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신의 재능을 삼켜라-119화 (119/250)

119화. 1997년 12월의 위기

4명의 남자가 엎어져서 꿈틀대고 있었다.

“아샤?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어? 오빠! 치한들 혼내는 중이야. 둘은 내가 나머진 아리랑이 콱!”

아샤야 재능과 호흡법으로 인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지만, 호랑이도 아니고 고양이 몸으로 성인 남자 둘을 제압한 아리랑이 특이했다.

“저 덩치로 그게 된다고?”

“호호, 아리랑이 소리 한 번 지르니 꼼짝 못하더라고. 끼하학! 한 번 했더니, 몸이 굳으면서 뻗던데? 그중 둘은 정신 차리며 비틀대기에 내가 팍팍 날려줬지.”

호랑이의 울음에 동물들이 기가 죽거나 몸이 굳는 이유는 그 속에 깃든 초저주파 때문이다.

그 초저주파에 살기를 실어 날리니, 성인 남성도 견디지 못한 것이다.

“외상은 없어 보이니 그나마 다행이네. 가능하면 손을 쓰진 말아. 피곤한 일은 안 만드는 게 낫잖아. 이만 들어가자!”

“응, 심하게는 안 했어. 그냥 빨리 뻗게 했을 뿐. 아리랑? 이제 가자.”

태월은 아리랑이 단순한 애완묘가 아니라, 아샤의 경호원 역할도 톡톡히 하는 것 같아서 든든했다.

그해 12월은 태월이 모스크바 대학교 기초의학과 본과 2학년 재학 중이고, 한국에서는 사상 초유의 경제위기가 발생한 때였다.

태월은 지금 한국 나이로 19살이다.

1997년 11월 21일 한국의 경제부총리가 특별 기자 회견을 했다.

나랏빚이 총 1,500억 달러가 넘고, 외환보유고는 고작 40억 달러에 미치지 못했다.

대한민국 정부가 국제 통화 기금(IMF)에, 자금 지원요청을 공식적으로 결정한 것이다.

이 발표가 난 지 3일 후 월요일 코스피 지수는, 34.79포인트(7.17%)가 떨어지며 10년 전 수준으로 되돌아갔다.

12월 3일에 현대판 경술국치인 IMF 구제금용 합의문에 서명하고, 콜금리 연 25%라는 이면각서까지 쓰게 된 정부다.

이 서명에는 대통령과 대통령 후보 전원이 서명해야 하는 신뢰가 요구되었다.

그러나 얼마 후 대통령 후보의 재협상 발언이 터져 나오며, 글로벌 신용평가사에서 일제히 국가 신용의 강등 조치를 해버렸다.

그로 인해 12월 23일, 한국은 금융 시장에서 패닉 상황을 맞게 되었다.

경제는 신뢰라는 교훈을 달게 받게 된 한국이다.

그 일로 아카와 아쿠가 모스크바를 방문한 상태다.

“아카? 한 달 전 예측대로 되어가네? 중간에 틀어막을 수 있는 일인데도 너무 안일하게 처신했어. 이거 정부 자체에 문제가 있단 거네?”

“일개 기업이 막을 수 있는 일은 아니지. 이제 해외 기업들이 승냥이처럼 달려들 거야. 해외로 빠져나갈 바엔 TW에서 인수하도록 해. 한국의 기업들과 부동산들이 폭락할 거야. 달러와 원자재 그리고 귀금속은 폭등할 거고.”

“RAON에서 한 달간 차입해놓은 달러가 꽤 되지?”

한국 정부가 이 당시 당장 필요한 자금은 300억 달러 정도였다.

“RAON의 보유 달러는 차입금 포함하여 총 50억 달러긴 한데, 절반이 단기성이야. 단기성은 주요 원자재에 투자할 거야. 중장기 대금만 일단 한국으로 향하게 할게. 그게 낫다고 봐.”

“아카 언니 말에 나도 동의해. TW기업에서 진행 중인 알혼섬의 BATR Bridge 대금과 그 외 건설대금을 전부 달러로 해서 전액 지급하도록 할게. 우리 자본도 넣어야 할까?”

“일단 투자 형식으로 RAON과 BATR의 여유 자본을 전부 TW로 넘겨! 해외 기업이 아닌 국내 기업이 인수해야, 국민 정서에도 문제가 되지 않을 거야.”

태월의 말에 아쿠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생각 난 듯 한마디 보탰다.

“그러잖아도 사토 유마에게서 연락이 왔어. BATR 일본 현지 법인의 자금을 달러로 바꿨다는데, 들어오면 그것도 꽤 클 거야.”

