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모스크바 국립대 의과대학
“선착장에서 사진을 찍은 분들이 많았는데, 그게 뉴스에 보도되었거든요. 생환 축하도 할 겸 식사 자리를 마련했는데, 다들 일행분들도 보고 싶어 해서요. 글로리아나 더글라스 감독은 귀찮게 하지 말라고 하긴 했지만, 제 입장에서는 그게 아니잖아요.”
“그런데 그거랑 글로리아의 삶의 역전이 무슨 연관이 있는데요?”
“뉴스에서는 시신을 찾기 위해, 구조대원들이 움직이는 상황을 방영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생환했잖습니까? 무명의 글로리아였기에, 이 정도 언론의 관심은 이슈가 되고도 남지 않습니까?”
태월은 벤자민 감독의 의도를 이해했다.
“영화와 글로리아를 같이 띄우고 싶단 의미군요? 그런데 제 일행들이 카메라에 노출되었나 보네요?”
“글로리아가 타고 왔던 그 보트에, 미녀들이 탑승해서 한 시간가량 운행한 게 뉴스에 나왔네요. 살아난 글로리아와 천사들?”
“아, 쓸데없는 카메라가 있었군요. 글로리아가 찍고 있는 게 어떤 영화인가요?”
그때는 아무 생각 없이 바다를 즐겼던 탓에, 태월은 미처 주변을 살피지 못했다.
“행성 충돌로 세상이 멸망하고, 생존자들이 바다에서 살아가게 된 이야기입니다.”
“흠, 특이한 영화긴 하네요. 그래서 우리가 어떻게 해주길 원합니까?”
이미 언론에 노출된 상태라니, 글로리아에게 도움을 주는 것도 나쁘지 않다 여겼다.
“거기에 물의 여신 딸들이 등장하거든요? 그 카메오 역할이면 어떨까요?”
“흠, 좋습니다. 딱 반나절입니다. 그 이상은 시간을 못 내줍니다.”
“감, 감사합니다.”
글로리아에게 그 정도 선물이면 적당하다고 여기는 태월이다.
그들이 돌아가자 태월은 일행들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우와, 우리 이제 연예계 진출하네?”
“아루 언니? 카메오거든요? 사회 저명인사도 그런 거에 나오기도 해요.”
“아이 몰라. 하여간 영화에 나오는 건 맞잖아. 어떤 컨셉을 잡아야 하려나.”
“크, 컨셉은 감독이 잡아 줄 거고. 그냥 아루는 하라는 것만 해. 괜히 오버해서 시간 낭비하지 말고. 우린 여행 중이거든? 여행 와서 생긴 추억 정도로만 여기면 돼!”
영화의 시나리오가 약간 변경이 되었다.
글로리아가 물에 빠져서 해류에 휩쓸려가다, 죽음 직전에 물의 여신 딸들에게 구원을 받아 살아나게 되는 내용으로.
물의 여신은 아쿠가 맡았고, 다섯 명의 딸들이 나오는 상황이다.
“아카 언니? 아쿠가 오늘 하루 엄마가 되는 건데. 안 이상해?”
“이상할 게 있나? 물의 여신으론 아쿠가 제일 어울리는 건 맞잖니. 원래 연기는 그에 맞는 사람이 해야 하는 거야.”
태월은 연기에 관련된 재능을 찾았는데, 5개가 있었다.
서로 양보하는 걸 무시하고, 태월은 그녀들에게 제비뽑기를 시켰다.
라리사가 결국 뽑혀서 연기재능은 제외되었다.
그리고 여섯 명의 카메오는 일약 언론의 조명을 받으며, 깜짝 스타의 반열에 오르기도 했다.
들리는 이야기론 팬클럽도 생겼다고 하니, 그녀들의 외모와 분위기가 그만큼 남달랐단 소리다.
태월 일행은 미국에서의 남은 여행을 알차게 보냈으며, 아카를 제외한 나머지는 러시아로 돌아갔다.
러시아 알혼섬에서의 일상은 다시 시작되었다.
“잉, 그럼 나 엄청 열심히 해서 꼭 월반할 거야. 아진 언니? 오빠를 잘 부탁해. 국제수학 올림피아드에서 좋은 성적을 내볼게.”
“응, 내가 잘 모시고 있을게. 너도 빨리 와.”
국제수학 올림피아드(IMO)는 1959년 루마니아에서 열린 이후, 매년 7월에 거행되는 국제적인 수학 경시대회다.
대학 교육을 받지 않은 20세 미만인 학생들에게 참가 자격이 주어지며, 각국 대표는 6명의 학생으로 이루어진다.
