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백마강 고란사
태월과 아샤의 반응에 오히려 더 놀라는 라리사다.
“왜, 왜요? 우리가 잘못 안 건가요?”
“아샤는 동생이잖아.”
“친동생도 아니잖아요. 그런데도 그 귀한 성령초를 머뭇거림 없이 먹이려 하기에, 반려자로 생각하는 줄 알았어요. 구미호에게 최고의 청혼 선물이 그 성령초거든요!”
“헐, 난 여우족도 아니고, 그게 그런 사연을 가진 약초인지도 몰랐다고. 엄마는 알았어요?”
“나야, 성령초에 깃든 사연은 선대에 들어서 알고 있긴 해, 그런데 그걸 아샤에게 준 건 지금 알았는데?”
“......”
태월은 어이가 없어, 말을 못 했다.
아샤만 얼굴이 빨개져서 허둥거리고 있었고.
그때 현관문이 열리며 아루가 들어온다.
“삽사리는 새끼를 언제 낳아요? 응? 분위기가 왜 이래? 뭔 일 있었어?”
“호호, 별일 아니야. 삽사리들이야 뭐 지들 낳고 싶을 때 낳겠지. 자 다들 들어가 자야지.”
아루의 등장으로 그렇게 해프닝은 끝이 났다.
아침에 일어나 아침도 먹고 가벼운 산책도 다녀왔다,
다 같이 모여 일월기공을 행한다.
이미 경험이 있던 일이기에, 느긋하게 점심때까지 여유를 가졌다.
그리고 아샤 때의 일이 또 나왔다.
-꺄아악!
홍미연도 아침에 들었던 터라, 당황하진 않았다. 그런데도 걱정되는지 제일 먼저 뛰어간다.
놀란 설희를 다독여 욕조로 갔다.
일행들은 창문도 열고 침대보와 이불은 마당으로 꺼내놓았다.
삼십 분 정도가 되자 문이 열린다.
한층 더 아름다워진 설희가, 엄마의 손을 잡고 거실로 등장했다.
“설희야 더 건강해진 거 축하해.”
“언니! 천사 같아요.”
“키티! 더 이뻐진 거 축하해!”
“응, 다들 고마워. 아깐 정말 놀랐는데.”
“어머, 우리 딸 시집가긴 틀렸다.
부담 가서 누가 데려가겠어?”
“응? 저 시집 생각 없는 거 알면서, 뭘 또 그래요?”
설희는 아빠 없이 태어났고, 이모들 이야기만 들어도 시집을 간 적도 없다고 한다.
그런 기억 때문인지, 결혼에 대해서 무척이나 회의적이다.
딸의 생각을 알고는 있으나, 그 당시 호족들은 그런 식으로 출산을 많이 했었다.
홍대에서 하루를 더 보내고 있는 오후에 미국에서 전화가 걸려온다.
-따르릉! 따르릉!
“여보세요? 어? 아카? 웬일이야? 잘 지내지? 오빠? 응, 여기 있어. 잠시 기다려!”
설희가 태월을 찾아 마당으로 나온다.
“오빠? 전화 왔어. 미국 전화야 빨리 받아!”
“어? 미국에서?”
태월은 삽사리들과 놀다 말고 뛰어 들어왔다.
“어? 아카! 그래 무슨 일 있어? 응? 그걸 이제 풀었다고? 하하, 나도 잊고 있었네. 팩스?”
옆에 서 있던 설희가 재빨리 번호를 적어준다.
“번호는 02-xxx-xxxx야. 어, 알았어. 확인하고 전화 줄게.”
-삐리릭! 삐리릭!
전화 끊은 지 1분도 되지 않아, 팩스가 울어대며 뭔가를 뱉어내고 있다.
팩스 용지를 쭉 하고 뜯어내니, 몇 줄의 글과 함께 지도와 해석본이었다.
거의 1m는 넘을 용량이다.
“오빠, 이게 뭐야?”
“전에 폐교 뒤쪽에 있던 동굴에서 내가 금괴를 찾았잖아? 그때 발견했던 지도야.”
“그 지도가 왜?”
“아카에게 해석을 맡겨 놨던 건데, 슈퍼컴퓨터가 이제 완성되어서 그걸 풀 수 있었나 봐.”
“슈퍼컴퓨터? 최근에 NASA에서 처음 제작한 거로 나오던데?”
1994년 미국 항공우주국(NASA)의 고다드 우주비행센터에서 구축한 것으로, 리눅스 기반의 슈퍼컴퓨터다.
베어울프 형 슈퍼컴퓨터로, 기존의 컴퓨터를 클러스터 형태로 연결해 만들었다.
“뭐, 시기상 비슷하게 개발했나 보던데? 아카야 만든 걸 비밀로 해야 하는 입장이니, 공개할 수 없는 거고.”
“그래서 그게 뭘 숨긴 지도인데?”
“잠시만, 좀 살펴보고 말해줄게.”
한참을 읽어보던 태월이 고개를 든다.
“부소산 고란사 쪽이야.”
