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다시 알혼섬으로
싸늘한 책임자의 말에 딜러가 놀라 딸꾹질을 한다.
“어휴, 긴장 풀어! 그리고 그런 말은 어디 가서 하지도 말아. 너 그 레이디 옆에 있던, 마른 체격 경호원 모르지?”
“누군데요? 아시는 분?”
“적에겐 아주 위험한 자야. 나도 소문만 들었는데, 스페츠나츠 출신인데 비밀병기였대.
옷 벗은 후에도 용병 생활로 100 kill을 한 사람이야. 그런데 그런 사람이 아가씨라 부르며 모시잖아. 그런데 무슨 생각을 더 해야 하냐?”
이들은 둘이 임시 고용 관계라는 것을 몰랐다.
설혹 알았다고 해도 아루에게 덤볐다간, 불에 공격당하고 물에 숨이 막혀버렸겠지만.
“그런데 저 카드 한번 뒤집어봐! 뭐였을까?”
“족보가 있었겠죠. 포커보단 못했겠지만.”
딜러가 테이블로 와서 아루의 패를 뒤집었다.
“헐, 이거 노 페어잖아!”
“푸, 하하하! 진짜 황당한 레이디네.”
‘아까 양심 어쩌고 하던 건 어딜 간 거지?’
딜러의 머릿속에 양심 이야길 하던, 뻔뻔한 아루의 말이 휙 하고 지나간다.
아루는 도박장 밖으로 나왔다.
차를 가지고 오지 않고 택시를 타고 왔었다. 이제 경호원의 차를 타야 한다.
파벨이 차를 가지러 간 사이에, 정령 본체인 아쿠와 대화 중인 아루다.
“호호, 이렇게 더 대박 난 건 아쿠 덕분이야.
그 땅만 가지려 한 건데, 몇 배나 늘었는걸?
또 다른 보물 탐사였어. 이럴 땐 노래를….”
“호호호, 언니 또 그 노래 부르려 한 거죠? 참아요. 저기 뒤에 변호사도 있는데.”
“앗! 들켰네.”
아루가 부르려던 노래는 허클베리 핀이다.
지금의 바트르 본사 지하에서, 골동품과 보석함을 발견하고 아쿠랑 불렀던 노래.
미하일의 속임수를 발견한 것도, 전부 아쿠의 활약 덕분이었다.
구둣발 소리로 알아냈다는 건, 말짱 거짓말.
화장실 간 미하일이 구두 뒤축에서, 카드 1벌을 빼는 걸 아쿠가 보게 됐을 뿐이다.
경호원 파벨의 차가 도착하자, 도박장에서 보내준 변호사와 함께 그의 사무실로 이동했다.
“미하엘의 재산 목록을 보시면, 저희가 보증한 건 체크를 해놨습니다. 저희도 최근에야 안 것이지만, 미하엘이 상당한 재산가더군요.”
“유가증권은 액면가에서 20%를 드리면 될 것이고. 귀금속도 꽤 되네요? 그리고 대부분이 부동산인데, 이건 어떻게 처분해야 하죠?”
“보통은 경매로 처분하지만, 그러면 상당한 손해를 보게 되고, 시간도 오래 걸립니다.
제가 듣기론 여기 부동산 중에 절반 이상은 사휴르타 쪽이에요. 이곳의 땅을 매입하는 회사가 있어요. 그곳에다 팔면 시세 정도는 가능할 것 같습니다.”
도박장 변호사가 알 정도면, 땅 매입에 소문이 꽤 났다는 이야기다.
아루는 일이 잘 풀리는 것 같아서, 마음이 후련했다.
알아서 바트르에 팔겠다는데….
“그쪽과 그럼 연결해주시겠어요?”
“제가 알기론, 그 회사의 업무 대행을 맺은 법무법인이 있습니다. 일단 그쪽에 연락을 취해보겠습니다. 이렇게 덩치가 있는 건, 변호사끼리 진행해야 속도가 빠르거든요.”
바브르 법무법인에 연락했고, 바브르에서는 바트르에 이 내용을 알렸다.
“1시간 정도쯤에 바트르에서 이곳에 온다고 합니다. 그동안 부족한 자료를 보강할 테니, 잠시 쉬고 계십시오.”
“호호, 네 알았습니다. 일 진척이 빨라서 좋네요. 어차피 부동산 절반에서 20%만 가져가시는 것이니, 빠른 협상을 하도록 하세요.
꼭 시세에 맞추려고 줄다리기는 하지 마시고.”
“네, 이런 건은 오래 끌면, 잡음만 생기기 마련이죠. 그리 처리하겠습니다.”
한 시간 정도 흘렀을 때, 변호사 사무실로 바브르 법무법인의 변호사가 도착했다.
