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새끼 백호 아리랑
태월이 손으로 가리킨 건 족자였다.
“아, 저 족자가 필요하면 드리지요. 외국에서 망명 온 그 남자가 가져왔던 것인데, 이상하게 떠날 땐 가져가지 않았더라고요. 좀 많이 낡았지요? 그래도 혹여 다시 찾으러 올까 봐, 버리지 않고 놔뒀던 겁니다.”
사실 이 집엔 가구들 외엔 일반적인 생활제품들은 남아 있지 않았다.
그나마 남은 게 저 족자 같았다.
그냥 그려진 그림들로 보면 특이할 건 없었다.
숲에 오두막이 한 채 있고, 빈 개집이 마당에 있는 게 전부였다.
풍경화라고 해야 할지, 사람이나 동물은 보이지 않았다.
단지 오두막에 문이 보이지 않았다.
집을 그릴 때 앞을 그리지, 뒷면을 그리지 않는다.
그런 거로 볼 때, 저 오두막은 문이 없는 것이다.
5만 불로 매매계약을 한 번에 해치운 태월은, 전 집주인과 중개인이 나가자 족자 앞으로 갔다.
“어이! 거기 숨어있지 말고 나오는 게 어때?”
“오빠? 누가 있어?”
“여기 족자에 몸을 숨긴 존재가 있어. 문신에서도 계속 신호를 보내고 있었고. 이 집을 사게 된 이유 중에 그것도 포함돼 있지. 아진은 뒤로 잠시 물러서 있어.”
“네, 조심하세요.”
아진이 뒤로 물러가자, 태월은 문신에 의지를 전했다.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다는 건, 좋은 의도를 가지지 않은 것이겠지. 원망하지 마라! 이젠 옛날의 도깨비가 아니지. 족자를 삼켜버려!”
-슈 아악! 꿀꺽! 컥! 끼 아 악!
신격을 가진 문신으로 바뀐지라, 웬만한 악령이나 요괴 정도는 상대가 되지 못한다.
숨어있던 누군가도 그걸 생각지 못했던 듯, 저항할 사이도 없이 삼켜졌다.
나이 든 여자의 놀란 비명이 들려왔고, 삼켜지는 순간에 어렴풋이 노파의 모습도 눈에 비쳤다.
“뭐지? 웬 노파야. 족자의 기운이 시커멓던데, 정체가 뭐지?”
상황이 순식간에 끝나자, 아진도 호기심이 일었는지 태월 옆으로 다가왔다.
“사라질 때 빗자루와 절구가 보이던데, 그게 그 노파의 상징 아닐까요?”
태월은 공간 배낭에 넣어두었던 요괴 도감을 꺼내 살펴보았다.
새로운 내용을 찾아낼 때마다 적어둔 거라, 초창기보단 1.5배는 두터워져 있었다.
5분 정도 만에 그 특징에 가까운 존재를 찾아냈다.
“바바야가(Baba Yaga)? 슬라브 신화에 나오는 막가파 마녀네? 그 문도 없는 오두막은 자신의 집이었나?”
요괴 도감에 적힌 기록엔 바바야가를 이렇게 기술하고 있었다.
슬라브 신화에 나오는 요괴로, 기형적이고 흉포한 마녀인데 뼈다리 바바야가라 불린다.
절구를 타고 다니며 빗자루로 흔적은 지운다.
깊은 숲 오두막에 살며 야생동물과 유대를 맺고, 불가사의하고 모호한 악당이라고.
도감을 더 살피던 중에 문신이 꿈틀거렸다.
-우웩! 쿵!
“헉! 이게 뭐야?”
“이거 그 절구잖아요.”
절구가 뒤집힌 상태로, 아파트 거실에 나타난 것이다.
“아, 놀라라. 아니 이런 걸 왜 뱉어? 족자의 그림 속에 절구가 없었는데.”
“오두막도 삼켜졌으니, 그 속에 있었던 게 아닐까요? 마지막에 잠깐 비쳤었잖아요.”
태월이 절구를 흔들어 보니, 옆으로 누이는 정도는 가능할 거 같았다.
“부적도 하나 붙여져 있네요?”
태월의 시야에 잡히지 않은 반대편에 부적이 붙어 있었다.
“어? 봉인부잖아? 이건 고대 모산파 건데, 왜 여기에 있지?”
태월은 자료용으로 쓰려고 부적을 떼어냈는데, 그게 불타오르며 재로 변했다.
“헐, 고대 자료 하나가 사라졌네. 뭐 문양은 기억하고 있으니, 나중에 재현해보면 알겠지.”
담요 하나를 꺼내 절구 옆 바닥에 깔았다.
