고요. 그 덕분에 제 문신이 중급신의 격을 가지게 되었네요.”
“그거참, 태어날 땐 너에게 그 문신이 분명 없었는데. 어떻게 생긴 건지 알 수가 없구나.”
“압구정 엄마도 모른다고 하더라고요. 갑자기 생겨난 건가 봐요.”
“하여간 저 마법 가방인지 공간 확장 가방인지는, 굉장한 보물이구나. 산소통이 있어야겠지만, 사람까지도 가능하다니….”
“상급신의 물건이니 그럴 수 있긴 하죠. 아직 중급신도 보진 못했지만.”
태월은 일요일 하루를 묵고, 다음 날 조민희를 만나러 갔다.
“아들! 홍대서는 잘 먹고 왔어?”
“하하, 네. 아주 잘 먹었어요. 잠시요, 인사시켜드릴 사람이 있어요.”
태월의 뒤를 따라 아진과 아샤가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어머니!”
“처음 뵙겠습니다. 신아진입니다.”
“어머, 아샤 잘 왔어. 아진은 남편에게 듣긴 했지만, 진짜 미인이네? 오느라고 다들 고생했어. 이리로 앉도록 해.”
비서가 내온 차를 마신 태월은, TW 기업의 진행 상황을 설명 들었다.
“결국 은행 두 개 중 하나는 인수했네요. 잘되었어요. 그리고 1월 1일부로 유로화가 도입되었다니, 달러나 엔화만큼 신경 쓰셔야 할 거예요.”
“응, 아카가 보내온 상세자료들이 도움이 컸어. 어디서 그런 복덩이가 다 나왔다니?”
“AI 슈퍼컴 성능이 대단해서죠. 인공위성도 있으니 방대할 거고요.”
아카의 인공위성 기술은, 자체 기술에 러시아의 기술이 합쳐졌다.
그 덕에 최첨단 인공위성을 만들게 되었다.
인공위성 기술에 2억 5천 달러의 자본까지 더해지니, 우주용 로봇 원천기술을 보유한 업체도 매입해 버렸다.
그 여파로 두 개의 회사를 추가로 설립하였는데, RAON SPACE와 RAON ROBO다.
우주항공업체와 로봇회사를 만든 것이다.
우주용 로봇 기술을 가지고, 원자력 로봇과 해양 로봇 등의 첨단 로봇 기술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더불어 AI 인공지능 로봇까지도.
“인공위성에 AI를 탑재할 생각을 하고 있어요. 그러면 효용성이 몇 배로 올라가고, 자체 복구도 가능해지죠. 폐기되어 우주 공간을 떠도는 인공위성이 상당히 많거든요.”
“어머, 그거 비싼 재료들로 구성했을 건데 아깝네.”
“더 발전하면 그것들은 재활용할 방법이 생길 거예요. 실제로 온갖 전자 장비가 멀쩡해도, 궤도나 자세를 바꾸기 위한 연료가 소진되면 폐기돼요.”
“허허벌판에 주유소가 없어서 멈춰 선 자동차들이네?”
“그래서 RAON에서 AI 우주 주유소를 계획하고 있어요. 저게 개발되면 폐기된 인공위성의 쓰레기 처리 비용도 받을 수 있죠. 또 기존 인공위성의 연료 공급 수익. 향후 쏘아 올릴 인공위성에 대한, 유지관리 비용도 엄청난 이익으로 돌아오게 되죠.”
“RAON이 NASA의 기술을 앞지르게 되겠네?”
“흐, 일부 기술은 이미 앞질렀어요. 그리고 우주 주유소를 만들 방법이 없었죠. 그래서 지금까지 인류는, 연료가 다 된 인공위성을 폐기하는 방법을 택한 거죠. 앞으로는 다들 RAON SPACE에 의존할 수밖에 없을 거예요.”
RAON의 전망을 들은 조민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TW도 규모는 다섯 배 이상 불어났어. 방송국에 은행 그리고 부동산. IMF라서 다들 휘청대고 있잖아. 외국기업이 장난쳐서 헐값으로 만들어 놓으면, 우리가 정보력을 바탕으로 선수를 쳐버렸거든. 호호호, 다들 약이 올라 있을 거야. 거저먹으려 경우 없이 덤비니, 결국 TW에게만 좋은 일 시켜주는 꼴이지.”
“자금이 부족하진 않고요?”
“부족할 리가 있나? BATR와 RAON 자금이 있으니 주머니가 빵빵해. 지금 TW가 한국에선 기업순위 8위야. 이대로 승승장구한다면 5위 안착도 가능할걸?”
“대기업들도 휘청대는 상황이니, 경쟁자는 적겠네요.”
“아예 없지는 않지만, 출혈경쟁 자체가 없으니 그게 더 좋아. 우리가 덤비면 다들 물러서거든. 현금 동원력이 우리가 선두잖니.”
“더 빠르게 가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