초창기는 동유럽 나라들의 대회였으나, 1970년대 중반 이후 미국 등 서방 국가들도 참여하였다.
대한민국은 1988년 호주 대회부터 참가하고 있었다.
1995년인 이번 대회는 캐나다에서 열린다.
시험은 이틀간 치러지며, 하루에 3문제씩 총 6문제가 주어진다.
이틀간 총 9시간이 주어지며 문제당 7점으로 42점이 만점이다.
참가자의 반 정도가 메달을 받게 되는데, 금메달은 상위 1/12에게 주어진다.
금메달의 컷 라인은 30점 근방에서 이뤄져 왔다.
그 외 은메달은 1/6 그리고 동메달은 1/4에게 수여되는 것이다.
이번 러시아의 참가 학생은 이미 정해져 있었으나, 참가자를 뽑는 국내대회서 청탁행위가 적발되어 2명의 공석이 생겼다.
그 자리에 아쿠가 힘을 써서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당연히 심사관들 앞에서 아샤의 실력을 당당히 입증해 보였고, 전원 만장일치로 통과되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국제대회인 만큼 국가의 등수가 그들 나라의 자존심이었다.
누적 성적을 보면 1위 중국, 2위 미국, 3위 러시아였다.
그래서 러시아 입장에선 실력 있는 천재가 절실한 상황이었는데, 아샤의 실력에 기대를 품게 된 것이다.
물론 6명 학생 전원의 점수를 합산하는 국가 성적이지만 말이다.
“개인 금메달을 따게 되면, 내년 9월에 모스크바 대학에 진학할 수가 있어.”
러시아 IMO에서 그렇게 월반해주는 조건을 아샤에게 걸었던 것이다.
올 9월에 고등학교 입학한 후, 1년 만에 고등학교 졸업을 한다는 의미다.
원래 러시아에선 고등학교는 2년 정도 다니는 경우가 많긴 했다.
뭐 이만한 천재라면 그 정도 특전은 당연한 이야기긴 하다.
아샤는 아진과 영혼 공유를 했을 당시, 그녀의 마음이 순수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태월에게 향한 마음의 근간이, 이성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태월은 보름간 자신이 해오던 일들을 임원들에게 분산을 시켰고, 업무인계도 끝을 내었다.
“잘 다녀올게. 뭐 비행기 타면 멀진 않으니, 시간 나는 주말엔 넘어올 수 있어.”
“그래, 같은 러시아인데 멀어 봤자지. 우리도 주말에 시간 되면 넘어갈게. 그리고 아진? 태월에게만 너무 신경 쓰진 말아. 너도 같이 입학하는 건데, 이왕이면 새로운 대학 생활도 즐겨봐.”
“호호호, 맞아. 새로운 인생 새롭게 살아야지!”
그녀들은 모스크바 의과대학이 얼마나 바쁘게 돌아가는지는 생각 못 하고 있었다.
“호호, 네. 저를 위한 시간도 조금씩 만들어 볼게요.”
아진은 그녀들에 포옹을 한 번씩 하고는, 태월을 따라 모스크바로 향했다.
과거엔 이르쿠츠크에서 모스크바로 가려면 열차를 이용해야 했는데, 비행기 운항이 부정기적이어서다.
그러나 이제는 그곳까지 가는 정기 국내선 항로가 생기며, 운항 횟수가 늘어났다.
“학교부터 가보도록 하자. 외국인 특례입학이라 시험 없이 가능은 하지만, 한국과 달리 이곳은 빡세다는데.”
모스크바 대학교의 정식명칭은 로모노소프 모스크바 국립대학교다.
1755년에 미하일 로모노소프에 의해 설립된 이 대학은 1940년에 명칭이 바뀌었다.
로모노소프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그의 이름을 붙인 정식명칭이 생긴 것이다.
외국에서는 여전히 모스크바 국립대학교라고 하지만, 러시아에선 로모노소프 대학교라 부른다.
모스크바 국립대학교의 의과대학은 7년이다.
예과 1년, 기초의학 3년, 임상의학 3년을 거쳐 국가고시에 합격하면 의사가 된다.
일반의로서 2년의 인턴과정과 박사과정으로 3-4년을 거치면 전문의가 되지만.
태월은 그거까지 할 필요는 없었다.
“오빠? 여기 의대는 너무 심한 것 같아요. 토요일까지 하루 12시간가량을 수업하다니, 한국하고는 너무 차이가 나네요. 무려 3배 차이예요.”
