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이 가면 어때?
태월은 어딘가로 침투정보가 샜는가 싶어 되짚어봤다.
“화장실을 갔다 온 사이에 교대자가 제가 없자, 예비 열쇠로 열고 들어왔습니다.
그리고는 지하 2층까지 들어와 버렸습니다.”
“아, 정신없이 일 진행하다가 그걸 깜빡했네요. 그 경비에게 오늘 하루 쉬라고 해야 했는데…. 제 불찰입니다.”
마유키가 고개를 숙이며 죄송함을 표한다.
‘호들갑에 비하면 생각보다 큰 문제까지는 아니네. 난 또 진짜 큰일 난 줄 알았잖아.’
태월은 별일 아니라는 듯 손을 내젓는다.
“음, 그래서 그 경비원은 어디에 있지?”
“기절시켜서 가둬뒀습니다.”
“잘했어. 이 일은 나도 깜빡했네. 7시에 교대를 한다는 걸 들었었는데, 잊고 있었으니…. 엎질러진 물이니 더 생각지 말자고.”
아루에게 텔레파시를 보내, 소생자 후보를 1명 더 만들어 냈고 곧이어 처리하였다.
소생자가 되었다고 해서 삶이 크게 바뀌거나 하진 않는다.
귀속감이 생기는 문제는 좀 있으나, 영혼이 깨끗해지니 그 자신에게도 나쁜 일만은 아니다.
오전 11시경에 토리가 찾아왔다.
“전화로 알려도 되는데 뭘 굳이 와?”
“저희 쪽 일에 이쪽 일까지 늘어났으니, 처리해야 할 게 많아져 전화상으론 한계가 있어서요. 러시아로 갈 때 이쪽 물건들을 가져가신다면서요?”
“특별기로 갈 것이라서 한 번에 처리하는 게 여러모로 낫지.”
“그럼, 여기 물건들 중 시설물과 기자재는 화물 선박으로, 그 외 골동품과 주요 물품은 특별기로 하시는 게 효율적입니다.”
골동품과 고서화들은 알혼섬의 BATR 박물관에 기증될 것이다.
“하긴 비행기는 화물을 컨테이너로 적재하지 않고, 팔레트로 하니 그게 맞겠군.”
“운송 업체 대표는 소생자 중에 둘이나 있습니다. 날짜만 정해지시면, 그들이 보안에 맞춰 처리하기로 했습니다. 한 곳은 항공 쪽으로 다른 곳은 항만 쪽을 맡게 하면 됩니다.”
“여기 연구소장의 명으로 된 부동산들이 꽤 많아. 자신도 알아보고는 있지만, 물량이 좀 되다 보니 벅찰 거야. 조용히 처리할 수 있는 업체를 알아봐. 아 그리고 부동산 목록을 줄 테니, BATR 재단에 이익이 될 만한 거 체크해. 그건 적당한 가격으로 넘겨줄 테니.”
“네, 그 일도 돕겠습니다. 그리고 목록도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소생자 중에 몇 명이나 올 예정이지?”
“35명입니다. 더 필요하시면 늘려보겠습니다.”
“아니야. 그 정도면 충분해.”
오후가 되자 기자재 해체가 진행되었다.
“아사코는 계속 기분이 우울해 보이던데?”
“흠, 사람은 몰라도 악귀를 상대하기엔 무리가 있지. 귀기를 가를 정도의 기운을 담진 못하잖아. 그거 때문일 거야.”
“이참에 늑대 족의 호흡법을 가르쳐야겠어. 그러면 가능성이 더 커지겠지.”
“호호호, 그거 좋은 생각이네. 아사코의 얼굴이 밝아지겠네.”
결국 그날 저녁에 아사코에게 늑대 족의 비기를 전수하게 되었다.
잡신에 가까운 요괴 오니의 능력 일부가 몸에 남아 있어서인지, 배우는 것도 빨랐다.
하루아침에 기를 다룰 수 있진 못하겠지만, 차차 발전해 갈 것이다.
다음 날은 주요 시설물을 분리하는 공사가 진행되었는데, 3일이나 걸렸다.
선박 항로는 돗토리현 서쪽에 자리 잡은, 사카이미나토시의 사카이항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한국의 동해를 거쳐 블라디보스토크에 입항하는 항로로 가게 되었다.
“아르세니, 수고해라.”
“네, 마스터! 책임지고 알혼섬까지 완료시키겠습니다.”
이번 화물 선박은 용병 중 하나인 테일러가 맡게 되었다.
주요 기자재의 보안을 위해선, 누군가가 같이 타야 한다는 판단에서다.
컨테이너를 실은 화물차 10대가 일제히 사카이미나토시로 향했다.
