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세 자루의 칼
아루와 아사코는 세일러문 복장에 목검을 들고 있었다.
아마 연극반에 있던 걸 입고 온 걸로 보이는데, 저렇게 입고 다니면 일행이 창피할 것 같았다.
“악당이 보면 먼저 도망칠걸? 그러니 정체를 꼭꼭 숨겨야지.”
라고 아주 좋게만 이야기해주는 태월이다.
“호호, 그렇네. 도망가게 해선 안 되지.”
아사코의 표정이 그제야 밝아진 것을 보면, 아루가 강요해서 입었던 것 같다.
속옷도 입지 않은 둘이 저렇게 입으면 민폐다.
거기다 가검도 아니고 목검을 들고 저러는 걸 보면, 철없는 아이 같은 아루다.
결국 그 둘은 트레이닝복으로 바꿔입었지만, 손에선 목검을 여전히 들고 있다.
괜히 불안한 마음이 든 태월은, 아사코에게 체조선수의 재능도 주게 되었다.
불의 정령인 아루야 문제가 없지만.
“12구역엔 구조원들이 그리 없네?”
“내가 수색을 해보고 올게.”
차 안에서 정령 본체로 돌아간 아루는, 곧장 밖으로 향했다.
“아사코? 몸 적응은 이제 완전히 끝났어?”
“네, 원래 제 몸 같아졌어요.”
“몸속 장기는 어떤데?”
“내부 장기도 조합했던 건데, 삼켜지고 나온 후에 운동선수 정도는 되는 것 같아요.”
“너도 아루의 정령 본체가 보이지?”
“네, 삼켜졌던 것 때문인지, 귀신도 보이는걸요.”
문신의 새로운 기능을 추가로 알게 된 것이다.
‘아니 그럼 용병들도 귀안이 생겼단 거잖아. 귀신이 되어 영체를 경험해봤던 터에 몸속으로 다시 들어갔고, 그 과정에서 문신 자체가 그 길을 열어 준거군.’
아사코와 대화를 나누던 중에, 태월에게 아루의 텔레파시가 왔다.
“어? 아루가 누군가와 붙었네. 어서 가보자!”
태월은 기감을 확장시켜 아루의 위치를 확인하고, 곧장 그리로 차를 몰았다.
“어? 저기 불덩이가 날아다녀요!”
아사코의 말대로, 초저녁 하늘에서 불덩이 3개가 춤을 추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악령 둘과 악귀 20명이 묘한 진법을 쓰며, 아루가 쏘아대는 불의 공을 막아내고 있다.
또 그걸 지켜보는, 대악령 하나도 있었고.
그러다 차가 다가오자 대악령이 고개를 돌리다가, 펄쩍 뛰어온다.
“아사코! 몸을 얻었었구나! 그 몸! 그 몸! 내가 얻으려던 그 몸인 거구나! 감히 네년 따위가!”
옆에 태월이 있음에도, 그 악령의 눈엔 다른 건 안 보이고 오직 아사코만 보였다.
그만큼 긴 세월 집요하게 추적해온 몸이었다.
그리고 몸을 뺏으려 쏜살같이 달려오고 있다.
“미친년이네? 겨우 악령 주제에 누구에게 년 타령이야?”
“헉! 네놈은 누구냐?”
그제야 태월을 느낀 악령은, 쏘아져 오다가 갑자기 멈추었다.
태월이 기운을 감추고 있다가, 이제야 드러냈기 때문이다.
악령들은 악귀들과 달리 아루처럼 영체 상태로 있었다.
“나? 바로 이런 사람이다! 가랏!”
-슈아악! 슈악! 휘익!
도깨비 문신의 갑작스런 공격에도, 대 악령은 순간의 기지를 발휘해 피해냈다.
그런데 유턴을 할 거라 봤던, 도깨비가 그대로 지나쳐 가버렸다.
그리고는 아루와 대적 중이던 악귀들 다섯을, 뒤에서 급습해 그들을 삼켜버렸다.
악령 둘과 악귀들의 진법으로 힘들어하던 아루를 도운 것이다.
그 덕분에 악귀들의 진법이 일시적으로 깨지며, 아루는 태월 쪽으로 합류할 수 있었다.
“저도 도울게요.”
목검을 들며 의욕을 불태우는 아사코다.
“넌 차 안에서 나오지 말아. 그게 우릴 돕는 길이야. 넌 귀신에게 타격을 줄 힘은 아직 없어. 마음만 받으마. 이 종을 손에 들고 있도록 해. 혹여 악귀나 악령이 다가오면 흔들 순 있을 거야.”
일시적이긴 하지만, 태월은 종에 영혼 에너지를 씌워 아사코의 손에 쥐여줬다.
홍지연이 딸인 설희에게 준 방울과 종이 있었는데, 그중 하나인 황금빛 종이었다.
