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언니들이 사람이 아니라고요?
태월은 잠결에 들은 비명에 벌떡 일어났다.
안방 쪽에서 들렸기에 방문을 열고 후다닥 나오니, 아샤가 거실로 나와 있었다.
“아샤? 무슨 일이야?”
“방, 방에 이상한 여자들이! 홀, 홀랑 벗고 껴안고 있어요.”
“아…. 그. 그게.”
아샤가 있을 땐 조심하라고 했는데, 결국 술김에 긴장을 풀었던 것 같았다.
그 순간 안방 문이 열렸다.
“아, 왜 아침 일찍부터 소리를 지르고 그래. 지금 몇 신데?”
“저, 저 여자예요! 또 벗고 있잖아요!”
“아, 아샤? 왜 그래?”
“악! 내, 내 이름도 알아!”
“잠, 잠깐! 다들 진정해. 아루는 방에 들어가 옷부터 입도록 해!”
“엇? 아, 아루 언니라고요?”
안방에서 또 한 명이 하품하며 나온다.
“으하함, 아침부터 왜들 이리 소란이야? 쥐라도 나타났어요? 응? 아샤네? 아샤 안녕?”
“억, 저, 저 여자도 벗? 어 또 내 이름을?”
“저 여자라니? 나야 아쿠!”
아루와 아쿠가 현 상황을 파악 못 하는 것을 보면, 아직 술도 잠도 덜 깬 거 같았다.
“아루? 아쿠? 너희 지금 변신이 풀린 상태야! 아샤가 지금 저러는 게 정상이잖아!”
“어, 어머! 어, 어떡해!”
“어, 어어….”
설명을 하려 해도, 일반인이 이해하기엔 범주를 넘어선 일이다.
알리사의 일만 해도 아쿠가 그 본인도 아니다. 아샤가 배신감을 가지는 것뿐만 아니라, 오히려 안나의 가족이 당한 일을 의심할 수 있다.
“휴, 이미 벌어진 일인데, 인제 와서 뭘 변명하겠어. 다들 이리로 앉아.”
결국 다 이야기하는 수밖에 없다.
또 무엇인가를 감추고 있다가, 나중에 그게 드러난다면 그땐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이럴 땐 정면 돌파다.
아샤는 쭈뼛거리며 태월의 옆에 앉았다.
아직도 그녀들이 언니들이라는 거에, 불안함과 거리감을 가지고 있는 상태다.
아직 아루와 아쿠는 사람의 심리를 제대로 모르기에, 태월이 나서서 설명하는 수밖에 없다.
“어디서부터 이야길 해야 할지 모르지만, 사람들이 잘 모르는 존재들이 있어.
아샤는 정령 이야길 들어봤어?”
“러시아 특히 슬라브 민족에게는 정령을 다룬 옛이야기들이 많아요.”
“그들은 어떤 존재들인데?”
“동유럽에선 하늘에서 떨어진 일종의 천사? 뭐 그런 이미지 속에 나쁜 정령과 좋은 정령이 뒤섞여 있어요.”
“그럼, 아루와 아쿠랑은 다르네.”
“북유럽신화에선 인간을 닮은 엘프라는 요정이 많이 나오고요. 400년이나 산대요.”
“나도 북유럽신화 책은 읽어보긴 했어.
그런데 그거랑도 또 달라. 아루랑 아쿠는 자연에서 태어났어. 뭐 인간도 자연의 일부지만….
수천 년, 수만 년 동안 자연 속의 특정 기운이 쌓이고 쌓이면, 그 기운이 진화를 하게 돼.
그리고 생명을 가지면서 태어나는 존재가 생겨. 그게 아루와 아쿠야.
아루는 불의 기운으로 태어난 거고, 아쿠는 물의 기운으로 태어난 거야.”
“아, 그런 책은 읽어본 적 있어요.
16세기 파라켈수스라는 의학자이자 연금술사가 있었는데요. 아리스토텔레스의 4대 원소 이론을 기반으로 만든 책에 등장해요.”
아샤가 나이에 비해 상당히 박학다식했다.
“아루를 발견한 것은 한국이야. 거기 불의 기운을 가진 산이 있었는데, 그 틈 속 공간에서 아루가 태어났어. 또 우리가 바이칼호를 관광 갔다가, 거기서 태어나는 중인 아쿠를 발견하게 된 거고.”
“응? 그렇게 쉽게 발견이 된다고요?”
“아, 아니 그럴 리가 없잖아. 믿지 못하겠지만, 오빠는 샤먼과 유사해.”
“아, 샤먼이 뭔지는 알고 있어요. 유사하단 건 뭐예요?”
“이곳에서는 샤먼이 신과 소통하는 주술사 같은 건데, 난 그런 것과 달라.
신이 아닌 영혼 그리고 자연의 기운과 소통이 되거든.”
