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이거 드라이기야?
카이토가 요괴 자체는 아니기에 더 깊이 파고들지는 않았다.
태월 또한 이야기를 들었지만, 그런 흔적까지 조사할 필요는 느끼지 못했고.
“휴가까지 와서 그런 일에 시간 날릴 수는 없잖아.”
“맞아. 요괴가 한둘도 아니고. 카이토도 나름의 사연이 있겠지.”
“그런데 몇몇은 안 보이는데?”
“졸린다고 자러 갔지 뭐. 우린 뭐 하지?”
“오늘 마트 가서 함께 장보기로 했는데, 우리만 다녀오지 뭐.”
태월은 아쿠와 아루 그리고 아카를 데리고 장을 보러 갔다.
정령이나 영령이 인간보다 피로감을 덜 느끼는 것 같았다.
두 시간 정도 걸려서 넉넉히 장을 보고 오던 태월은, 서핑 가게 앞에 걸린 보드를 구경하고 있다.
몬탁은 서핑과 낚시를 즐기는 사람들이 자주 찾는다.
대서양과 맞닿은 동쪽 끝이라서 일출로도 유명하지만, 서퍼들에겐 유혹의 장소다.
몬탁 해변에서 수영하는 사람들이 있긴 해도, 해변 자체가 서핑 쪽에 더 어울린다.
그래서 몬탁 해변엔 서핑 가게들이 줄지어 서 있다.
6월 몬탁의 바닷속은 추운 편이라 수영하는 사람들은 소수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곳은 한겨울에도 서핑광들이 있을 정도였기에, 지금 계절엔 사람들이 넘쳐났다.
“우리도 서핑할 거지? 재밌긴 하겠다.”
“서핑 재능이 딸랑 3개밖에 없어. 잠수 재능만 많은 거 보면, 일본에서 서핑은 잘 안 즐기나 봐.”
“나야 물하고 연관되니 금방 배울 거라 패스.”
“나도 기운을 조절하면 되니까 어렵지 않을 거 같은데. 그리고 배우는 재미를 포기할 수 없어. 아카 언니는 어때?”
“그게 필요한 건 아진하고 아샤 정도일 거 같아. 늑대 족도 몸의 균형과 순발력엔 일가견 있으니, 금방 능숙해질걸?”
“그럼 보드만 8개를 사면 되겠네? 옷은 전신 보드 슈츠로 할까? 래시가드보단 낫잖아.”
“아유, 우리 태월이가 여자의 패션을 몰라요. 그런 건 인간 초보들이나 몸 보호하려고 입는 거고. 또는 몸매 보정 때문에 입는 거라더라. 우리야 몸매 보정이 필요한 사람도 없잖아!”
“어련하시겠어! 그럼 알아서 골라. 난 잠수 겸용으로 쓸 거라서, 전신 슈트로 하겠어.”
“음. 잠수까지 생각하면, 전신 슈트여야 하네. 그럼 우린 겸용 안 하고 따로 해야지.”
결국 여자들 옷은 두 벌씩 샀고, 남자용은 전신 슈트만 1벌씩 사는 거로 했다.
“여기 여성분들 건 전부 노 패드인데, 속옷은 따로 입으시는 건가요?”
“원래 필요가 없으니 노 패드가 나온 거 아녀요? 여기 보면 패드 있는 거보단, 없는 게 대부분이죠?”
“네, 안 입는 분들도 있으니까요.”
“우리가 그런 사람들이거든요?”
“......”
태월은 아루와 점원의 이야기를 들었지만, 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자신의 옷도 패드가 없는 건 마찬가지니까.
구매한 물건은 보드가 8대나 되기에, 매장에서 직접 배달해주기로 했다.
그 외 잠수 관련 장비들도 샀다.
전년도 제품들이 반값 할인판매 중이라 넉넉하게 구매하였다.
짐이 많아지겠지만, 공간 배낭 안에 넣어두면 될 일이다.
“배우실 곳은 있나요?”
“아직요. 소개해 주려나 보네요?”
“이 가게와 연계된 곳이 있거든요. 거기서 배우면 30% 할인이 된답니다. 없으신 거죠?”
“뭐 패키지 상품으로 관광 온 것이 아니기에, 필요하면 현지에서 구하려 했습니다.”
“오늘 밤도 당장 가능해요. 가족 강사들이라서 성실하거든요.”
태월은 점원이 내미는 명함을 받아 들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별일 없으면 이쪽으로 할게요. 배달 잘 부탁드립니다.”
“호호, 걱정하지 마세요. 30분 후에는 도착해 있을 거예요.”
태월 일행이 가게를 나왔을 때가, 벌써 저녁 7시를 넘기고 있었다.
“자 지금쯤 일어났을 거야. 다들 배고플 테니 가는 길에 햄버거라도 사서 가자.”
