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SVR 안가의 벙커
호리호리한 체형에 체크 무늬 정장을 입은 사내가 앞차에서 내리더니, 태월의 차 쪽으로 걸어왔다.
“오늘 같은 걸 두 번 보네.”
-똑똑!
태월은 차창을 아래로 내렸다.
“무슨 일이죠? 차를 위험하게 앞뒤로 막아서다니?”
“하하, 그게 위험한 게 아니라, 무면허 운전이 더 위험한 거 아닙니까? 면허증을 줘보세요.”
태월은 황당했다.
‘차를 막아선 이유가 운전면허 때문이라니.’
사실 태월은 무면허가 맞다.
러시아의 사회적 분위기나 경제가 어수선한 상태였고, 경찰들도 고급 외제차량에 대해 제재를 하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껏 한 번도 면허증 제시를 받은 적이 없기에, 경각심을 가지지 않고 있었다.
며칠만 지나면 한국 나이로 19살이긴 하지만, 아직 한국 운전면허도 따지 못할 나이다.
또한 러시아는 만 18세부터 운전면허 취득 자격이 주어진다.
“밀리치야라도 되는 건가요? 신분증부터 보여주시죠?”
밀리치야는 구소련 때부터 존재하던 러시아 경찰인데, 아직도 이들이 치안을 담당하고 있다.
1917년에 조직된 밀리치야의 단어 뜻은 민병대인데, 내정부 산하 조직으로 자리 잡은 경찰조직이다.
“밀리치야는 아니지만, 그들과 같은 권한 정도는 가지고 있지.”
“그래요? 그럼 그 권한을 가진 신분증을 봅시다. 아무나 경찰 권한이라고 하면 믿어줘야 하는 세상인가요?”
니콜라이는 태월과 이야길 하면서도 차 안을 훑고 있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일행 한 분이 안 보이는군요? 어디로 간 거죠? 그럼 잠시 대기하세요.”
니콜라이는 태월의 차를 막아선 뒤쪽 차를 향해, 수신호를 보내고 있다.
뒤쪽 차량에서 경찰 제복을 입은 남자가 걸어 나왔다.
“여기, 무면허 소지자가 있으니 조사를 해봐야지 않겠어?”
“흠 흠, 그래야지요. 전 밀리치야로서 당신에게 면허증 제시를 요구합니다.”
그는 태월에게 경찰신분증을 내밀며 고개를 까딱이고 있었다.
“알리사? 내정부 차관 블라디미르에게 연락을 해봐! 일행까지 감시하면서 표적 수사당하는 중이라고.”
블라디미르는 내정부 소속의 차관이다.
그는 칭기즈칸의 무덤과 관련하여, 러시아 정부의 대표 자격으로 BATR를 방문했던 고위 인사다.
태월의 말에 그 경찰은 뜨끔했는지, 뒤를 돌아본다.
앞차에서 내렸던 니콜라이가 앞으로 나섰다.
진행 상황이 생각과 달라 마땅찮았는지, 차 안을 훑어보며 이죽거렸다.
“무면허라는데 뭘 차관을 거론해? 면허증을 제시하든가, 그게 아니면 당장 내려! 대체 이 위대한 러시아를 뭐로 생각하고 있는 거야. 외국인이라고 봐줄 거로 생각했어? 너희는 노동자들의 피를 빨아먹는 흡혈귀들이야!”
니콜라이는 자신의 말에 격앙되었는지, 과하게 흥분하며 눈알을 번들거렸다.
‘이 자식 대체 누구지? 광기가 보이네.’
그때 아쿠가 전화기를 들어 막 전화를 걸려던 때였다.
“그 전화를 거는 순간 이렇게 될 거야. 전화기 내려놔!”
그는 품속에 있던 총을 꺼내 태월에게 들이밀었다.
총까지 등장하자, 앞차에 있던 사내들도 전부 내리더니 합세했다.
“하하, 모스크바 중심에서 이런 일을 벌이다니! 미친 거 아닌가?”
“여기 주차장은 사각지대야. 그러게 제대로 살피고 다녔어야지. 위대한 러시아를 위한 작전이다. 다들 이것들 압송해!”
태월은 이들을 제압할 자신은 있었다.
아카나 아쿠가 힘을 보탤 테니 말이다.
그러나 문제는 아샤와 아진이다.
제압하다가 실수로 발사된 총알에 크게 다칠 수도 있었다.
죽어도 살릴 수야 있지만, 내부 장기의 부상이 심하면 그것도 문제가 된다.
‘그런데 이것들 정체가 대체 뭐지? 러시아 마피아라도 되나? 아니면 의뢰받은 용병팀? 경찰도 매수할 정도면, 단순한 범죄조직은 아닌 거 같은데.’