태월이 샤먼 같은 존재라는 말에 호기심을 보인다. 샤먼들 이야기 속엔 기이한 일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다 문득 이 집 가족이 생각나 몸에 긴장이 생겨났다.
이들과 무슨 문제가 생겼을지도 모른다는 미지의 두려움이다.
“그, 그러면, 알리사 언니는요?”
“난, 그 유람선 사고가 났던 곳에 직접 가서 천도재를 지냈어. 그리고 거기서 혼령이 된 이 집 가족들을 만났고. 그들이 했던 부탁 중에 너도 끼어 있었거든.”
“그, 그럼 알리사 언니와 저분은 전혀 관계없는 거네요?”
“그건 아니야. 알리사의 영혼 일부가 아쿠에게 온 것은 맞아.”
영혼 전체가 온 것이 아니라, 영혼에서 재능에 관여된 부분만 넘어온 것이 맞다. 태월의 말이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럼, 알리사 언니가 맞긴 맞네요?”
“응, 아직 다 믿기진 않겠지만, 지내다 보면 다 이해하게 될 날이 올 거야.”
“물과 불의 정령이면, 그런 힘도 다루는 거 아녀요?”
“당연히 다루지. 아루? 아쿠? 조금만 보여줘.”
아루와 아쿠가 자신들 앞으로 동그란 원을 그린다.
거기에 물로 만든 푸른 구슬과 불로 만든 붉은 구슬이 생성되었다.
“어, 어? 지, 진짜 이거 물과 불이 맞아요?”
“가서 살짝만 만져봐.”
태월의 권유에 잠시 머뭇거리던 아샤가, 입술을 살짝 깨물더니 발걸음을 떼었다.
공중에 떠 있는 일렁이는 붉은 구슬 앞에 살짝 손대어 본다.
“앗, 뜨거!”
깜짝 놀라 얼른 손을 떼는 아샤다.
그리고 용기를 한 번 더 내어 푸른 구슬도 만졌다.
“아, 이건 시원한 물이네요?”
“그 물은 마실 수 있으니, 살짝 먹어봐.”
아쿠의 말에 살짝 입을 대어 보는 아샤다.
“아, 진짜 시원한 생수네요. 물맛도 굉장히 좋아요.”
아샤의 반응에 아루와 아쿠는 구슬의 기운을 소멸시켰다.
“어? 사라졌어요. 너무 신기해요.”
마술의 눈속임이 아니란 건 아샤도 안다.
마술사들이야 자기 옷 속에 여러 가지 장치를 하지만, 두 여자는 지금 알몸 상태다.
“그럼 언니들은 이게 원래 모습이에요?”
“쉽게 말하면 두 가지가 가능해. 기운의 본체와 현재의 본체. 현재는 둘 다 본모습이야.”
“그럼 다른 사람으로 변했던 건가요?”
“응, 그건 변신술이라는 건데. 요괴한테서 뺏어 온 거야.”
“어머? 요괴도 이야기책에 나오는데, 진짜 있었네요?”
“흔한 일은 아니고, 나도 아직 직접 만난 적은 없어. 단지 요괴의 능력이 담긴 걸 아루와 아쿠 그리고 아카가 얻게 된 거야.”
“어머! 그럼 아카 언니도 정령?”
“아니, 비슷하긴 한데 아카는 영령이야. 자연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영혼의 맑은 기운들이 쌓여 탄생하게 된 거야. 그리고 어제 보았던 그 모습이 성장한 현재의 본체야.”
“아, 그럼 언니들도 점점 성장하겠네요?”
어디까지 성장하는지는 태월도 모르기에 아루를 쳐다봤다.
“인간처럼 할머니가 되는 일은 없어. 외형적으로는 전성기가 되었을 때, 그 상태로 멈추게 돼. 안 멈추게 하는 방법도 있는데, 그럴 이유가 없잖아.”
“아, 그건 부럽네요. 우리 할머니도 그랬다면, 안 돌아가셨을 텐데.”
“대신 인간은 환생하지만, 우린 환생이 안 되거든. 그렇게 보면 공평한 거 아닐까?”
“아, 그건 그렇네요.”
“아샤? 이제 더 궁금한 것은 없니?”
“음, 언니들은 왜 벗고 있어요?”
아샤의 질문에 제일 민망한 것은 태월이었다.
오히려 아루는 별거 아니란 듯이 담담하게 대답한다.
“정령은 원래 뭘 입으면 불편해. 자연에서 태어나서인지, 자연 그대로가 홀가분해.
자유로움을 느낀다고나 할까.”
“아, 자유….”
이로써 오늘의 소동은 끝이 났다.
처음으로 아쿠가 음식 솜씨를 발휘했다.
알리사 엄마의 요리 재능을 이용한 첫 실전이었다.
“어? 이거 진짜 안나 엄마의 손맛이에요!