몬탁 해변은 관광지다 보니, 식음료 값이 다른 지역에 비해 비싼 편이다.
겨울철에 손님이 거의 없는지라, 여름엔 비쌀 수밖에 없었다.
“으아, 우리 빼고 마트 다녀온 거야?”
아샤가 제일 먼저 방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며 하는 소리다.
“메모지에 써놓고 갔잖아. 다들 출출하지? 일단 햄버거부터 먹자.”
“오오, 양도 많은 미쿡 햄버거!”
“오늘 밤 서핑 배우러 갈까 하는데 어때?”
“오빠, 우리 올빼미 가족인가 봐. 자꾸 낮엔 자고 밤에 뭘 하게 되네.”
“아샤! 지금 한국 시간으론 아침 9시 반이거든?
그리고 이르쿠츠크는 아침 8시 반이야. 그러니까! 우리는 정상인 거야. 호호.”
“호호호, 아루 언니, 말이 맞네.”
아루의 엉뚱한 발언에 웃음이 번졌다.
한국과 뉴욕은 14시간 시차가 있었다.
그리고 이르쿠츠크와 뉴욕은 13시간 차이가 있다.
“오빠! 난 찬성! 휴가를 제대로 즐겨야지!”
“저도요. 재밌을 거 같아요.”
“저도 찬성요!”
아샤, 아진에 이어 라리사도 찬성한다.
“그런데 보드야 빌리면 된다지만, 뭐 입고 타? 수영복 입나?”
“호호, 보드와 서핑용 옷은 다 준비되었어. 걱정은 접고, 햄버거나 마저 먹어.”
“먹으면서 들어! 서핑에 관련된 재능은 아샤와 아진에게 주기로 했어. 안드레이나 라리사도 필요하나?”
“아뇨, 저희는 그게 어렵지 않을 거 같네요. 그냥 날것으로 배우겠습니다. 오빠도 괜찮지?”
“하하, 뭐 서핑 정도야 금방 배우지.”
아진과 아샤가 식사를 다 한 듯 보이자, 태월은 그녀들을 앞에 앉게 했다.
“일단 서핑부터 주도록 할게. 전에는 아샤에게 재능 부여가 안 되었는데, 이젠 가능해졌으니 학업에 도움 될 것도 같이 주도록 하마. 아진도 학력이 사라졌으니, 시간 격차 줄이는 데 필요할 거고.”
곧이어 두 여자의 몸에서 각자 9번 정도 빛이 일렁거렸다.
“어학 2개, 수학 2개, 과학 1개, 경제 1개, 서핑 1개, 요리 1개, 음악 1개야.”
30분 정도가 지나자, 둘은 정신세계에서 빠져나와 현실로 돌아왔다.
“우와, 나 이러다 신문에 나오는 거 아닐까요? 천재 소녀 아나스타샤!”
“감사합니다.”
“그래, 아샤는 평생 소녀로 살아!”
“익, 아루 언니! 남들이 보면 언니도 소녀처럼 보이거든요? 호호호.”
“얘! 나 이제 찌찌 커졌거든? 볼래?”
“또 둘이 저러네. 언제 철들는지 원.”
-띵똥! 띵똥!
라리사가 문을 조금 열어서 살피니, 남자 하나가 용건을 밝힌다.
“서핑 샵에서 보낸 물건입니다. 여기 확인해주시고 사인 좀 부탁드립니다.”
태월은 바로 나가서, 상자들을 일부 개봉까지 하면서 확인을 마쳤다.
“네, 빠진 건 없네요. 수고하셨습니다.”
배달 직원이 내미는 서류에 사인을 마치자, 직원은 차량으로 돌아갔다.
곧 집안은 쇼핑 물건들을 개봉하느라 분주해졌다.
“아루 언니? 이거 패드가 없는데? 속에 탑 브라 같은 거, 따로 해야 하는 거 아녀요?”
“소녀는 해야 하지만, 우린 안 해도 돼!”
“음, 언니는 안 해도 차이가 없긴 해요.”
“얘! 너 일루와 봐. 너랑 얼마나 차이 난다고 그래!”
아루가 아샤의 가까이 가서 툭 치더니 만진다.
“꺄악!”
“음, 차이가 나긴 하네.”
태월은 막상 여자들이 래시가드를 입자, 문제가 있음을 느꼈다.
“아카? 우리끼리야 상관없지만, 이거 괜히 시선을 끌 거 같은데? 걸칠 거 없어?”
“음, 수영복 위에 입는 게 있거든. 그럼 그걸 쓰면 되겠네.”
아카가 가져온 건 무늬가 들어간, 시스루 스타일의 가디건이었다.
“이거 비치로브라고 부르는 건데, 이 정도면 되잖아?”
비치로브라고 하기엔 너무 짧았다.