한국 정부에서 미국과 일본에 도움을 요청했으나, 두 국가는 미지근한 반응만 보였다.

그래서 일본 쪽에 있는 토리가 움직인 것이다.

토리, 즉 사토 유마는 중의원 선거에서 40%의 지지를 받아 당선되었다.

일본 정계에 진출 중이긴 하지만, 여전히 BATR 일본 현지 법인에 관여하고 있었다.

“TW가 한국 재계의 10위권 안에 쉽게 안착하겠군. AI 슈퍼컴퓨터가 가동 중이니, 국내외 정보를 계속 보내줄게. 1월 초에 은행 매각이 있을 거야. 외국자본이 덤벼들 테니, 이참에 그중 하나를 매입하도록 해.”

“알았어. TW에 자료를 넘겨줘.”

“러시아도 지금 상황이 아주 좋지 않아. 태국에서 시작된 동남아 금융위기가 인도네시아로 확산하였잖아. 그 때문에 외국인 투자자의 신흥시장에 대한, 투자심리 불안이 고조되었어. 두 달간 빠져나간 돈만 50억 달러야.”

“그럼 어떤 상황이 오게 될까? 예측은?”

“슈퍼컴의 예측으론 내년 여름경에 루블화 표시 외채에 대해, 모라토리엄을 선언할 수도 있다고 나와.”

모라토리엄(지불유예)은 국가나 지자체가 외부에서 빌린 돈에 대해, 일방적으로 만기에 상환을 미루는 행위를 뜻한다.

“수출의 70%를 차지하는 원자재 하락으로 무역수지 흑자가 급감한 원인도 한몫했네?”

“그렇지. 거기다가 재정적자의 누적과 단기부채의 급증으로 악화일로에 있는 거야. 내년 단기국채 상환 도래분이 2,500억 루블이야. 이건 올해 러시아 GDP의 9%를 초과하는 금액이지.”

GDP(국내총생산)는 한 나라의 영역 내에서 가계, 기업, 정부 등 모든 경제주체가 일정 기간 생산한 재화 및 서비스의 부가가치를 시장가격으로 평가하여 합산한 것이다.

여기에는 비거주자가 제공한 노동, 자본 등 생산요소에 의하여 창출된 것도 포함되어있다.

“모라토리엄이 선언되면 러시아 정부가 휘청하겠는데? 우리에게 미칠 영향은?”

“지급유예선언이 되면 루블화가 평가절하되거든. 그럼 러시아 국내 은행들이 도산 위기에 놓이지. 지금 달러당 6.4루블인데, 16루블 정도로 절하가 되리라 예측돼.”

“허, 2.5배 평가절하가 되네. 우리야 알혼섬 자체 경제를 달러화로 받고 있어서 문제는 덜하지만, 그래도 그 여파로 국내 관광객은 급감하겠네.”

“보유하고 있는 루블은 빠르게 소진시켜야 해. 그리고 러시아가 안정될 때까진, 루블은 보유하지 않도록 해. 가지고 있을수록 적자를 만드는 일이야.”

“보유 루블 처리는 국내에서 반입되는 모든 물품 비용으로 해야겠네. 그리고 하락한 러시아 원자재는 보유 루블로 전부 사들여야겠어.”

“좋은 생각이야. 내년에 루블화 평가절하가 된다면, 그로 인해 물가가 폭등할 거야. 그리고 지방정부도 파산 날 가능성도 커. 중앙정부의 지원을 받지 못하기 때문이지. 아마 지방에선 가치가 폭락한 루블 거래 대신에 물물교환이 성행하게 될 거야.”

한국에 이어 러시아도 잠재적 위험 상황에 놓인 1997년 12월이다.

“큰 테두리 안건은 이게 끝이네. 세세한 건 나눠서 임원들에게 넘기자고. 늦었지만, 이제 식사하러 갈까?”

“그러잖아도 아샤와 아진이 식사 준비 끝났다고 30분 전에 연락이 왔었어. 아카 언니! 바로 가자.”

토요일 오후 7시, 아샤와 아진이 집에 있는 상태다.

전날에 도착해서 이미 숙식을 했던 터라, 새삼스러울 건 없다.

그러나 오늘은 우리가 아는 달력으론 크리스마스이브였다.

러시아에서는 크리스마스 주간을 스뱌뜨끼라고 부르는데, 12월 25일부터 다음 해 1월 5일까지다.

스뱌뜨끼는 러시아의 가장 인기 있는 명절 중 하나다.

그런데 러시아 정교회의 달력이 서방국가와는 다르다.

