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쓰레기 재활용
러시아에서 가족 외엔 모든 연락을 끊고, 알혼섬 개발에 힘을 보태고 있는 태월이다.
11월이 중순이 되어 사휴르타 선착장의 규모는, 항구에 버금갈 정도가 되었다.
아직 알혼섬으로 가는 다리는 완성이 되진 않았지만, 연일 방문하는 관광객은 과거보다 20배는 넘어섰다.
BATR Bridge는 내년 7월에 완공 예정이다.
알혼섬에 있는 칭기즈칸 박물관은, 며칠 전에 문을 열었다.
TW건설이 맡아 지은 것인데, 한국의 빨리빨리 문화가 이곳에도 발휘된 것이다.
그리고 그 칭기즈칸 박물관 옆에는, BATR 박물관이 함께 세워져 있다.
칭기즈칸 박물관 관장은 안드레이가 맡았고, BATR 박물관 관장은 라리사가 임시로 맡았다.
아직 적임자를 구하지 못해서, 라리사가 그 역할을 대행하는 중이다.
“바이칼 관광열차는 이제 정기적 운행이 시작되었습니다. 일일 4회 운행에 맞추었습니다.
역사도 다 새로 지었고, 선로는 전부 신형으로 교체했습니다.”
“하보이 항구는요?”
“하보이곶에 항구를 신설하는 것이 제일 힘든 공사였지만, 배를 띄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전체 공사를 마무리하려면, 앞으로 3달 정도는 더 소요될 것입니다.”
처음엔 2차대전 때 사용되었다가 폐쇄된, 빼시얀카의 선착장을 항구로 쓰려 했었다.
그러나 미래를 생각해서 항구건설이 난해한, 하보이곶으로 변경한 것이다.
“잠수함 관광은 언제부터 출항입니까?”
“다음 달 초로 예정되었습니다. 퇴역한 경험자들을 찾느라, 시간이 오래 걸린 것입니다.”
“충분한 실전 연습을 거치도록 하세요.”
“네, 그렇게 지시해 놓았습니다. 아 그리고 알혼 경비대에서 주문한 신형보트 20척은, 3일 후 도착 예정이랍니다.”
알혼 경비대는 알혼섬의 자치 방어를 위한 사설 경비단으로, 총 1천 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실전 무기까지 갖춘 경비대로서, 박물관 도적단 난입 사건과 유람선 피격사건을 제지한 경력도 생겼다.
“보육원과 학교들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습니까? 재단 설립된 지 세 달이 넘었는데요.”
BATR재단이란 곳이 설립되었고, 보육원과 초⸱중등⸱고등 그리고 대학까지 세울 예정이다.
“학교의 명칭은 바이칼 초·중·고 그리고 바이칼 대학으로 낙점되었습니다. 내년 6월 개교를 목표로, 초등 중등 고등학교부터 출범합니다.
그리고 BATR 보육원의 총인원은 6천 명으로, 9월부터 수용하고 있습니다.”
“절반이 다른 도시에서 온 아이들이죠?”
“네, 그렇습니다. 모스크바 쪽이 제일 많습니다. 정부의 도움으로 홍보가 잘 되었습니다.”
“나이에 맞게 공부를 해야 하고, 또 그에 적합한 일자리도 만들어줘야 합니다.”
“알혼섬 자체만으로도 일자리는 충분합니다.
바이칼 교육 마을에, 정부가 많은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습니다.”
바이칼 교육 마을은 보육원과 학교 시설이 총 망라된, 알혼섬 내 10만 평의 땅 위에 세워지고 있다.
완전히 완성된 것은 아니지만, 1년 이내로 마무리가 될 것이다.
“알혼섬 인구가 아직 많이 부족하지요?
일단 3년 내로, 총 10만의 고아들을 받아들일 겁니다.”
“헛, 그러면 러시아 정부에서 의구심을 가질 수 있습니다.”
“상관없습니다. 그렇게 알고 필요한 준비를 하도록 하세요.”
부랴트 공화국에서의 공동개발 사업은 순항 중이었다.
나오는 지하자원은 전량 한국으로 보내고 있었는데, 그걸 TW에서 받아서 국내에 판매하고 있다.
TW건설은 부랴트 공화국의 도로 사업과 교량 사업에도 뛰어들었다.
건설비용이 부족했던 부랴트는, 그 비용으로 4곳의 광산을 TW에 넘겨주었다.
***
1995년 새해를 러시아에서 맞게 되었다.
-띠리링! 띠리링!
“엄마?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하하, 아니에요. 여긴 문제 없이 잘 진행되고 있어요. 설희도 잘 지내고 있죠? 네? 그들이 왜 나를 찾아요? 아, 무슨 일인진 알겠네요. 네, 자주 연락드릴게요. 네, 네. 알았어요.”