엉덩이를 덮는 길이 정도였지만, 없는 거보단 나았기에 고개를 끄덕여주는 태월이다.
”다들 태월 말 들었지? 우리가 창피하다니깐, 반바지 정도는 입도록 해.”
“헐, 창피하다기보단 시선을 끄니 그런 거잖아. 너무 앞서갔어.”
“그럼 창피한 건 없는 거야? 그럼, 사람 없을 땐 편하게 입어도 괜찮아?”
“윽, 아니. 아주 창피하다! 꼭 입어줘!”
아카의 말이 꼭 진담처럼 들리기에, 서둘러 정정하는 태월이다.
남의 시선에 부끄러움 같은 걸 못 느끼는 정령이나 영령인지라, 길게 대화해서 태월에게 득 될 게 없었다.
태월 일행은 밖으로 나와 아카의 차에 보드를 실었다.
아루가 조수석에 앉아 글로브 박스를 열어보더니 갸웃거렸다.
“언니? 이게 뭐야? 드라이기?”
“음. 글쎄다. 뭘까?”
“드라이기 같은데, 특이하게 생겼어.”
“태월은 저게 뭘 거 같아? 아직 미완성이야. 그냥 원리 이해를 위해 만든 샘플이지.”
태월은 아루 손에 들린 물건을 건네받아 이것저것 눌러볼 뿐, 별다른 말은 하지 못했다.
“드라이기가 아닌 건 확실한데, 마사지 건 같은 건가?”
“땡! 파동을 이용한 무기랄까? 파동 건? 하여간 완성하려면 멀었어.”
“아, 에너지 파동을 이용하는 거구나. 이건 왜 만드는 중인데?”
“미국 방산사업체 중 하나가 파동에 대해 연구를 했더라고. 그러다 당장 실효성이 없다는 이유로 연구가 중단되었거든. 거기 수석연구원을 내가 데려왔어.”
“그래서?”
“태월도 알잖아? 우리 둘은 같은 영혼 에너지를 주력으로 활용하는 거. 그게 오오라의 파동과 연관도 있다는 거. 내 손을 잘 봐!”
-짝! 부웅!
아카가 손바닥을 부딪치자 희미하지만, 파동이 형상화되었다.
“어? 그런 식으로 형상화할 수 있네?”
-짝! 부으! 픽.
태월의 손뼉에 의해 파동 형상화가 이루어지려다가 바로 꺼져버렸다.
“성공은 못 했지만 바로 따라 하네? 태월도 연습하면 어렵진 않을 거야. 에너지도 나보단 많으니, 이미지를 실현하면 쓰임새가 더 넓을 거고. 자 다시 봐봐. 원리도 설명해줄게.”
-짝! 부 우 웅!
“내 손바닥 안이 지금 파원이 되는 거야. 그리고 이건 한 번 발생한 파동인 펄스야. 연속적으로 이어지면 그게 연속적 파동인 거고. 그리고 영혼 에너지를 내가 끌어 썼기에, 여기선 그 영혼 에너지가 매질이 되는 거지.”
“꼭 무기를 만들려는 거 같은데?”
“호호, 맞아. 귀신이나 영혼에는 현 상태로도 감당이 되지만, 앞으로는 좀 더 수월했으면 싶었어.”
“어머, 고스트 바스터야?”
“이걸 방산 업체에서 귀신 잡으려고 만들려 했겠어? 그들은 실패했지만 난 다른 방향을 생각했어. 우리가 가진 에너지를 매질로 삼으면,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어. 정신 에너지 파동, 불의 에너지 파동, 물의 에너지 파동. 그리고 그 파동들은 입자와 달리 더 강력하게 중첩할 수도 있어.”
“에너지 파동으로 귀신이든 사람이든 제압할 수 있다는 거네? 물리 에너지와 정신 에너지 두 가지 범용이고.”
아쿠가 옆에서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아, 이거 옛날 MBC에서 방영한 ‘날으는 전함 V호’. 거기에 나오는 파동 포랑 유사하네?”
태월이 말하는 날으는 전함 V호는, 1980년에 문화방송에서 방영된 일본 애니메이션이다.
원제목은 우주 전함 야마토 시리즈라는, 1974년의 첫 번째 작품이었고.
“물리학에서 파동 포에 대한 건 예전부터 있던 이론이야. 그걸 애니메이션에서 상상력을 더해 그려 놓은 것이지. 그리고 영화 같은 데서 상상력에 의해 만든 것이 모델이 되어, 훗날 실제로도 만들어지기도 하고.”
“오호, 멋진데?”
“호호호, 너무 앞서가진 마. 이건 파동 포를 만들려는 건 아니고. 개인 무기인 파동 건을 만들려는 거야. 파동 포를 만들다간 미국이 간섭할걸?”
-띠리링! 띠리링!
“여보세요? 아, 하하, 네. 가는 중입니다. 금방 도착할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