러시아 정교회에서의 크리스마스는, 서방 달력으론 1월 7일이 된다.

그리고 스뱌뜨끼는 1월 16일에 끝난다.

즉, 지금은 러시아에서 성탄절이 아니다.

아파트에 도착해 문을 여니, 성탄송이 흘러나오고 크리스마스트리가 반짝거렸다.

러시아의 성탄절 날짜와는 다르긴 해도, 태월의 아파트는 한국식에 따른다.

기독교인이 아니고 교회도 다니지 않지만, 크리스마스는 명절처럼 여기는 태월이다.

“언니들 어서 와요.”

모자에 고깔을 쓴 아샤가 고개를 내민다.

아진은 식탁에 음식을 차리느라 분주하다.

다 함께 돕자 식탁은 금방 채워졌다.

소고기와 각종 채소를 토마토소스에 졸여낸 찹스테이크.

부드럽고 담백한 연어 스테이크에, 매콤하면서 허브의 풍미와 올리브오일의 향미가 더해진 타르타르소스.

쫄깃하고 탱탱해 보이는 랍스타 버터구이.

해산물과 육류를 주재료 한 모둠 튀김.

살이 오동통한 홍합찜.

빵이나 크래커 위에 여러 재료를 올려 먹는 참치 카나페.

딸기에 생크림을 짜서 초콜릿으로 눈을 만든 딸기 산타.

과일로 만든 꼬치.

음료와 주류 역할을 할 뱅쇼와 샹그리아.

초코 산타와 딸기가 올려진 생크림 케이크.

“우와, 둘이서 이렇게 많이 준비했다니, 고생이 너무 많았겠는데?”

“호호, 주재료는 어제 손질해놨었고요. 오늘은 두 시간 동안 완성을 시킨 거예요.”

“자 메리 크리스마스! 그리고 수고한 아진과 아샤에게도 축복을!”

“오빠 언니들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축복을!”

-끼 야옹!

“어! 우리 아리랑에도 축복을!”

풍성한 저녁 만찬을 즐기며 서로의 일상생활을 이야기하였다.

만찬 중간중간에 걸려오는 가족과의 통화로 바쁜 태월과 수다에 빠진 여인네들의 풍경이 함께 그려졌다.

그렇게 그날 밤은 포근하게 지나갔다.

“태월, 여기 아파트에 걸린 그림이 아주 마음에 드는데? 크지 않아도 되니, 미국에 가져가게 하나만 그려줘!”

거실 벽면에 걸린 그림은 태월이 작년 겨울 방학 때, 잠시 시간을 내어 그린 그림이다.

화폭에는 태월을 포함해 아카, 아루, 아쿠, 아진, 아샤, 라리사, 안드레이, 토리가 함께 있는 그림이었다.

바이칼호를 배경으로 유람선 위에 그들이 있는 100호짜리 그림이었다.

보고 있노라면, 행복한 마음이 솟아오르고 몸에 활력이 돌게 하는 효능이 있다.

“음, 낮엔 모스크바 관광을 하기로 했으니, 저녁에 그려줄게. 우리 전부가 들어간 인물화로 해줄게. 캔버스 사이즈는 100호로.”

인물화 100호 사이즈는 162.2*130.3, 풍경화 100호보다 세로 폭이 18.2cm가 더 크다.

영령인 아카에게 그림의 효능은 성장에도 도움을 줄 것이다.

“아, 틈틈이 그려서 한국으로 보내긴 했는데, 지금 생각하니 아카에겐 신경을 많이 못 썼네. 괜히 미안한데?”

“호호호, 그래서 내게 제일 큰 그림을 그려주려고 한 거구나?”

“크큭, 맞아. 인물화 100호는 처음 그리는 거야. 시내 관광 가는 길에 캔버스를 사 와야 해. 집엔 풍경화 규격밖에 없거든.”

아카는 뭐든 똑 부러지게 알아서 하는지라, 믿고 지내다 보니 오히려 소홀해진 것이다.

모스크바 시내는 주말이라 사람들은 많았고 활기찼다.

아카의 예측대로 이곳 모스크바도 내년 여름이 되면, 시내 거리마다 노숙자들의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아직은 밝은 시민들이지만 그때가 되면, 어두운 표정으로 마이너스 에너지를 만들고 있을 것이다.

“어? 시위하는 사람들도 있네?”

“피켓 내용이 나토에 대한 반발인데?”

냉전 시절 소련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만들어진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의 영역이, 1997년을 기점으로 확장하려는 분위기였다.

-끼이익!

“헙! 옆 차가 우리를 가로막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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