“고란사? 노래에 나오는 그 고란사인가?
1954년 허민의 백마강이란 노래에 나오잖아.”
“응? 어떻게 나오는데?”
“흠흠, 백마~가아앙에~ 고요~하안 다알~밤~아, 고란사~아에 종소리이~가 들~리어 오~오면! 구고간자앙 찌저~지는 백제~꾸미 그~리입~꾸우나~ 아, 아, 아아아~”
“짝짝짝! 진짜 트로트 맛깔나게 하는데? 웬만한 중견 가수보다도 훨씬 잘하겠는데?”
“호호, 내가 다른 노래 공부하면서, 짬 날 때마다 트로트도 연습했거든!”
태월이 처음 듣는 노래지만, 설희는 목소리는 정말 처량하고 구슬펐다.
들으니 애절한 그리움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그때 현관으로 들어오다 노래를 듣던 아샤가 손뼉을 친다.
-짝짝짝!
“언니! 노래 너무 좋아요. 그다음도 불러주세요! 꼭요!”
“호호, 흠흠. 아아~ 아아아~ 달빛 어어린~ 그느을 속에서~ 불~러보자 삼처언 구웅녀어르 을~”
“2절!”
“백~ 마가아앙에~ 고요~ 한 다알~바아마 철갑오세~ 맺은 이이별 목~메어 우~울면 계백장군 삼척~검은 임 사랑도 끄~너었구우나 아아 아아아~ 오~천~겨얼사~ 피~ 흐을린~ 황사안 벌에서~ 불~러~보~자! 삼처언 구웅녀어어르을~”
-짝짝짝!
어느새 아루도 들어와서 물개박수를 보내고 있다.
태월은 설희가 많이 바뀌었다고 생각했다.
예전 같으면 낯가림이 좀 있어서, 이렇게 시킨다고 할 그녀가 아니었다.
태월의 시각으론 이런 것도 좋아 보이긴 했다.
“아이, 이 정도일 줄 알았다면, 녹음기를 가져올걸. 키티? 새로 불러주면 안 돼?”
“호호, 싫지롱! 다음에 할게.”
저녁을 먹은 후 태월은 팩스 용지를 다시 펼쳤다.
‘대체, 고란사에 뭐가 있단 거지? 삼천궁녀라도 나오나?’
그러다 해석본에서 어떤 글자를 발견했다.
“가루베 지온? 지명인가? 인명인가?”
태월은 거실로 나가 집 전화기로 아카에게 걸었다.
“아카? 가루베 지온이 뭐야? 사람 이름이라고? 난 첨 듣는데? 그럼 그 자료도 보내줘.”
몇 분 후에 팩스가 도착했다.
“음, 이거 일제강점기 때 일본 역사와 일본어를 가르치던 선생이었네? 그러다가 백제 무덤만을 골라 파헤친 역사적 도굴꾼?”
“얼마나 도굴했길래 역사적이래?”
“자기 입으로는 송산리 고분을 포함하여 100여 기를 안에 들어가 조사했대. 그리고 그가 찾아낸 건 백제 고분 1,000기라고 하네?”
아카가 보내준 그 자의 인터뷰 기사였다.
“조사를 한 거라며?”
“그런데 그 사람이 조사하고 난 후에, 고분들이 텅텅 비었단다. 그리고 일본 도쿄국립미술관과 와세다대학의 아이즈 야이치 기념박물관에 그의 소장품이 있대. 백제 유물만 몇만 점이란다.”
“도굴꾼 처벌은 없었나 봐?”
“오히려 그 공로로 일본대 역사학과 교수가 되었다고 하는데?”
“헐, 오빠? 나도 엄마에게 들은 게 있어.
당나라 역사서에 나와 있는, 백제 멸망 후 5개 도독부 위치를 아무도 밝히지 못하고 있대.
역사도 바꿔 버린 거 아닐까?
신라를 억압하고 중국까지 아우르는 해상왕국이라던, 그 백제의 수도.
그 수도의 인구 겨우 3만의 성읍이었다는 것도 말이 안 되잖아.”
수천 권의 실제 역사서를, 일제강점기 때 다 불태웠다고 하니 말해 무엇하리.
“뭐, 전라남도에 백제 유물이 이제껏 안 나오고, 오히려 고구려나 신라 유물만 나온 것도 이상하긴 하지.”
“오빠? 고란사에 갈 거야? 나도 데리고 가.”
아루와 아샤도 눈이 초롱초롱하다.
“뭐 다 같이 가는 거로 하자.”
***
백제가 함락당할 때, 삼천궁녀의 넋이 흰 꽃으로 피어났다 하여 지어진 정자가 백화정이다.
그리고 타사암이라 불리던 바위가 있다.
그곳에서 궁녀들의 떨어지는 몸이 꽃잎 날리듯이 보여, 낙화암이란 이름으로 바뀌었단다.
고란사 마당 끝엔 백마강이 흐른다.
절 뒤에 있는 고란초가 있는 약수로, 목을 축이는 태월 일행이다.