절구를 양손으로 잡고 앞으로 당기니, 서서히 넘어오며 안전하게 안착했다.
“어머? 하얀 고양이예요. 잠을 자나 봐요.”
“절구 안에 있는 잠든 고양이라니? 야생동물과 친한 마녀라는데, 왜 이런 봉인을 해놨던 거지? 말썽이라도 피웠나?”
태월이 고양이를 자세히 살피는데, 단순하게 잠든 게 아니라 가사 상태였다.
그리고 배에 또 다른 부적이 보였다.
“흠, 이 부적이 고양이를 가사 상태로 만든 거군. 아깝지만 문양 기억만 하고 떼야겠네.”
부적을 떼어내니 역시나 불타며 사라진다.
그래도 고양이의 반응이 없기에, 태월은 영혼 에너지를 고양이 몸에 넣으려 했다.
-꿀꺽!
“헛, 나 원 참. 부적 떼어주니 잽싸게 삼키냐? 신격을 가진 문신도 저 부적을 제거 못 했단 소린가? 그렇게 강력해?”
“저항도 못 하고 사라진 마녀로 볼 때 그런 건 아닐 거 같아요. 어쩌면 저 고양이를 안전하게 살리려 한 게 아닐까요? 부적과 함께 붙어 있으니, 동시에 소멸할 수 있잖아요.”
-우 웅!
태월의 팔에서 진동음이 들렸다.
“헐, 이거 아진의 말에 문신이 호응한 거 같은데? 그 고양이가 특별한 존재라도 되나?”
5분도 안 걸려 문신이 다신 꿈틀댔다.
-우웩! 툭!
“어머, 너, 너무 귀여운 새끼고양이가 됐어요. 눈을 뜨려고 해요.”
아가 고양이가 눈을 뜨더니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그러다 태월과 눈이 마주치자, 가까이 다가와 머리를 비벼댄다.
태월은 고양이를 두 손으로 감싸 안았다.
“너도 혹시 요괴냐? 변신도 가능해? 내 말 알아듣지? 변신해봐!”
늑대 족의 경우가 생각나서 말해본 것이다.
바닥에 내려놓으니, 고양이가 한 바퀴 재주를 넘었다.
-휘 리릭! 커 흥!
“어? 이거 백호 새끼 맞죠? 하얀 호랑이네요.”
“어라, 얘는 사람으론 변신 안 되네? 늑대 족들과 방식이 다른가?”
태월은 갸웃거리며, 호랑이의 이곳저곳을 살폈다.
‘주인님! 여긴 어디죠? 그 마녀는 어디 갔나요?’
“헐, 너 텔레파시는 그래도 되는구나? 마녀는 소멸시켰어. 왜? 살렸어야 했나?”
‘아니요. 잘 죽었네요. 자고 있는데. 절 몰래 기습해서 봉인해버린 거거든요.’
“너와 그 마녀에 대해서 말해봐. 왜 여기 절구에 갇혀 있던 거야?”
‘고구려가 망하고 발해가 생겼을 때, 백두산에서 내려와 무리를 이끌고 더 북쪽으로 이동을 했어요. 그래서 새로운 터전을 잡고 지내고 있었는데, 그 바바야가라는 마녀가 나타난 거죠. 저와 며칠간 싸우더니 도망을 가더라고요. 그래서 완전히 떠난 줄 알고 안심했는데, 자다가 봉변을 당했네요.’
발해가 생겼던 시기라면 1300년 전의 일이다.
“헐, 너 그럼 1,300년간 저기에서 잠들어 있었던 거네?”
‘헉, 그렇게 세월이 오래 지났다고요? 아, 동족들은 다 사라졌겠네요.’
“백두산 호랑이든 시베리아 호랑이든 이젠 보기 드물어. 아예 없진 않지만…. 너 그런데 왜 호랑이가 아니고, 고양이 몸으로 있었어?”
‘그 시대에 호랑이로 다니면, 사람들이 놀라 다 도망갔거든요. 뭐, 신수로 모셔져, 식량을 바치러 오는 사람들도 있긴 했지만요. 그리고 먹이가 부족할 땐 고양이로 있어야 유지하기 쉬웠어요. 그러다 보니 이젠 고양이 상태가 더 편해요.’
“하긴 호랑이도 고양잇과긴 하지. 그럼 넌 요괴가 아니라 신수였구나. 그런데 너 이름은 없냐? 성별은 어떻게 돼?”
‘제 영혼이 새로 정화되면서, 과거의 이름은 의미가 없어졌어요. 몸도 새로 태어난걸요. 암호랑이예요.’