입술을 꼭 깨문 아사코를 홀로 두고, 태월은 차에서 내려섰다.
죽통은 이럴 때 당장 도움은 되지 않는다.
멈춰있거나 느린 움직임의 귀신들에게 가능한 것이지, 악령처럼 빠르게 움직이는 상태선 타깃이 잡히지 않는다.
태월은 품에서 두 뼘 크기의 묵색 피리를 꺼내 들었다.
낙원 악기 상가에서 귀신 붙은 기타와 함께 샀던, 도화적으로 이름 붙인 그 피리였다.
입에 물고는 파사곡이라 불리는 곡을 연주했다.
이 악보는 호족의 보물창고에서 얻은, 철편에 적혀있던 5장의 악보 중 하나였다.
-삐르르르 삐리리리 삐르삐리리 ♬♪
영혼 에너지를 두른 피리에서 푸른색을 띤 것들이 튀어나오며, 악귀와 악령을 동시에 공격해 들어갔다.
음파 공격인데 태월이 실전에선 처음 시도해보는 것이다.
사악한 영혼에게만 타격을 주는 음곡이었다.
그와 더불어 유령체가 된 도깨비 문신은, 부자연스러워진 악귀들을 먹어 치우는 중이었고.
아루는 인간 본체로 돌아와 옷을 걸치고는 뒤따라 내렸다.
목검에 불의 기운을 두르고 악령 둘을 상대했다.
본국검법을 배운 지 얼마 되지도 않았지만, 휘두를수록 자연스러워지고 있다.
정령 본체로 싸우는 게 나은데도, 저렇게 미녀 검객 코스프레를 하고 싶었던 아루다.
불리하면 다시 본체로 돌아가겠지만.
“이, 이놈! 네놈은 혹시 호족과 관계가?”
악귀들이 이제 얼마 남지도 않았기에, 태월은 피리를 입에서 떼었다.
태월의 음공 다루는 능력이 미숙하여, 악령들에게는 크게 타격을 주지 못했다.
“내가 호족과 연관된 것은 어찌 알았지?”
“그 음곡은 옛날 호족 영매술사가 썼던 적이 있었지. 조상들을 곤란하게 할 정도의 음공은 그때뿐이었으니까.”
“아, 그럼 네년은 무녀 중 하나였구나. 이치코냐 미코냐?”
“호족은 여자로만 구성되지 않았었나? 네놈은 많은 걸 알고 있구나. 호호호! 너를 잡아야 할 이유가 하나 더 늘었구나.”
대악령의 붉은 눈이 더욱 번들거렸다.
‘진법을 악귀들이 구사할 때부터 이상하다 했더니, 역시나 일본의 무녀였구나. 그런데 무녀가 죽은 후, 악령이 되기도 하는가 보네? 악신이라도 모신 무녀였나?’
무녀 악령이 그에게 쇄도하자, 태월은 묵색 도화적을 치켜들고 휘둘렀다.
-카카캉! 파파팡! 파앙!
무녀 악령의 길게 자란 손톱과 피리가 부딪쳤다. 불꽃이 튀며 공수가 이어졌다.
게다가 피리는 단순하게 휘두르는 용도의 무기로만 쓰이는 게 아니었다.
휘두르는 피리의 구멍을 따라 공기가 통과할 때마다, 그곳에서 음파가 튀어나와 악령의 몸을 때린다.
그로 인해 뒤로 잠시 물러난 악령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 피리! 예사 피리가 아니구나! 대체 그 정체가 뭐지?”
“나도 궁금해하고 있지. 어쨌든 미친개를 패는 데는 적격이야.”
“그것도 내가 취해주마. 어디 미친개에게 제대로 물려 봐라!”
무녀 악령이 손톱을 거두더니, 악령 자체가 한 자루의 칼로 변했다.
“호호호, 마사무네의 요검이다. 1만 명의 영혼을 먹어 치운 전장의 검이지!”
대악령이 1m의 칼로 변하자, 다른 악령 둘도 칼로 변했다.
칼의 길이가 대악령보다는 조금 짧았다.
이들의 칼은 도에 가깝지, 실제로 검은 아니었다.
아루의 목검이 그 검들과 부딪치자, 두 번 만에 반이 잘려 나가버렸다.
“이익! 미녀 검객이 이렇게 끝나다니….”
위기를 느낀 아루는 곧바로 정령 본체로 변해, 칼로 변한 악령에게 불 공격을 다시 했다.
“진짜 그 피리가 탐나는구나. 요검에도 흠집 하나 안 나다니! 네 몸뚱이도 그리 단단한지 어디 한번 보자!”
대악령은 가능하면, 피리와 직접 정면으로 부딪치는 건 피하면서 공격해 들어왔다.