백마강 건너편으로, 황포돛배가 유유히 물살을 가르고 지나가고 있다.
“호호, 우리 갈 때도 저 배를 타고 갈 거지? 운치 있던데?”
“구드레 선착장까지 가야 하니, 그래야지.”
“아, 그런데 생각보다 고란사가 너무 작아.”
고란사는 1028년 고려 현종 19년에, 낙화암에서 떨어져 죽은 백제 궁녀들의 넋을 위로하기 지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낙화암에서 궁녀 3천 명이 줄 서서 뛰어내렸지? 십여 명도 힘들 건데.”
“중국 역사서에는 삼천이라는 말이 많다는 뜻으로 쓰인단다. 그리고 어디 역사서든 백제의 궁녀 삼천은 없었어. 조선 시대 시조 구절에 은유적 표현으로, 3천 개의 구름 같단 의미로 썼을 뿐이라 하네.”
그 당시 백제 수도인 사비성의 인구가 5만이다. 노약자를 뺀 성인 여성이 1만5천이었다.
그중에 궁녀가 3천이란 건 뭔가 이상한 거다.
“대학을 가게 되면 역사학이나 고고학을 전공으로 해야겠어. 칭기즈칸도 그렇고 이곳만 봐도, 뭔가 이상하고 답답해. 세상을 뒤지다 보면, 새로운 진실을 알 수 있지 않을까 해.”
“뭐, 오빠랑 잘 맞는 학문인 거 같긴 하네. 열심히 응원할게!”
“이 근처에 무엇인가가 있다면, 아루가 수고를 좀 해줘야겠어. 탐색 규모는 줄여야 하니, 일단 내가 돌아다녀 볼게.”
그 지도에는 이곳 표시 외에도 다른 표시가 있긴 했다. 그러나 보관상 문제인지, 처음부터 일부가 훼손되어 있었다.
태월이 30분 정도를, 절벽부터 시작해서 산길을 뒤지며 다녔다.
10여 분 정도가 더 지났을 때, 묘한 기운이 잡혔다.
“아루? 여기를 중심으로 사방 20m야. 그 아래를 조사해줘.”
비탈지고 움푹 파인 느낌이 드는 장소였다.
라리사는 만일을 대비하여, 백화정 주변에서 경계를 서고 있다.
평일 늦은 시간이라 그런지 관광객은 없었고, 고란사의 향화객도 없었다.
아루가 바위 뒤쪽에서 정령 본체로 몸을 변경했다.
-쉬리링! 쉬링!
20분 정도가 지날 때쯤, 아루가 고개를 빼꼼 내민다.
“태월? 여기 아래 3m야. 유적은 아니고, 골동품들을 모아 놓은 인위적 수직 동굴이야.”
“다른 건 없었고?”
“아, 이상한 기운은 있었어. 봉인해 놨는데도 꽤 느껴지던데?”
“그럼 그거만이라도 가지고 나와! 서적 같은 건 없고?”
“그런 거는 없고 금과 청동으로 된 것들이 좀 많아. 아 그릇들도 좀 있고. 그럼 그 봉인된 상자만 가지고 나올게.”
5분도 안 되어서 올라오는 아루다.
“아, 이것 좀 받아줘. 생각보다 무게가 있네.”
라면 상자 정도 크기의 궤짝이다.
“어? 이거 거북이 등가죽 아냐? 신기하게도 이걸로 궤짝을 만들었네?”
“에이, 이래서 무겁다니까!”
태월이 받아 드니 적어도, 20kg은 나갈 것 같았다.
아루니까 가능하지, 저 나이 여자애였으면 못 들었을 것이다.
물론 공간이동을 통해 가지고 나왔으니, 실제론 들고 있던 시간이 얼마 되진 않았겠지만.
“아루는 어서 옷부터 갈아입어.”
“응, 알았어. 그런데 그건 어떻게 하려고?”
“여기선 확인할 상황은 못 되는데 어쩌지?”
뭔가가 있을 거란 생각은 했으나, 이런 부피와 무게일 거라고는 예상 못 했다.
“음, 그럼 이렇게 해. 내가 배 타는 곳까지 이걸 이동시킬게. 그리고 이 상자를 위장시키자.
아, 내 옷 좀 들고 와 줘.”
“라리사가 먼저 그곳으로 이동해. 주변에 사람 있는지 살피고, 전화로 장소를 알려줘.”
“네, 그럼 지금 가볼게요.”
태월은 자신의 겉옷을 벗어 상자를 감쌌다.
그리고 그 수직 동굴 입구 쪽을, 락카를 뿌려 둥근 원을 그렸다.
잠시 후 전화를 받게 된 태월은, 아루에게 나루터 옆 간이 창고를 손으로 가리켰다.
아루가 먼저 떠났고, 그 뒤를 일행이 빠르게 이동해 비어있던 창고에 들어왔다.
“하아, 대체 뭐길래 봉인을? 이제 열 테니 뒤로 잠시 떨어져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