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러시아 꽃제비
태월의 말에 뒷머리를 긁적이는 귀신이다.
그는 러시아 루스키예인 쪽의 백인이 아닌, 부랴트족과 모습이 닮아있다.
“옐친이 서방국에서 돈을 빌리려면, 그전 국채를 제대로 다 갚아야 하잖아. 그래서 더 기다리고 있었던 거지. 뭐 결과적으로 난 죽어버렸지만.”
“가족들은 모르나요?”
“내가 죽은 것은 알고 있을 거야. 이 유람선 타고 간다고 했었거든. 그래서 기존 유산은 다 나눠 가졌을 거고. 그런데 이 옛날 채권은 도박이나 마찬가지여서, 굳이 알리진 않았지.
아, 내 이름은 그리고리 보로닌이네.”
“그럼 그걸 가족들에게 알려주면 되나요?”
“아니, 그럴 필요가 없어졌어. 죽은 다음에 선착장에 왔더라고. 그런데 자기들끼리 하는 이야길 듣고 너무 실망했어. 내 시체가 인양되었었거든. 상속받기 위해 사망 확인을 하러 온 거더라고.”
예전 최홍수 화백의 가족과 비슷한 경우였다.
노스님이 경매로 20억에 팔았던, 그 그림을 그린 화가가 있었잖는가.
“그 채권은 왜 모으신 거예요?”
“휴짓조각으로 될 분위기가 돌아서, 1/60 가격 정도면 살 수 있었거든.
지금이야 파는 사람이 없어졌지만, 그땐 그랬어. 나중에 누가 나처럼 사서 대박 터트렸다는데, 그땐 다른 일에 열중하느라 시기를 놓치긴 했어. 그러다 팔려고 알아보던 중에, 머리나 식히려 그 배를 타게 된 거고.”
정상적으로 교환하게 되면, 60배란 소리였다.
“제정러시아 때가 까마득한 옛날이잖아요.
화폐가치로 보면, 큰 이익이 아닐 수도 있잖아요. 굳이 매입할 이유가?”
“그건 아니지. 금리가 낮은 상태에서는 시간이 지나면, 인플레이션 때문에 돈의 가치가 하락하거든. 그래서 오래 가지고 있다면 오히려 이득인 셈이지.”
국채에는 2년 3년 5년 그리고 50년짜리도 있고, 심한 경우 100년짜리도 있었다.
국채에는 액면가, 이자, 채권 가가 표시된다.
“최근 소련 붕괴 이후 채무승계와 함께 지급보증을 약속했던 러시아 정부가, 채권자들의 상환 요구에 시달리고 있다네. 옛소련 부채는 러시아의 연간 경제 산출량의 절반인, 7,800억 달러에 달할 거라고 전문가들이 보고 있네.
잘못하면 러시아를 무너뜨릴 수 있는 규모지.”
제정러시아 국채에 대해, 꽤 많은 정보를 모아온 그리고리 보로닌이다.
“그래서 그게 얼마나 있는 거지요?”
“미국 달러로 따지면, 1천만 불은 넘지.”
“와, 큰 금액이네요?”
“하하, 그리고리 씨의 1천만 불이 크다고 생각한다면, 스위스 계좌를 보면 더 놀라겠군요.”
그리고리와 태월의 이야기를 듣던, 글리코프가 끼어들었다.
“글리코프 씨는 얼마길래요?”
“5천만 불이 조금 넘네요!”
“허, 진짜 큰 금액이군요.”
“그런데 말은 그렇게 하면서, 별로 놀라진 않는데요? 집안 재산이 꽤 많은가 봐요?”
“하하, 네. 뭐, 여유는 좀 됩니다.”
갑자기 돈방석이 땅에서 솟아올라온 느낌이 드는 태월이다.
그림 경매로도 유사한 돈은 구경했지만, 그거와는 다른 공짜 돈이지 않은가.
‘이거 잘하면 한국이나 미국에 부담 안 주고도, 알혼섬 매입이 가능하겠는데? 귀신을 찾아 천도해주고, 그들의 소원을 들어주며 돈을 번다? 게다가 추가로 능력도 얻고.’
귀신들에게도 처분하지 못하는 재산은 있기 마련이다.
알려진 재산만 가족에게 상속될 것이고, 그 외엔 주인 없이 사라질 재산이다.