태월은 총이 겨눠진 상태서 할 게 그리 없는지라, 기회를 엿보기로 했다.
또한 정체를 알아야 했기에, 그들에게 협조하는 척하는 게 나을 거라 여겼다.
텔레파시로 아카와 아쿠에게 내용을 전달했다.
아카가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들은 태월을 조수석에 앉히고 그중 하나가 운전대를 잡았다.
또 다른 두 명이 뒷좌석에 합승하더니, 총구는 태월 일행에게 향하게 했다.
앞 차량이 출발하자 두 번째로 태월의 승합차가 움직였다.
30분 정도를 더 가자, 한적한 주택가가 나왔다.
그중 붉은색 대문이 있는 오래된 2층 저택으로 차량이 들어섰다.
그리고 태월 일행은 낯선 저택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손은 전부 뒤로 묶였다.
저택 안에는 6명이 있었고, 태월과 함께 온 인원을 더하면 총 12명이나 되었다.
태월이 생각하지 못한 적이, 6명이나 더 있는 것이다.
“저들 옷에 숨긴 무기가 있는지 확인해봐.”
세 명이 나서서 태월 일행의 몸을 수색했다.
그런데 간단히 수색하는 두 명에 비해서, 한 명은 과했다.
옷만 더듬으면 될 일을 손까지 넣어보며, 아진과 아샤의 몸을 희롱했다.
“야! 말대가리! 거기 손 안 떼? 위대한 러시아 어쩌고 하더니 하는 짓은 양아치냐?”
태월의 호통에 다른 일을 지시하던 니콜라이의 고개가 획 돌아갔다.
“이반? 너, 지금 위대한 러시아를 시궁창에 넣고 있었냐? 야! 저 새끼 3호실에 가둬!”
“헉, 죄, 죄송합니다. 이 여자들이 속에 뭘 감춘 거 같기에 확실하게 하느라고.”
“익! 말대가리! 우리가 속에 뭘 감춰! 우린 속옷도 안 입었거든!”
막내 아샤가 핏대를 올리고 있었다.
“야! 저놈 빨리 치워버려!”
“팀, 팀장님! 제, 제발 3호실만은….”
3호실이 뭔가 특별했는지, 이반이란 자는 벌벌 떨었다.
“참, 위대하기도 하네.”
빈정거리는 태월에게 다가간 니콜라이는, 발로 태월의 복부를 걷어찼다.
-쿠다당!
앉아 있던 의자와 함께, 태월이 뒤로 넘어지며 뒹굴었다.
“야! 입 다물지 그래? 어린놈의 새끼가 세상 무서운 줄 몰라. 여기가 한국인 줄 알아? 너희 에프에쓰베와 무슨 작당을 하고 나온 거지? 그리고 RAON 여회장은 어디로 빼돌린 거야?”
FSB를 말하는 순간 태월은 그가 어디 소속인지 알았다.
“너희 에쓰베에르구나. 그리고 넌 그 미친개라는 작자인가 보네?”
“크하하! 미친개? 그래, 오늘은 너희가 미친개에게 잡힌 거야. 에프에쓰베가 나를 가볍게 봤군. 미친개라면 이 정도까지도 할 수 있다는 걸 알았어야지. 쯔, 그것들은 너무 물러 터졌어.”
넘어져 널브러져 있는 태월을 그들은 다시 자리에 앉혔다.
“그 여회장은 어디로 갔지? 설마 그쪽에 벌써 협조하기로 했나?”
“너희 정보력으로 알아보지 그래?”
아직도 날 선 반항기를 보이는 태월을 보며, 니콜라이가 피식 웃는다.
“아까 3호실을 궁금해하던 눈치던데? 여자들을 교대로 3호실에 잠시 넣어둘까 하는데 말이야. 거기에 뭐가 있는지 궁금하지?”
“안 궁금한데?”
“크크크, 아닌 척하긴. 거기엔 말이지. 발정제를 섞어 사료를 먹인, 독일 군용견 셰퍼드가 3마리 있거든. 지금, 발정 나서 남녀를 안 가릴 정도지. 어때? 여자들 걱정은 안 되나?”
“비열한 놈! 위대한 러시아 좋아하네.”
“조국을 위해서인데 내가 받는 비난 정도는, 그게 뭐든 더한 것도 감수한다네. 우선 본보기가 있어야겠지? 에릭! 거기 왼쪽 두 명을 3호실로 데려가!”
태월은 이대로는 문제가 커질 듯하여 서두르기로 했다.
‘아카! 아루! 본체로 변신해 저들을 쓰러뜨려.
그래도 소생시켜야 하니, 장기는 다치게 하지 말고!’
텔레파시를 접한 그녀들은 그 순간 사라졌다.
옷만 남기고 그들의 눈앞에서 없어진 것이다.
“헉! 여, 여자 둘이!”