“그럼, 고구려어의 크다는 뜻인 아리를 넣고 호랑이 랑을 붙이자. 이제 너의 이름은 아리랑! 특별한 일을 제외하곤 고양이로 지내자.”
새끼 백호의 몸에서 푸른 빛이 뿜어졌다.
아카식 레코드에 아리랑(신수: 백호)으로 기록되었다.
아리랑은 곧바로 공중에서 한 바퀴 돌더니, 고양이로 변신했다.
“오빠? 제가 안고 있으면 안 될까요?”
“그러도록 해. 난 요 앞 상점에 가서 먹일 만한 걸 사 올게.”
태월이 우유와 생고기 그리고 고양이 사료를 사왔다.
‘그런데 호랑이인데 고양이 사료도 먹으려나?’
어떤 걸 먹을지 몰라서 다양하게 사 온 것이다.
그런데 아진이 혼자 중얼거리고 있었다.
“어? 둘이 텔레파시가 돼?”
“아리랑이 먼저 걸어왔어요. 문신을 거친 존재는 서로 가능한가 봐요.”
태월도 몰랐던 사실이다.
사 온 것들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아리랑은 우유부터 먹더니, 생고기와 고양이 사료를 번갈아 맛보고 있다.
입맛에 맞는지 전부 먹어버렸다.
“어? 두 가지 다 먹네? 잡식성이군. 입맛이 까다롭지 않아서 다행이야. 아 참, 이제 생각났네. 아진에게 의사 재능을 넘겨준다면서 자꾸 잊게 되네.”
“오빠가 하나를 더 갖지 그래요? 전 공부 재능이 충분해서 따라갈 수 있거든요.”
“하하, 난 이미 2개나 가졌어. 하나를 더 추가한다고 해서 효율은 그리 높진 않아. 쓸데없는 소리 말고 여기 앉기나 해.”
“네, 그럼 그럴게요.”
아진에게 의학 재능이 하나 넘어갔고, 그녀의 몸에서 빛이 났다.
그게 신기한지 아리랑은 아진의 몸에 자신의 머리를 비빈다.
아진이 잠시 상념에 잠겨있다.
태월은 백호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주고는, 집안에 필요한 것들을 적어 나갔다.
***
8월 중순이 되자, 모스크바 대학교의 예비 소집이 있었다.
의과대학 예과는 본격적인 본과로 들어가면 교양과목을 배울 시간이 없다.
그래서 예과 때 그걸 배우는 시간을 주는 것이다.
즉 예과 시절은 일반 대학 생활을 맛볼 수 있는, 유일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도 한국에선 예과가 2년인데 반해, 모스크바 대학교는 예과가 1년이다.
그만큼 예과도 빡빡하게 돌아간다.
또 한국의 본과 4년보다 긴, 6년의 전공을 가지는 모스크바 의과대학이다.
“와, 저 여자 누구야? 동양에서 온 유명 배우인가? 신비한 아름다움이네.”
“부랴트족 아닐까? 아니, 그건 아니겠네. 부랴트족에 저 정도의 미인이 있었다면, 벌써 알려졌겠지.”
“허, 러시아 미녀들이 오징어가 되겠어.”
“어머, 저 남자랑 연인인가? 남자가 땡잡았네.”
“에이, 아닐걸? 남자가 돈이 많겠지! 동양인치고는 러시아 남자 평균 키를 넘네. 저 남자를 내가 꼬셔볼까?”
아진이 태월 가까이 붙어 다니니, 여자들에게 오해까지 사는 중이다.
예비 소집이라 학교생활에 필요한 시설물 견학과 학과 수업 일정 그리고 수강 신청을 하는 시간이었다.
아진은 그냥 태월과 같은 과목을 전부 택했을 뿐이다.
그렇게 태월과 아진의 대학 생활은 시작되었고, 학교에서는 다들 부러워하는 커플로 인식이 되었다.
예과의 수업은 시간이 빡빡하긴 했어도, 그 둘에겐 어렵지 않았다.
장학금 성적이 되긴 했지만, 그건 받지 않았다.
“아니, 진짜 두 분 다 장학금을 안 받겠다는 겁니까? 적은 돈이 아닐 텐데요.”
“다음 성적 분들에게 주세요. 돈에 그리 연연하는 살림은 아니거든요.”
“돈도 돈이지만, 이것도 하나의 명예거든요!”
“하하, 저도 그런 거야 알지만, 명예는 다른 걸로 취득하겠습니다.”
그러잖아도 시기심을 가진 이들이 많은데, 그런 적은 돈 때문에 피곤해지기 싫어서다.
그렇게 1년의 세월이 지났다.
“오빠! 언니!”
“헉!”
그녀가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