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영혼 수집기?
태월은 궤짝의 봉인을 뜯어버렸다.
봉인 자체에는 꽤 센 기운만 있었지만, 도깨비를 믿고 연 것이다.
궤를 열어젖히자, 그 안에는 검은 대나무로 만든 듯한 길쭉한 통이 눕혀져 있다.
통의 지름만 해도 20cm는 되어 보인다.
겉면에는 부적의 글귀 같은 것들이, 잔뜩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그 하단에는, 책자 한 권과 서신으로 보이는 여러 장의 종이가 있었다.
“다른 건 문제가 없는데, 이 검은 통에서 기운이 느껴져. 영혼 같은 느낌?”
“아카 언니가 있었으면 바로 알아봤겠네?
나도 느껴지긴 하는데 정체는 잘 모르겠어.
정령 본체로 이 속에 들어갔다 올까?”
아루의 넘치는 의욕에 태월이 손을 젓는다.
“아니, 정체도 모르는데, 괜한 위험은 자초하지 말자. 일단 이걸 집으로 가져가서 살펴봐야겠어. 여긴 사람들이 오게 되면 곤란해.”
“내용물이야 우리가 들면 이상하게 보이진 않겠네. 그런데 이 거북이 궤짝은 어떻게 해? 귀해 보이는데 버리고 가기도 뭐하네.”
아루의 말대로 잘만 손질하면, 꽤 고풍스러운 장식품이 될 듯했다.
“집에 가져가서 골동품으로 장식해도 될 거 같긴 해. 나루터 옆 소각장에 과일 상자들이 몇 개 버려져 있던데? 그걸로 감싸면 되지 않겠어? 크기 비슷한 걸 찾으면 될 거야.”
라리사가 밖으로 나가서 가져온 건, 종이로 만든 두꺼운 사과 상자다.
상자 안에 넣으니 쏙하고 들어가, 오히려 공간이 남았다.
“이건 내가 혼자 안고 갈 테니, 다들 선착장에서 배를 기다리자.”
30분 정도를 기다리니, 황포돛배에 오를 수 있었다.
향화객들도 종종 과일 상자를 고란사로 가지고 가기에, 태월 일행을 이상하게 보진 않았다.
구드레 선착장에서 내린 태월은, 주차시켜 놓은 차에 상자를 싣는다.
라리사의 능숙한 운전 솜씨 덕에, 일행은 편안하게 서울 설희네로 돌아왔다.
태월은 조민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고고학 발굴팀 선정이 끝났나요?
그 사람들이 러시아로 출발하려면 한 달은 넘게 남았으니, 내일 홍대입구역 앞으로 오라고 하세요. 백제 유물 묻힌 곳을 찾았어요.
석준형이 인솔하면 될 거예요.
네, 그렇게만 전해주세요.
3일 후쯤 집에 들어갈게요. 그때 봬요.”
이번 발굴에 나올 부장품은, 회사 명의로 전부 국립 박물관에 기증할 생각이다.
사실 발굴이랄 것도 없다. 도굴꾼이 얌전히 모아 놓은 것이니….
그 당사자도 죽은 지 24년이 지났으니, 일본에서도 알 수가 없을 것이다.
“서책은 중국 것이고, 서신은 두 가진데 하나는 중국 다른 하나는 일본이네.”
“뭐라고 쓰여 있어?”
“중국 강소성 모산에 있는 도교의 한 곳인 모산파에, 일본군이 들이닥쳐서 빼 왔다고 하네.
청일전쟁 때 모산파란 곳을 알게 되었대.
그 후 중일 전쟁인 1937년에, 강소성을 일본이 잠시 점령했었어. 그때 이 물건을 가져왔나 봐.”
“아, 모산파면 그 강시를 부적과 모산술로 제압하는 그곳인데? 개광부적, 동전검, 태극팔괘경. 거기서 주로 썼잖아.”
모산파가 있는 모산은, 기암괴석이 많고 풍경이 아름다운 도교의 명산이다.
모산술은 4세기 동진 시대부터 형성된 술법이다.
강시가 나오는 중국 영화 귀타귀가 1980년대에 만들어져, 강시가 한때 유행하기도 했다.
지금도 중국 강소성 모산에 가면, 웅장한 규모의 도교 사원을 볼 수가 있다.
“키티가 호족 출신이라서, 술법에 대해선 관심이 많았나 보네.”
“잉, 또 키티 타령이야? 그래서 오빠는 왜 이걸 가져온 거래? 대체 뭔데?”
“영혼 포집기? 아니 수집기라고 해야 하나?
영혼의 기운을 다룰 줄 아는 사람이, 이 포집통을 쓰고 술법을 외우는 거야. 그러면 영혼이 이 안에 모이나 봐.”
“모아서 뭐 하는데? 오빠처럼 에너지로 쓰나?”