‘진행 상황을 더 지켜봐야겠지만, 사휴르타 선착장 쪽의 땅을 일부라도 매입해야겠어.’
사휴르타 선착장은 알혼섬으로 가는 유람선이 있는 곳이고, 리스트비얀카 선착장은 바이칼호를 유람하는 유람선이 있는 선착장이다.
“그리고리 씨는 원하는 것은 없습니까?”
“특별한 것은 없었는데…. 지금 떠오른 생각이 있네. 이제 바이칼호가 제 무덤이 되었으니, 내 이름이 적힌 배가 있으면 좋겠어.”
“제가 바이칼호를 운행하는 배 중의 하나를 사서 그리고리호 라고 명명하겠습니다.”
“채권은 스베르방크 이르쿠츠크 지점에 보관되어 있어요. 비밀번호 343911, 암호는 xx-xxx 잘 기억하게.”
어차피 알혼섬을 사게 되면 배도 있어야 한다.
이제 다섯의 영혼을 천도시킬 시간이다.
상차림을 시작했다.
바람은 처음보단 멎어 있어서, 다행히 테이블 위 음식들이 날려갈 일은 없었다.
천도재에서 중시하는 49재는 넘었고, 100일 천도재도 며칠 지난 상태지만 이것도 하나의 특별천도재에 해당했다.
이곳에서 죽은 자들이 이들만 있었던 것도 아니기에, 합동위령재로 진행했다.
관욕, 불공, 관음 시식 순으로 하는 게 천도재지만, 지금 하는 위령재는 약식으로 할 수밖에 없었다.
위령재를 행한 후 마지막으로 광명진언을 읊조렸다.
다섯이 태월에게 고개를 살짝 숙인다.
“옴 아모카 바이로자나 마하무드라 마니 파드마 즈바라 프라바를타야 훔! 옴 아모카 바이로자나 마하무드라 마니 파드마 즈바라 프라바를타야 훔! 옴 아모카 바이로자나 마하무드라 마니 파드마 즈바라 프라바를타야 훔!”
그들 다섯은 푸른 빛무리로 변해 하늘로 솟아올랐고, 그중 다섯 줄기의 빛만 태월에게 쏘아져 왔다.
러시아 특수부대 스페츠나츠와 KGB 일선 요원들이 익혔다는 무기술과 격투술인 시스테마.
그리고 부랴트어를 전해 준 그리고리 보로닌.
러시아 요리를 알려주는 장면과 둘째 딸의 러시아 발레.
큰딸인 알리사는 사교댄스 강사였는데, 그녀의 춤 동작들이 태월에게 들어왔다.
그리고 악귀에게서 얻은 12개의 능력이 있다.
다행히 3명의 악귀만 꽝이었다.
도깨비가 성장하면서 악귀의 꽝 숫자가 많이 적어진 것이다.
재능을 추출 해내는 능력이 높아졌다고 할까.
그런데 12개의 능력 중, 4명의 러시아어 능력과 2명의 부랴트어가 들어왔다. 그들은 살아생전 특별한 능력이 없었던 것 같다.
부랴트어의 소유자들은 아마도, 유람선의 선원들이었을 것이다.
태월은 자고 있던 가이드를 깨웠다.
“아 함, 제가 오래 잤나 보네요?”
기지개를 켜며 하품을 하는 가이드다.
“하하, 아니에요. 한 시간 반 조금 더 지났을 뿐입니다. 이제 여기 정리하고 이르쿠츠크로 돌아가야겠습니다.”
테이블을 정리하고 음식들은 상자에 다 넣었다.
“여기 이 음식들은 버릴 순 없는데, 처리할 방법이?”
“뭐 먹던 음식이 아니니, 가는 길에 작은 보육원이 하나 있습니다. 거기에 안면이 조금 있는 분이 있으니, 그에게 전달하면 될 것 같네요.”
“네, 다행이네요. 괜히 제사음식이라고 싫어하지 않으려나요?”
“하하, 이쪽에서는 샤먼과 관련된 걸 이질적으로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고마워할 겁니다.”
그의 말대로 그곳엘 가니, 감사하다는 인사까지 받았다.
“러시아는 고아들이 많은가요?”
“소련 체제 붕괴 이후 자본화 과정에서, 대다수 러시아 주민들 소비 수준이 평균 30~40% 가까이 떨어졌습니다.”
“그래서요? 굶주렸나요?”