정말, 알리사 언니가 맞기는 맞는구나.”
“호호, 맛있게 먹어. 이제부터 아침은 이 언니가 만들어줄게.”
“진짜 맛있는데? 진작부터 아쿠의 손맛을 볼 걸 그랬어.”
“태월? 나도 다음에 요리 재능 하나 줘.”
아루가 또 샘을 내본다.
“크, 알았어. 요리 잘하는 사람이 많으면 우리야 좋지.”
“응? 재능도 주고받고 그러나요?”
“글쎄, 부모님에게 시도해 본 적은 있는데, 안 되더라. 아, 내 여동생은 됐어.”
“어? 같은 사람인데 왜 다르죠?”
“아, 내 여동생은 나랑 쌍둥이야. 그래서 영혼 유전자가 유사해서 그럴 거야.”
“앗, 아깝다! 나도 요리 재능 받을 수 있었는데.”
“아샤는 나한테 배우면 되잖아? 뭘 걱정해.”
“네, 정말 열심히 배울게요.”
식사를 마치고 나갈 준비를 했다.
“오늘은 아쿠와 아샤가 관공서도 가야 하고, 전학 갈 학교도 방문해야 해. 그거 끝나면 아샤 학교생활에 필요한 것들도 사도록 해.”
“난 그럼 뭐 해?”
“아루는 나랑 같이, 이고르 아브라모비치 씨를 만나러 가면 돼. 차는 아쿠가 가져가면 되고.”
“아, 그 알혼섬 로비스트!”
“진척 사항도 체크 해야 하고, 활동비도 더 줘야 하거든.”
아쿠와 아샤가 먼저 집을 나섰고, 태월과 아루는 택시를 불러 이고르 아브라모비치를 만나러 갔다.
“어서 오시오. 회사를 차렸다는 소식은 들었고, 조카까지 그곳에 취직시켜줘서 고맙소.”
“하하, 아닙니다. 그만큼 능력이 있어서지요.
일은 어찌 잘되고 있습니까?”
“주지사 쪽에서는 긍정적인 반응이오. 외국자본 유치가 쉽지 않은 러시아 상황에서, 자신의 커리어가 되는 것이니 반대할 이유도 없지요.
문제는 이르쿠츠크가 아니라 부랴트 공화국이오. 그쪽서는 아무런 이득도 없는 거고.
단지 부랴트족의 성지를 팔아넘기냐는 식의 항의가 있는 상태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래서 내가 생각을 해봤는데, 부랴트 공화국에도 투자할 여건이 있으면 좋겠는데….”
“부랴트에 투자할 만한 것들이 있나요?”
“부랴트 공화국은 80%가 산악지형이요. 17세기에 러시아인들이, 금과 모피를 차지하기 위해 그곳을 식민지화했을 정도요.
현재 조사로는 금, 석탄, 철광석, 몰리브덴, 텅스텐, 니켈, 보크사이트, 망간, 우라늄 등의 다양한 지하자원을 보유하고 있지요. 게다가 희토류까지 가지고 있소.”
“희토류요? 재작년에 중국 이야긴 들었어요.”
희귀한 흙이라는 뜻의 희토류는, 지각 내에 총함유량이 100만분의 300 미만인 금속을 의미한다.
원자번호 57~71번인 란탄 계열 15개 원소와 스칸듐, 이트륨 등을 포함한 17개 원소를 하나로 묶어 부르는 이름이다.
화학적으로 안정적이면서, 열을 잘 전달하는 고유한 성질이 최고의 장점이다.
“덩샤오핑이 한 말을 말하나 보구려. 중국이 세계생산량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나, 진실은 그것과 좀 다르오.
절반 이상이 다른 나라들에 묻혀있소.”
1992년 중국의 최고지도자 등소평은 ‘중동에 석유가 있다면, 중국에는 희토류가 있다.’라는 말을 남겨 언론에서 화제가 되었다.
“그런데요?”
“희토류는 분리하기도 어렵지만, 채취할 때 방사성 물질이 혼합된 경우가 많아요. 그래서 환경오염 문제가 심각하오. 미국이 이 년 전만 해도 세계 희토류 생산의 50%를 전담했지만, 지금은 주 생산지에서 폐쇄 결정을 내렸지요.”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마운틴 패스가 그 생산지였었다.
“부랴트 공화국이 민족주의가 강하다던데? 지금 다른 나라에서도 눈치만 보고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내가 뚫어드리지요. 희토류를 포함한 공동자원개발사업 어떻습니까? 그리고 바이칼 호수 관광 개발! 필요하다면 철도개발까지도.”
“헉, 바이칼과 희토류….”
알혼섬을 개발하자면 바이칼호와의 연계는 필수였다. 만일 저게 가능하다면, 현재의 계획보다 더 큰 비전을 그릴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