태월이 살려준 20명이 최 검사에게 연락했다는데, 꼭 뵈었으면 한다고 전해왔다.
아마 귀속감이 있어서 그리했을 거라 짐작하는 태월이다.
그 외에도 여러 곳에서 연락이 왔었다는데, 차차 해결하기로 했다.
태월은 홍미연에 이어 박승철과 조민희에게도 새해 안부 인사를 드렸다.
그리고 오랜만에 큰 스님에게도 연락을 드렸다. 10월에 한국에 갔을 때, 큰스님은 티베트에 볼일이 있으셔서 해외 출타 중이셨다.
“아카? 별일 없지? 어? 진짜? 이달 안에 그게 완성되면 굉장한 거네? 세계 무역기구? 아하 그랬구나. 러시아에 있다 보니 오히려 해외정세에 더 어두워졌네. 알았어. 안부 전해줄게.”
아카가 이달 안에 완성하는 것은, 백색 영혼으로 만드는 인공지능이다.
초기 모델이긴 하지만, 현재 슈퍼컴퓨터보단 10배 이상 뛰어난 성능을 갖추고 있다.
1995년 1월 1일 새해엔 두 가지 이슈가 있었다.
하나는 세계 무역 기구가 발족한 일이고, 다른 하나는 유럽연합에 있었다.
스웨덴, 오스트리아, 핀란드가 EU에 가입한 날이다.
리스트비얀카로 갈 일이 생긴 태월은, 집에서 나오면서 근처에 있던 택시를 불렀다.
아루와 아샤는 알혼섬에 들어가 있었고, 태월은 저녁에 합류할 예정이다.
“리스트비얀카로 갑시다.”
“네,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차는 출발하였고 태월은 지나가는 차창 밖의 눈 쌓인 풍경을 보며, 올 한해 해야 할 일들을 생각해냈다.
“저기 손님? 눈이 와서 차가 멈춘 거 같은데, 저 앞에 있는 손님도 같이 태워도 되겠습니까?”
“네, 그러세요.”
러시아의 택시들은 종종 합승을 권하기에 그러려니 했다.
남자 둘이 뒷좌석으로 들어오자, 택시는 다시 출발한다.
그런데 그 두 남자 중 하나의 영혼이 꽤 탁한 진회색이다.
다시 바라보려는데 목덜미가 따끔했다.
그리고 주변이 뿌옇게 변했다.
주변이 잠시 소란스러워 실눈을 떴다.
‘아, 내가 방심했구나. 마취됐었네. 저들은 모르는 걸 보니 마취가 빨리 풀린 모양이야.’
태월의 몸은 일반 사람들 몸과는 매우 다르다. 웬만한 독극물은 도깨비의 문신이 처리해버린다. 마취액이 독이 아니다 보니, 그걸 전부 방어 못 한 것이다.
셋이 영어로 떠들고 있다.
‘저놈들 한 놈만 러시아인이고, 둘은 미국인인가 보네?’
“어이, 아르세니! 지금 다른 동료들은 뭘 좀 찾았대?”
“서책은 못 찾나 보던데? 다른 년들이 가지고 있으려나? 그 중국어로 적힌 책은 뭐길래, 그리 애타게 찾을까. 그럼 이놈만 데리고 가야 하려나?”
“일본 애들이 백만 달러를 줄 때는 다 이유가 있는 거 아니겠어? 그럼 반밖에 못 받잖아. 그래도 이놈 한국에선 성자라고 알려진 놈이야. 죽은 사람을 살렸다 하던데. 너무 싸게 우리가 일해 주는 거 같은데?”
“얘 여동생이 꽤 보기 드문 미인이더군. 우리가 납치해서 좀 가지고 놀다가, 일본에 넘겨주는 건 어때?”
이미 태월의 신분까지 알고 있는 놈들이었다.
‘이놈들 대체 누구지?’
설희까지 알고 있다는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직 일본 애들에게 정보를 넘기진 않았어. 성자를 추적하란 소리에, 김포까지 따라갔던 거고.”
“일본 애들은 뭘 알고 이놈을 추적하라고 했을까? 뉴스엔 얼굴도 제대로 안 나오던데.”
“죽은 사람을 살린 것에, 의심했나 보던데. CIA에서 정보를 얻지 못했다면, 우리도 이렇게 추적하지 못했을걸. 내 전직 덕분인 줄 알라고.”
“하하, 그깟 CIA가 뭐 대수라고? 내가 KGB에 있을 때는 참 많이 날려줬는데.”
그들의 대화 속에는 많은 정보가 들어있었다.
“저놈 언제 깨어날까?”
“코끼리도 나뒹구는 양이니 앞으로 두 시간은 걸릴걸? 너무 강한 걸 주입했나?”