“한국의 의과대학이 6,500시간쯤 수업을 받는다면, 여기 의대는 18,591시간의 수업을 받아야 한다니 질리긴 하다. 그렇지만 여기서 받게 되면 세계에서도 실력을 인정해주니, 걸리적거리는 게 없어질 거야. 뭐, 나름 생명에 대한 전문 공부도 될 거고.”
“하긴 오빠는 이제 인간 평균수명보단 훨씬 기니, 7년이 그리 긴 시간이라 할 수 없네요.”
“글쎄, 난 7년씩이나 이곳에 눌러있을 생각은 없어. 이곳이 예외가 통하지 않는 사회주의 의학이라고 하지만, 세상에 완벽은 없다고 봐.”
이 대학은 뇌물과 청탁은 통하지 않는 곳이다.
“외국인에게 필요한 랭귀지 코스 1년은 면제되겠죠?”
“아쿠가 관련 인사에게 미리 내용 전달은 했으니, 실력 확인만 받으면 될 거야.”
태월과 아진은 한국인으로 입학하게 되는 것이다.
둘 다 러시아어 재능을 가지고 있는 터라, 문제가 될 소지는 없었다.
아진 같은 경우는 일본어, 한국어, 러시아어, 부랴트어, 영어, 프랑스어까지 가지고 있다.
태월의 언어적 재능은 워낙 다양해 말할 거리도 되지 않는다.
“아진은 굳이 의과대학 갈 이유가 없잖아? 나 때문이라면 안 그러는 게 좋은데?”
“뭐, 전혀 아니라고 할 순 없지만, 저도 죽고 나니 생명에 대해 관심이 큰 건 맞아요. 그 외엔 딱히 하고픈 분야도 없고요.”
고개를 끄덕인 태월은 아진과 함께 오늘 일정에 따라 움직였다.
결국 둘은 랭귀지 코스 특별 전형에서 면제를 받게 되었고, 예과 1년에 동시 입학하게 되었다.
레벨 시험을 보고 의대에 들어오는 경우도 있었지만, 외국인 특례입학으로 들어오기도 하던 시절이었다.
다만 실력이 없으면 버티기 힘든 곳이, 이곳 러시아의 모스크바 국립대 의과대학이다.
들어올 순 있어도 졸업하긴 어렵단 의미다.
“하하, 알리사 양이 연락을 해왔지만, 반신반의했는데 정말 대단하네요. 6개 국어를 구사하다니, 이거 의학부가 아니라 언어학부를 가야 하는 게 아닌가 싶네요.”
“그럼 둘 다 통과된 거죠? 8월 말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그럼요. 이런 인재들을 놓친다는 건, 우리 대학에서도 손해가 크죠. 이제 세계화 시대 아닙니까? 두 분이 패밀리라고 하시니, 같은 반에 배정되도록 힘쓰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의과대학은 1개 반이 6명 정도고, 한 학년은 300명쯤 된다.
이들은 3학년쯤 되면 절반만 살아남고, 나머진 유급이 되는 것이다.
9월 1일이 1995년도 입학식이다.
태월과 아진은 학교에서 요구하는 입학서류를 전부 제출하고, 의과대학 근처에 집을 알아보러 다녔다.
대부분이 기숙사 생활을 하지만, 여유 있는 학생들은 아파트를 얻어 생활하기도 했다.
“이곳이 적당하겠네? 어때?”
“음, 괜찮은 것 같아요. 그런데 방은 4개까지 필요 없는데. 아샤가 내년에 오면 저랑 같이 써도 되잖아요. 거실도 다녀본 곳 중에 제일 큰 것 같아요.”
“그래도 좁은 것보단 낫지. 이르쿠츠크에서 놀러들 오게 되면 이 정도는 돼야지. 그럼, 여기로 하자. 5곳이나 보러 다녔더니 이것도 힘드네.”
루블화로 계산하지 않고 달러로 구매하겠다고 하니, 집주인이 굉장히 적극적이었다.
“5만 달러까진 가능하단 말이죠?”
“그렇습니다. 전이라면 8만 달러는 받아야지만, 요즘 달러가 금값이라 이 정도만 받는 것입니다.”
“뭐, 좋습니다. 계약은 회사 이름으로 하도록 하죠.”
“하하하, 이거 시원시원해서 좋습니다. 대신 선물로 이 집에 있는 가구는 필요하시면 드리겠습니다. 망명했던 사람이 살았던 곳이지만, 거의 사놓고 쓰지도 않은 것이죠.”
태월이 보기에도 고급스럽고 깨끗했다.
결국 50평대 아파트는 BATR 회사 명의로 구매하기로 했다.
“그런데, 저 물건들도 주는 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