그리고는 서류를 살펴보며, 체크를 해나갔다.
“흠, 그쪽에서 가져가야 할 20% 목록들 평가액을 보세요. 여기 금괴와 보석 추정액을 기재해 놓으셨는데, 비슷하지 않나요?”
“음, 그렇긴 하네요. 저희도 추적당하는 부동산보다는, 이런 현물이 더 좋긴 합니다.”
“그쪽에서 미하엘의 모든 부동산 권리를 담보로 잡으셨으니, 저희가 80% 금액에 채권 양도 양수를 받는 거로 하면 되겠죠?
부동산 매입으로 총 540만 달러를, 마리야 님에게 지급하는 걸로 계약은 끝납니다.”
“네, 그러면 깔끔하게 정리되겠습니다. 그럼 현물거래로 서류 작성하겠습니다.”
결국 600만 달러 정도의 미하엘 전 재산이, 4시간 만에 도박판에서 사라진 것이다.
미하엘이 아직 숨을 쉬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알거지가 된 그를 이르쿠츠크에선 더는 볼 수 없을 것이다.
전해 내려온 사기 도박꾼의 말로가, 대부분 이렇지 않았는가.
***
“하하, 미하엘에게서 540만 달러, 다른 사람들 것까지 하면 30만 달러. 총 570만이네.
너무 고액 알바 아냐? 이걸로 다리 짓는 데 보태면 되겠다. 용돈이라도 줄까?”
“흠, 나 오천 달러 있는데, 용돈으론 충분해. 나중에 필요하면 말할게.”
아루는 돈에 별 욕심이 없다.
“그런데 내일 TW건설 사장이 온다며? 칭기즈칸 무덤 이야기도 할 생각이야?”
아쿠가 저녁을 준비하며 묻는다.
“그런 건 고고학 발굴팀이 필요한 거지, 건설사가 필요한 일은 아니야. 내일은 TW건설과 면담이 있고, 오후엔 나와 함께 아루가 움직여야 해. 일단 그 무덤의 실체부터 확인해야겠어. 어쩌면 가짜 무덤일 수도 있으니….”
“오빠? 진짜 그 무덤을 찾았다고요?”
“아샤? 정확한 건 내일 가봐야 알아. 단지 그럴 거라 추측만 하는 중일 뿐.”
“와, 진짜 그 무덤이면, 관광객이 엄청나게 많아지겠어요.”
“흠, 그게 확인만 되면 그 안의 물건은 팔지 않을 생각이야. 그리고 규모만 된다면, 무덤 자체를 박물관으로 만들까 해.”
다음 날 TW건설의 최성국 사장이 점심께쯤 도착을 하였다.
태월은 미리 준비했던 교량 건설 계획서를 건네며, 충분한 검토를 요청했다.
계획서 표지에는 ‘BATR Bridge Plan’이라고 적혀있다.
“왕복 4차선이네요. 길이가 그나마 1.5km라서 기술적 문제는 크게 없습니다.
교량 전문가를 더 보강하여, 안전에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일단 저희가 500만 달러를 계약금으로 선지급할게요. 중간 정산은 하겠지만, 잔금 부분은 분할로 처리할 생각입니다.”
“네, 그건 오기 전에 이미 들었던 터라, 회사에서도 논의가 끝났습니다. 이렇게 일을 맡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일단, 식사하러 갈까요? 고려인 식당이 있는데, 입맛에 맞을 겁니다.”
“아하, 한국을 떠난 지 며칠밖에 안 되었지만,
벌써 그곳 음식이 그리웠는데 아주 잘 되었네요. 기대됩니다.”
“하하, 네. 그럼 가보실까요?”
허름한 식당 외관에 별 기대를 하지 않았던 최성국 사장이다. 그러나 식사하는 내내 만족스러운지 고개를 끄덕인다.
“이 김치찌개가 굉장한데요? 고려인 국수도 새콤달콤한 게 국물 맛이 아주 일품입니다.”
“맘에 드셨다니 다행입니다. 그런데 노동자들의 충당은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한국에서 20% 정도를 충당하고, 나머진 러시아에서 구할 생각입니다.
저번 달 판문점에서 있었던 남북특사 교환을 위한 8차 실무자 접촉 회의로, 분위기가 뒤숭숭했습니다.”
“무슨 문제인데요?”
“박영수 북측 대표단장이 회의장에서 ‘서울 불바다’ 발언을 했습니다. 그러니 친북 국가에 해당하는 러시아에서의 해외공사가, 분위기상 좋게만 보이진 않지요.”
“러시아에선 거기에 아무런 관심도 없어요. 당장 발등의 불부터 꺼야 하는 경제 상황에, 한반도의 일에 관심이 있을 리 없지요.”