“뭐든 부족한 것보단 안전한 게 낫지. 그런데 이 통은 뭔데 들고 다녔지? 아무것도 없잖아!”
죽통을 거꾸로 들고 쏟아보는 전직 KGB 아르세니다.
그들의 눈에는 영혼들이 보일 리가 없었다.
다행인 건 태월이 만만한 16세 동양인 소년이라 여겨, 손만 묶어놨다는 것이다.
CIA나 KGB 현장 요원이었다는 것에 대한 과한 자신감이었다.
도깨비 문신에 영혼 에너지를 두르고, 몇 번 휘젓자 손목의 끈이 떨어져 나갔다.
“학교에 갔다 올 테니 잘 지키고 있어.”
“그 아샤란 여자애 잡는 데 한스랑 같이 가는 건가?”
“어, 자네보단 얼굴 깔끔한 한스가 접근하기는 낫지.”
“이런 제길…. 빨리 다녀오기나 해.”
둘이 빠져나가자 한가해진 아르세니는, 태월을 힐끗 한 번 보고 나더니 드럼통 난로에 장작을 몇 개 던져 놓는다.
그리고 라디오를 틀어 신나는 댄스 음악을 듣고 있다.
전직 KGB 현장 요원이었던, 글리코프의 재능을 쓸 필요도 없었다.
발걸음을 소리를 완전히 죽여 가까이 다가간 태월은, 뒤쪽에서 발을 날려 옆 턱을 강하게 타격했다.
발에 영혼 에너지를 두른 파워는 그만큼 강력했다.
두 바퀴를 구른 후 뻗어 버렸다.
“KGB 좋아하네.”
태월은 쓰러진 아르세니의 목을 감아, 숨이 멎게 했다.
유령 상태의 영혼의 보이자, 태월은 바닥에 놓여있던 죽통을 들어 주술을 읊었다.
구슬 하나가 죽통에 추가되었다.
동료 중 유난히 탁했던 그의 영혼이기에, 다시 꺼냈을 땐 구별이 쉬웠다.
“이대로 쓰면 사고 치겠네.”
태월이 문신 앞으로 탁한 영혼을 들이밀자, 입이 나타나 꿀꺽 삼키더니 바로 내뱉는다.
아이가 사탕 한 번 빨아먹고 내뱉는 식이다.
그래도 그 짧은 순간에 탁한 기운은 사라졌다.
시체가 된 아르세니의 입에 정화된 구슬을 물렸다.
2분 정도가 지났을 때, 아르세니의 눈꺼풀이 조금씩 떨려 온다.
금방 죽었다가 깨어나기에, 아르세니는 체력 소모가 그리 없었다.
“아르세니 일어나!”
태월이 그를 발로 툭툭 걷어찬다.
“윽 누, 누구야! 어? 네놈은?”
“뭐? 다시 말해봐!”
태월도 직접 진행해보기는 처음이다.
“아, 내가 왜 이러지?”
혼란스러운지 머리를 세차게 흔든다.
“내가 누구지?”
“마, 마스터!”
“오늘부터 넌 새로 태어난 거야. 네가 가진 기억은 그 몸의 주인 거야. 현재의 너랑은 다른 나쁜 놈이었어. 알아듣겠지?”
아르세니는 그전 기억으로 인해 거부하고 싶었지만, 태월의 말을 부정하려고 하니 몸이 굳었다.
그러다 포기하고 나니 마음이 편안해지고, 몸이 다시 움직여졌다.
그리고 자신의 영혼이, 새로운 몸에 들어왔다고 착각하게 되었다.
“내가 너의 영혼의 주인이다. 넌 거역할 수가 없어. 이제 새롭게 살자. 알겠지?”
“네, 마스터!”
“오늘 나갔단 놈들은 돌아오면 다 잡아야 해.
그들에게도 안식의 평화를 주고 싶지?”
“네! 꼭 그러고 싶습니다.”
특별한 법칙이 있는 게 아니라, 하나의 세뇌방식을 썼을 뿐이다.
‘나쁜 놈이라서 이렇게 복잡한 거 같은데?’
“마취총은 따로 없나?”
“두 벌 있습니다.”
전직 KGB 현장 요원이었던, 글리코프의 재능 중 하나인 무기술이면 쓸 수 있으리라.
“그럼 그걸로 일망타진을 해서, 전부 새로운 영혼을 주도록 하자.”
“네, 마스터!”
“그 몸의 주인이 어떤 놈이었어?”
“아주 쓰레기였네요? 어떻게 이렇게 살았을까요? 한심하군요.”
“그래도 앞으론 그 몸으로 살아야 해.”
“네, 몸 튼튼한 거는 쓸만하네요.”
아르세니에게 관련 정보를 듣고 있는데, 차가 오는 소리가 들렸다.
“자, 준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