“이, 이게 무슨 일이야!”
갑자기 허공에서 물이 솟아나며 사방으로 휘돌았다,
동시에 허공에서 빛의 화살들이 쏟아졌다.
물방울들은 그들의 코와 입을 틀어막았고, 빛의 화살은 그들의 다리를 공격했다.
“컥! 끄아악!”
-쿠당탕! 쿵!
“우웁! 크읔!”
-탕탕! 탕탕탕!
그들 몇몇은 목표도 없이 권총을 쏘아댔다.
혼란의 와중에 태월은, 아샤와 아진을 쇼파 뒤로 밀어 넣었다.
-탕탕!
“크윽!”
마구 난사되는 총탄 속에 둘의 안전을 챙기느라, 태월의 몸이 노출된 것이다.
태월의 왼쪽 어깨가 불에 지진 듯 화끈거렸다.
‘으, 군대도 간 적 없는데, 총알맛을 보다니.’
태월은 근처에 질식해 쓰러진 자에게서 권총을 낚아채고, 아직도 버티는 일부에게 총을 쏘았다.
재능의 보정을 받은 사격 솜씨는 완벽하진 못해도, 두 방이면 적의 허벅지를 맞출 수 있었다.
그래 봤자 8발을 쏘고 나니 빈총이 되어 버렸지만.
그 덕에 서 있는 적은 남아 있지 않았다.
“어? 그 미친개가 사라졌네! 아카? 아쿠? 그 미친개를 찾아!”
‘알았어! 그런데 어깨 괜찮아? 피에 젖었는데?’
“음, 그냥 관통상이야. 다행히 뼈는 다치지 않았더라고. 응급치료는 바로 할 테니 걱정하지 말고 다녀오도록 해.”
‘오케이! 그놈 꼭 찾아낼게.’
태월은 아카와 아쿠가 이동하자, 쓰러진 자들을 확실히 질식사시키며 다녔다.
그리고 그들을 다시 소생시켜버렸다.
20분간 새로운 영혼으로 다시 태어났음을 주지시켰으며, 충성의 대상을 바꿔버렸다.
‘아, 거짓말을 하다 보면, 어떨 땐 진짜 같아서 내가 착각한다니까.’
“에릭이라 했나? 넌 구급상자를 찾아서 가져오도록 해! 그리고 두드닉은 내 차로 가서, 트렁크에 있는 내 옷 가방을 찾아 가져와!”
“네, 마스터!”
“네, 다녀오겠습니다.”
바닥에 떨어져 있던 변신 가면을 회수해 품에 넣었다.
“오빠! 정말 괜찮은 거야?”
“너 상처를 보면 이제 알잖아. 단순한 관통상이야. 본과 2학년 실습 때 몇 번 봤지? 큰 후유증은 없어.”
“오빠! 나도 할 줄 알아. 나도 도울게.”
에릭이 돌아오자, 아진과 아샤는 태월의 상의를 벗긴 후 어깨를 소독하고 붕대를 감았다.
그럴 즈음 아카와 아쿠가 돌아왔다.
‘그놈 벙커에 숨어있기에 질식사시켰어.’
“벙커? 이런 주택에도 그런 게 있나? 일단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
아카와 아샤가 인간 본체로 몸을 바꾼 후 옷을 걸쳤다.
“벙커는 문이 열려있어?”
“안에서는 열리더라고. 변신해서 일단 열어놨어.”
고개를 끄덕인 태월은 그녀들을 따라서 지하로 내려갔다.
“흠, 벙커라 부를 만하네. 콘크리트 두께가 1m에 철판 두께가 30cm는 되겠어. 그런데 왜 이런 게 여기에 필요하지?”
고개를 갸웃거린 태월은 그녀들과 함께 벙커 안을 조사해나갔다.
벙커라고 해봤자, 20평 정도의 공간이었다.
“서류들하고 컴퓨터 한 대가 전부인데? 그 외는 무기들과 식량들뿐이야. 이 미친개를 소생시켜봐야 자세히 알겠군. 그 전에 이놈 때문에 식겁했는데 벌은 줘야겠지?”
태월은 미친개 니콜라이를 소생시켰다.
같은 소생 교육을 반복시킨 후, 그를 3호실에 밀어 넣었다.
“영혼이 새롭게 태어나긴 했지만, 그 육신은 죄가 커서 벌을 받아야겠지?”
“마스터! 당연합니다. 몸이 지은 죄는 몸에 벌을 줘야지요.”
니콜라이도 자신의 육체가 행한 일을 기억해냈다.
“새 삶을 위한 과정이라 여기고 감내하도록 해!”
“네! 마스터.”
3호실에 원래 갇혀 있던 이반으로는 모자랐는지, 니콜라이가 들어오자 셰퍼드들은 또 달려들었다.
-끄아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