“그렇다면 이곳에서 일은 문제가 없겠네요. 실무팀도 같이 왔으니, 호텔로 돌아가서 검토해보겠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최성국 사장은 일행들이 기다리는 호텔로 떠났고, 태월도 아루와 함께 알혼섬으로 향했다.
처음 알혼섬으로 들어갈 때는 한겨울이라 얼음 위로 차를 타고 지나갔지만, 이제는 4월이라 배를 타고 가야 한다.
샤휴르타 선착장에 도착하니, 낯익은 소녀가 쪼르르 달려온다.
“어? 너 여기 웬일이야?”
“호호, 막내 언니가 기사까지 보내줘서 여기로 왔지롱? 오빠! 나도 알혼섬 가보고 싶어!”
“에휴, 왔으니 그리하자. 다음부터는 예정에 없던 일 안 하는 거다?”
“응응, 알았어!”
토요일이라서 수업이 일찍 끝난 아샤였다.
주말이어서 그런지 관광객이 꽤 붐빈다.
사휴르타 선착장도 일부 상가를 제외하곤, 대부분을 바트르가 인수했다.
저 건너 알혼섬도 그러한 상황이지만, 관광객들 입장에선 아직까지는 큰 차이를 느끼진 못한다.
단지 승무원들과 직원들이 더 늘었다는 것과 전보단 친절함이 보인다는 정도다.
그리고 못 보던 사무실 하나가 선착장 옆에 있는데, 샤휴르타 바트르 사무소다.
‘그리고리’ 호라고 적힌 배를 타고, 알혼섬으로 향했다.
옛 러시아 채권을 남긴, 그리고리 보로닌의 이름을 딴 그 배였다.
아루와 아샤는 갈매기들에게 먹이를 주느라 바쁘다.
30분도 채 안 걸려 알혼섬 도마 선착장에 도착했다.
아직 인수한 지가 얼마 되지 않아, 그전과는 별로 달라지지 않은 선착장이다.
본격적으로 교량 건설이 시작되면, 이곳도 대대적인 시설 확충이 이뤄질 것이다.
도마 선착장 바트르 사무소에서, 사람이 마중 나와 있다.
푯말을 들고 있는데, 거기에 태월이라고 영어 이름이 적혀있었다.
태월이 손을 흔들어주자 그가 다가온다.
“어서 오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어느 분이 운전하십니까?”
아루가 손을 살짝 드니, 그녀에게 키를 건넸다.
“나중에 가실 때 바트르 사무소에 키를 맡기시면 됩니다. 그럼 즐거운 관광 되십시오.”
그가 떠난 자리 뒤쪽에 차가 한 대 세워져 있었다.
“호호, 쉐보레 서버번! 아쿠가 이 차를 또 사놨네? 벌써 3대야.”
“이왕 사는 거, 검정으로 좀 사지, 이번에도 하얀색이네?”
“난 검정보단 이 색이 그나마 좋아. 난 사실 빨간색이었음 했지만….”
“헐, 빨간색은 좀….”
태월과 아샤가 타자, 아루가 차를 바로 출발시켰다.
-부르릉! 부릉! 쿵! 털컥!
“아, 아야!”
아샤가 뒤에 타고 있다가, 급출발로 인해 앞 좌석 등판에 머리를 박았다.
“아샤! 어디 안 다쳤어?”
“네, 살짝 부딪친 거라서 괜찮아요.”
“아루? 운전할 줄 아는 거 맞아? 급출발에 지금 시동도 꺼졌잖아! 아, 이거, 괜히 불안해지는데? 연습 얼마나 했어?”
“아쿠가 운전할 때 내가 쭉 눈으로 익혔거든? 그게 벌써 두 달이라고!”
“응? 그럼, 지금 실제 운전은 처음?”
“나도 양심이 있지. 어떻게 몰아보지도 않고 운전한다고 하겠어?”
“그래서 얼마나 했는데?”
“그저께 30분이나 연습했다니까!”
“헉! 내가 운전할게. 자리 바꿔! 길도 안 좋은 이곳에선 위험해.”
“에이, 알았어. 다음에 30분 더 연습해볼게.”
태월은 아루의 말을 못 들은 척하고, 운전석으로 바꿔 탔다.
“주행 출발 시 기어는 2단으로 변속해!
이렇게 옆으로 밀고 밑으로 당기면, 이게 2단이야. 그리고 액셀 먼저 밟으면, 너처럼 급출발이나 시동 꺼짐이 생겨.
넌 그냥 반 클러치로 출발해.”
“반 클러치? 그거 어떤 건데? 그리고 액셀은 어느 거야?”
“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