“아 나랑은 전혀 달라. 죽은 사람이나 동물에게, 수집한 영혼을 넣을 수가 있어.
그럼 그 존재가 영혼을 가지게 되는 거지.
그리고 귀속이 되어버려.”
“헐? 일본의 술법사나 무녀들에게 넘어갈 뻔한, 아주 위험한 물건이었네?”
“어쩌면 그들이 1979년에 그런 일을 벌인 것도, 이것과 연관이 있었던 것 같아. 이거 하나 가지곤 영혼 수집이 어렵거든. 엄마의 영매술이 필요했던 것 같아.”
“그래서 본가도 뒤졌었나 보네. 혹시 호족에게 넘어갔을까 봐.”
“이 일본어로 쓰인 서신의 내용에, 호족 이야기도 잠시 나와. 영매술도 얻으라고….
결국 두 가지 중 어느 하나도 얻지 못했지만.”
“혹시 이 안에 든 게 그러면?”
“모산파에서 수집한 영혼이겠지.”
“그럼 모산파에서도 영매술사가 있었네?”
“한 사람이 있었는데, 쳐들어온 일본군들과 싸우다가 총에 맞았나 봐. 결국 영매술사를 확보 못 한 거지. 그리고 술사의 구결도 얻지 못했고.”
“그 서책은 그 술법서가 아닌가 봐?”
“이건 제압하는 술법인 태극팔괘경이고 뒤쪽에 영혼을 수집하는 술법이 적혀있어. 영안을 가지고 그걸로 얻게 되는, 영매력에 관한 게 빠진 거지.”
“모산파는 도교 문파이면서 왜 이리 위험한 걸 만든 거야?”
“적힌 서신으로는 강시에게 쓰려고 했었다 하네. 죽은 자를 살릴 모양이었나 봐. 뭐 그래 봤자 다른 사람이 되는 거지만.”
태월이 죽통을 만지작거리고 있자, 아샤가 끼어든다.
“오빠? 그거 열어보려고?”
“영매력을 쓰지 않으면, 그냥 영혼일 뿐이야. 힘이 없어서, 누구에게 들어가거나 해를 끼치진 못한대.”
영매력은 태월에겐 영혼 에너지와 같다.
잡고 있던 죽통에서 봉인을 떼어내고 뚜껑을 열었다.
-샤리링! 샤링!
포집통에서 나온 것은 5개의 구슬이다.
하얀빛 푸른빛 노란빛 붉은빛 그리고 검정빛.
그것들이 통 밖으로 나오며 허공에 떠 있다.
크기는 전부 호두알만 했다.
“와, 너무 이쁘다. 그런데 이거 정령이랑도 비슷한데?”
아샤가 말을 하며 아루를 뒤돌아본다.
“아샤가 아카 언니 영령 본체를 못 봐서 그래. 영령 쪽을 더 닮은 거야. 색이 있는 게 특이하긴 하지만, 크기는 아카 언니보단 아주 작네?”
아루가 손가락으로 그들을 톡톡 쳐 본다.
살짝 밀렸다가 제자리로 다시 올 뿐, 별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태월은 그제야 아샤에게, 특이한 점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지금까지 우리야 아루의 영체를 볼 수 있어서, 아카가 본다고 이상하진 않았어.
아루가 자신의 영체를 의지로 드러냈다고 여겼으니.
그런데 지금 이 영혼들은 그런 의지가 없는 상태거든? 영매력을 더해야, 그때부터 누구나 눈에 보일 수 있게 돼.”
“어? 보, 보면 안 되는 거예요?”
아샤는 자신이 잘못을 저질렀다고 여겨, 말을 더듬는다.
“아니, 아샤가 잘못한 게 아니라, 단순히 궁금해서야. 어릴 때 귀신 같은 걸 본 적이 있어?”
“본 적은 없었어요.”
태월이 갸웃거리고 있자, 라리사가 나선다.
“태월 님! 그 성령초에 영안의 효능도 포함되어있습니다. 요괴들이야 원래부터 영안이 있어서, 그걸 효능으로 보지 않았을 뿐이죠.”
“아, 성령초가 대단하긴 하네. 닌자들이 그걸 알았다면, 성령초를 찾는 데 전력을 다했을 텐데.”
“그게 귀한 것이라니까요. 사람들 눈에 띈 게 거의 없을 거예요.
저희도 몇백 년 만에 처음 본 거거든요.”
태월은 서책 뒷장을 열어, 주술의 주문을 읽듯이 읊었다. 그러자 죽통이 살짝 빛나더니, 허공에 있던 영혼들이 통 안으로 들어갔다.
“색깔이 다른 이유는, 아무래도 영령인 아카에게 보여야 알 수 있을 듯해.
다른 건 모르겠고, 까만 거만 알겠어.