“한스? 이제 이치코를 찾으러 가야지. 이번 일본 일정의 마지막 코스다.”
“네, 마스터! 아직까진 그곳에 있는 걸로 파악되었습니다.”
“저, 마스터! 일본 정부에서 감사의 의미로 초청을 해왔습니다만?”
사토 유마가 된 토리가 난처하다는 듯이 말을 꺼낸다.
“그건 사토 유마의 공로로 처리해. 그들도 외국인보다는 일본 국민이 영웅이길 바랄 거야. 그리고 우리 팀은 공식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게 좋아.”
“네, 그럼 그렇게 처리하겠습니다.”
“마유키 연구소장과 협력은 잘되고 있나?”
“네, 일주일 정도면 거의 마무리 지어질 듯합니다.”
“우리도 이틀 정도의 시간이 소요될 거야. BATR 재단 건과 사업 문제는 다녀와서 마무리 짓도록 하지.”
“네, 잘 다녀오십시오. 마스터!”
태월의 일행은 오사카로 향했다.
12인승의 승합차에 9명이 탑승했다.
7명의 용병과 태월과 아루다.
아사코는 일주일간, 늑대 족의 호흡법과 기를 다루는 수련을 위해 남은 상태다.
***
“저곳입니다. 마스터!”
“무녀집단이라 그런가? 꼭 신사처럼 꾸며져 있네.”
“일을 의뢰한 무녀는 의심하지 않던가?”
“책부터 입수했다고 했습니다. 몸이 달았는지 빠른 만남을 요구해왔습니다. 그만큼 의심보단 욕망이 크단 의미죠.”
“그런데 왜 이곳이 아니라 장소를 다른 데로 잡았을까?”
“보안이 필요했을 겁니다, 그게 아니면 우리가 모르는 그들 간의 알력이 있을 수도 있고요.
그녀는 의뢰 때도 그랬지만, 자신들이 드러나는 걸 극도로 피했습니다.”
“흠, 소생시켜보면 알겠지. 어쨌든 오후 8시 약속이면 아직 한 시간은 남았네.”
“태월? 여기 무녀하고 한국 무당이 다른 거야?”
“한국에서 무당은 주로 신내림을 통해 모시는 신과 소통하는 경우지. 그런데 일본은 희망자가 신사에 들어가서, 영력을 높이는 수련을 통해 무녀가 되는 거야.”
“누구든지 가능하단 소리네?”
“그런 셈이지. 뭐 수련을 통해 영력에 더 민감한 사람도 나오겠지. 한국처럼 강제적 신내림 같은 건 없어. 심지어는 아르바이트하려고 무녀가 되기도 한다던데?”
“호호, 아르바이트? 그럼 소녀들이 많나?”
“요즘 흔히 보이는 무녀들은 소녀가 대부분이야. 일본에선 순결한 소녀가 무녀로 적합하다고 여기거든.”
“응? 순결? 그럼 결혼도 못 하나?”
“처녀성의 순결이라기보단 순수와 청결을 의미하겠지. 원래는 결혼 안 하는 게 일반적인데, 대를 이어 무녀가 되는 집안인 경우는 한대.
그런데 그런 경우 사촌끼리 결혼을 많이 해.”
“아, 별스럽네. 아카 언니에게 들은 말로는, 일본에선 사촌 간 결혼이 합법이라던데?”
고개를 끄덕여준 태월은 저 앞에 보이는 신사를 가리킨다.
“아루? 한 바퀴 돌아보고 올래?”
“호호, 알았어. 들키지 않게 조심할게. 흠, 무녀들은 뭘 하면서 지내려나.”
무녀에 대해 호기심이 동했는지, 목소리가 들떠 뒤로 갔다.
맨 뒤 칸은 커튼을 칠 수 있게 해놨다.
아루가 남의 시선을 신경 쓰는 편은 아니지만, 용병들의 눈요기가 되는 건 막아줬다.
정령 본체에서 인간으로 돌아올 때, 몸을 가려줄 커튼이다.
정령의 몸으로 돌아와, 하늘을 가볍게 날고 있는 아루다.
‘오, 진짜 어린 여자들도 많네? 전부 수련생인가? 어, 나이 든 여자들도 있긴 하구나.’
건물 더 깊숙이 들어가자 아루의 눈에 다른 광경이 드러난다.
‘뭐지? 저 여자는 웬 종이 묶음을 흔들고 있네? 무당들 방울하고 같은 의미인가?’
아루가 본 종이 묶음은 고헤이라고 불리는 어폐다.
신사의 신관인 칸누시는, 어폐를 신도의 머리 위에 흔드는 정화의 도구로 쓴다.
기독교로 비유하면 십자가 역할 같은 거다.