태월은 검도의 재능을 본격적으로 배우지 않은 걸, 지금 후회하는 중이다.
무기술로만 상대하다 보니 활용이 너무 부족했다.
무녀는 긴 세월 검술을 익혀왔는지, 그녀의 공격은 날카로워졌고 점점 몸은 베어져 갔다.
아직은 치명상을 피하고 있지만, 언제까지 가능할지는 모를 일이다.
뒤로 물러나면서 품속에서 꺼낸 염주 알로 공격을 해봤지만, 상대는 칼을 휘둘러 잘라낼 뿐이다.
태월이 공격할 곳엔 칼밖에 없어서, 타격을 입힐 만한 방법이 애매했다.
피리로 저 칼을 부숴야만 하는데, 상대는 부딪치는 걸 피하고 있다.
10여 분이 지나자, 태월은 순간적으로 다리가 꼬였다.
돌부리에 걸려 뒤로 넘어지는 사태까지 온 것이다.
칼에서 웃음소리가 들렸고, 태월을 향해 휘둘려지려던 찰나였다.
-휘익! 땅! 때에엥~
황금빛 종이 허공을 가로질러 칼과 부딪혔다.
그리고 범종 같은 큰 소리가 나자, 순간적으로 칼이 멈칫한다.
요검의 모든 기능이 찰나의 순간 멈춘 것이다.
그 빈틈을 뚫고 그 순간 칼의 뒤로, 2m는 넘을 듯한 거대한 입이 솟았다.
-슈아악! 꿀꺽!
칼에게 어떤 비명조차도 나오지 않았다.
만일 요검의 기능이 잠깐이라도 멈추지 않았다면, 문신의 시도를 또 교묘하게 피했을 대악령이다.
“괜, 괜찮으세요?”
아사코가 다가와 태월의 몸을 일으켜준다.
“하하, 정말 고맙다. 위험할 뻔했어.”
태월은 일어나면서 아사코를 안아 등을 몇 번 두드려주었다.
사실 누워서도 한 번 정도는 피할 여력은 있었다. 이어진다면 장담할 수 없었지만.
***
그 순간 태월의 머릿속으로 검을 휘두르는 무녀가 나타났다.
그의 앞에는 노인이 서서 그 자세를 고쳐주고 있다.
“이 검술은 백제 검술이라고 한다. 태을선인이 남겼다고 하여, 태을검술이라고도 불리지.
지금 조선에서는 이 검술서가 남아 있지 않을 거야. 마지막 생존자로 추정되는 이도 죽었으니….”
“그곳에 있던 게 거의 조선에서 가져온 것이었나 봐요?”
“그것들을 구하느라 우리의 검객들이 무려 100여 명이나 죽어 나갔어! 그러니 모든 걸 잊고 이 검술에 매진하거라. 무녀 일은 그 이후에 하면 된다.”
다시 검술이 재연되었고, 세월이 흘러 10년이나 수련해서야 최상승의 길에 들어선 그녀다.
축하해주는 스승은 이제 죽었다.
스승의 무덤 앞에서 술을 따라주고 있는 그녀의 얼굴이, 서서히 태월로 변했다.
***
고개를 몇 번 흔들어 정신을 일깨운 태월은 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행히 아루가 잘 막고 있었고, 주변의 악귀들은 남아 있지 않았다.
태월까지 합류하자 요검들은 정신을 못 차렸고, 그 틈 사이로 두 칼은 문신에 의해 차례차례 삼켜졌다.
또 한 번 머릿속으로 장면이 이어졌다.
‘이놈들은 검술보다는 진법을 익혔었네.’
“어? 태월? 옷이 온통 핏자국이야! 얼마나 다친 거야?”
“하하, 살갗만 스친 정도야. 다행히 아사코가 도와줘서 이길 수 있었어.”
“야 이 악령들 무시무시하던데? 지금껏 싸운 애들은 아무것도 아니었어.”
“몇백 년 넘은 애들이더라. 조선 시대에 검술을 배웠다고 하는 걸 보니.”
“그래도 상처는 봐야지. 덧나면 골치 아파!”
결국 두 여자에 의해 태월은, 차 안에서 팬티만 걸친 채로 소독을 거쳐 붕대를 감게 되었다.
옷은 차 안에 있던 겉옷 하나만 걸치게 되었고.
바바리맨이라고 놀림을 받던 와중에, 문신이 꿈틀대더니 토해내기 시작했다.
-우웨엑! 웩! 꺼어억! 퉁! 퉁퉁!
뒷좌석 차 시트 위로 3개의 물건이 떨어졌다.
“우와! 아까 그 칼들이야!”
“요사한 기운이 사라졌어!”
두 여자가 칼 하나씩을 손에 잡으려고 하자, 태월은 다급히 소리쳤다.
“위, 위험해! 기다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