악귀보단 약하지만 비슷해.”
“그냥 보기만 해도 알아?”
“후훗, 문신이 살짝 꿈틀거리기도 했어.”
“호호, 양이 적어서 그냥 놔뒀으려나.”
태월이 생각해도 그런 것 같았다.
아카는 요즘 뉴욕 쪽에 머무르고 있다.
한국과는 14시간의 시차가 있다.
지금 밤 9시니 뉴욕은 오전 11시쯤이다.
그 지도의 결과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수집된 5개의 영혼 색에 관해서도 이야길 했다.
“응? 이틀 내로 온다고? 아니 갑자기? 아냐, 급한 일은 없어. 알았어, 그럼 기다릴게.”
“어머머, 아카 언니가 온대요?”
“영혼 이야길 하니까. 다른 일 다 미루고 온다고 하네? 중요한 일인가 보던데?”
“에이, 그러면 또 하루도 안 있고 가겠네요?”
“다음에 우리가 휴가 가서 보름 정도 있다가 오면 되지. 그땐 시간 내겠지.”
그날 밤은 아루랑 아샤가 한방을 쓰고 라리사는 설희의 방에서 잤다.
여전히 아샤는, 정령과 자는 습관을 버리지 못했다.
***
다음 날 최석준이 홍대 집으로 찾아왔다.
“형! 오랜만이네요? 잘 지냈죠?”
“하하, 작은 사장도 건강하네? 나야 뭐 너무 잘 지내서 탈이지.”
태월은 종이 한 장을 꺼내 그 자리서, 쓱쓱 그림을 그린다.
“여기가 고란사고요 이쪽이 정자예요. 여기서 아래로 40m 내려가다가, 비탈이 나오면 우측으로 꺾으세요. 그리고 30m를 그대로 가면 움푹 파인 곳이 있는데, 거기 파란색 락카 칠을 둥그렇게 해놨어요. 그 지점에서 3m를 파면 백제 유물이 나옵니다.”
“그림만 봐도 바로 알겠는데? 알았어. 회사 이름으로 진행하기로 했다는데, 다른 주의사항은 없어?”
“네, 그렇게만 하시면 돼요. 그럼 나중에 또 뵐게요.”
“그럼 바로 가볼게. 다들 도착할 시간이 되어서, 먼저 가서 기다려야 해.”
최석준이 돌아가자, 태월은 밤늦게까지 보던 책을 다시 꺼냈다.
그 모산파의 술법서다.
태극팔괘경의 필사본은 여러 권이 있었던 듯, 이것도 필사본이다.
다만 다른 것은 마지막 장을 떼어내, 손으로 직접 적은 술법서를 이어 붙였다는 차이다.
어떤 이유에선지 숨기려 했던 흔적이었다.
이어붙인 곳 제목도 태극팔괘경 해석본이다.
앞의 내용과는 다른 내용이 실렸음에도….
태월은 아침에 잡생각을 다 접고, 책에 몰입을 더해갔다. 점심시간을 지나 저녁이 다가왔음에도, 술법 속에서 모든 걸 잊었다.
저녁까지 설희는 음악 학원에 있었고, 아루와 라리사 그리고 아샤는 신촌을 쏘다녔다.
“으갸갸! 너무 앉아 있었나? 허리와 목이 뻐근하네. 그런데 몇 시지?”
-꼬르륵! 꾸륵!
시계를 보기도 전에 배꼽시계부터 울렸다.
사실은 오후부터 울렸음에도, 태월이 느끼지 못한 것이다.
시계를 보니 오후 6시였다.
“배가 고픈데? 에이, 조금 있으면 엄마가 올 테니 참지 뭐. 그런데 다들 아직 안 왔나 봐. 흠, 책에 깊이 빠져든 건 참 오랜만이다.”
30분 정도를 부엌에서 서성거리는데, 하나둘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시장을 봐온 엄마부터 악보 책을 든 설희.
그리고 쇼핑 가방을 든 세 명의 아가씨들.
“아들 부엌에서 뭐 해? 우유를 마셨네? 엄마가 얼른 저녁 차려 줄게.”
“밥은 제가 해놨어요. 다른 거 하시면 돼요.”
“호호호, 고마워! 우리 아들 웬일이래? 금방 할 테니 30분만 기다려.”
“오빠? 심심했지? 나 학원 이틀 빠지는 바람에 오늘은 밀린 거 다 하느라 늦었어.”
“나도 다른 거 하느라 바빴는데 뭐.”
“우린 오늘 연극이란 것도 봤어! 그리고 맛난 것도 얻어먹고 옷도 선물 받았지롱!”
아루의 이야기가 조금 이상했다.
“얻어먹고 선물 받았다고? 누가? 왜?”
“응? 두 시간 서 있으면 된다던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