또 무녀가 어폐를 흔드는 것은, 신의 뜻을 읽기 위한 의식 같은 거다.
일본에서 어폐를 가진 사람은, 신과의 소통이 가능하고 삿된 걸 정화하는 능력이 있다고 여겼다.
아루는 더 깊숙이 자리 잡은 건물 쪽으로 갔다.
‘응? 저놈들 말로만 듣던 그 닌자들 아냐? 숨어있어야 할 놈들이 모여 있네? 오늘 동창회라도 하는 건가? 하나, 둘…. 총 9명이네?’
그들을 지나쳐 20m를 들어가니 마지막 건물이 보였다.
‘어? 금줄을 쳐놨네? 아까 그 종이 묶음도 중간중간에 끼워져 있고. 음, 저 종이 대신에 고추를 끼워 놓으면, 딱 아들 낳은 집일 건데.’
아루가 본 금줄은 시메나와라 부르는 경계선이다.
이 세상과 성소를 분리하는 장벽의 의미다.
‘기운이 흐르는 걸 보면, 여긴 신당 같은 곳인가 보네. 잡신이 있으려나? 아니면 하급신? 여기 들어가면 들키려나? 에구 참아야지. 위치 정도는 확인했으니 된 거지. 내 정찰 임무 끝!’
입맛을 다신 아루는 아쉬움을 뒤로 하고 태월에게 돌아갔다.
그리고 그녀가 본 상황들을 이야기했고.
“그 정도면 충분해. 수고했어. 자 약속장소로 이동하자.”
“네, 마스터!”
도착한 곳은 찻집으로 여겨지는 곳이었다.
“한스랑 내가 가도록 하지.”
“네? 그 여자가 눈치챌 수 있는데요?”
“하하, 놀라기는? 이 모습으로 가려는 게 아니니 안심해.”
태월은 안쪽 호주머니에서 말아 놓은 가면을 꺼내 풀었다.
그걸 얼굴에 착용하고 1분 정도가 지나자 다들 놀란다.
“헉! 테일러네요?”
“어때? 테일러한테 사진 한 장 받아서 연습 좀 해봤는데.”
“태월? 그게 대체 뭐야? 얼굴뿐만 아니라 체형까지 변한 거 같은데?”
테일러의 체형이 그나마 슬림했기에, 옷을 갈아입을 필요가 없어서 그로 변신한 태월이다.
옷이 조금 작긴 했지만 크게 표나진 않았다.
“아, 이걸 말해주는 걸 아루에게도 깜빡했네. 그 하급신의 가면이 정화되어 이렇게 변해버렸어. 변신 가면이라고 이름도 지었지.”
“우와, 요괴 변신술하고 다를 바가 없네.”
“마스터! 굉장한 물건 같습니다.”
“하하, 나도 이게 마음에 쏙 들더라. 이제 들어가 볼까?”
“네, 제가 모시겠습니다.”
한스가 앞장서서 찻집의 문을 열었다.
손님이 들어오자 기모노를 입은 여점원이 인사를 해왔다.
“어서 오세요. 두 분이 오셨습니까?”
“약속이 있소. 모모카 상과 만나기로 되어 있는데?”
일본어로 모모카는 100송이의 꽃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무녀집단의 고위층 인물에 어울리는 이름이다.
“아, 기다리고 계십니다. 저를 따라오세요.”
여점원은 목련꽃이 그려진 방으로 안내를 했다.
“들어가시면 됩니다.”
점원이 고개를 숙여 보이곤 뒤돌아섰다.
“잠깐! 여기 안에 누가 있지? 모모카 상 말고 누가 있는 거지?”
태월의 말에 여점원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문신이 신격을 가지게 되면서부터, 기감이 전보다 더 넓어진 태월이다.
“뭐, 상관이 없으려나. 일단 들어가 보면 알겠지.”
태월은 한스보다 한발 앞서 문을 열었다.
“안녕들 하시오! 선객이 한 명인 줄 알았는데 셋이구려?”
“모모카 상! 이 남자들은 대체 뭐요?”
한스가 뒤따라 들어서며 모모카에게 목소릴 높였다.
의뢰자의 행동치고는 과했기 때문이다.
음지의 일을 맡은 용병을, 여럿에게 공개하는 건 금기시되는 일이었다.
“아, 오해는 말아요. 요즘 뒤숭숭해서 제 호위로 따라오신 분들이니까.”
태월은 반쯤 열린 문을 닫고는 한차례 둘러보았다.
‘그런데 저놈들은 표정들이 없는데, 영혼이 거의 악귀 수준이네? 혹시 그 닌자들인가?’
그 순간 태월의 문신이 꿈틀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