“아니요. 만성적 기근에는 시달리지 않았습니다. 젤 큰 원인은 부모 때문입니다.”
“그게 무슨?”
“부모가 자식들에게 가혹행위를 하거나, 그들 스스로 알코올 중독도 심하거든요.
그래서 가출하거나 아니면, 아예 부모가 아동 걸인을 관리하는 범죄조직에 팔아버립니다.
그들을 외국에서는 러시아 꽃제비라고 부르지요. 참 민망한 이야기네요.”
지금 러시아 각급의 고아원·고아학교에 수용된, 약 60만 명의 아동들이 있다.
그중 95%가 부모들이 멀쩡하게 생존하는 ‘사회적 고아’들이고, 길거리 아이의 8~9할은 부모나 공인된 후견인을 갖고 있다.
그리고 비공식적으로는, 그보다 몇 배나 되는 아이들이 떠돌고 있다.
“아, 북한 꽃제비는 들어봤지만, 러시아에도 있는 줄 몰랐네요.”
“대중적 빈곤화가 알코올 중독률을 높여, 아동학대 행위의 일차적 원인을 제공했다고 하더라고요.”
“도움이 될진 모르지만, 알혼섬을 사게 되면. 거기에 보육원 시설을 갖추도록 하겠습니다.”
“아, 좋은 일을 하시려는 거군요. 그런데 조언 하나 드릴까요?”
“네, 말씀하세요.”
“그냥 먹여주고 재워줘서는, 그들에게도 훗날 좋지 않습니다. 차라리 알혼섬에서, 아이들이 할 수 있는 일들도 함께 주세요.
자신의 노력으로 쟁취하는 것을, 어릴 때부터 가르쳐야 한다 생각합니다.
고기를 잡아주는 게 아니라 낚시하는 법을 가르치는 게, 어른들 역할이 아닐까요?”
“음, 좋은 조언이네요. 하나를 배웠네요.”
러시아에서 생긴 돈이니, 러시아를 위해서 어느 정도 베푸는 게 옳다고 여긴 태월이다.
태월은 메모지를 하나 꺼내 글을 적었다.
“아 참, 이 주소로 가주실래요? 거기 볼일이 좀 있어서요. 그곳에서 내려주시고 집으로 가시면 됩니다. 낼 아침에 다시 뵙도록 하죠.”
보여준 메모 글은 마르가리타의 집 주소다.
차는 한 시간 정도가 걸려 마르가리타의 집 주변에 도착했다.
“오늘도 수고하셨습니다.”
“하하, 아닙니다. 그럼 내일 숙소로 아침 10시까지 가겠습니다.”
“마카르 씨! 조심히 들어가세요.”
아루의 인사에 살짝 고개를 숙이는 가이드다.
태월 일행은 최근에 지어진 듯한 아파트로 올라갔다.
그녀의 아파트는 3층에 있었고, 위치는 끝쪽이었다.
이웃이 생기기 어려운 위치기도 했다.
작은 나무가 죽어 있는 화분이 보인다.
몇 달간 돌보지 않고 물도 주지 않아서이리라.
화분을 들어 옮기니 열쇠 하나가 보였다.
늦은 저녁 시간 이어서인지, 이웃들도 보이지 않았다.
몇 장의 우편물이 있었지만, 그대로 두고 들어갔다.
집안은 한국의 24평대 아파트 크기는 되어 보였고, 마르가리타와 딸들의 솜씨인지 아기자기하게 잘 꾸며져 있었다.
여기저기 사진도 붙어 있었는데, 그걸 보는 태월의 마음이 괜히 찡했다.
아루도 태월을 돕는답시고, 딸들의 방을 뒤져 필요한 것들을 날라왔다.
태월은 그녀가 말한 서랍장을 찾아내서, 안의 내용물을 다 꺼내놨다.
“음, 이건 가족 앨범이고 요건 통장과 보험 증서들 그리고 이 집 등기도 있네?”
“태월? 이 집 큰딸 운전면허증도 있어!
주민증만 가지고 나갔었나 봐. 그런데 보기보단 나이가 많네? 건강 진단서도 있는데, 결과는 아주 건강해.”
“뭐 많으면 20 후반쯤 되는 거야?”
“아니, 출생연도로 보면 31살, 한 달만 지나도 만으로 31살이야.”
“어? 진짜? 줘봐!”
아루의 말대로 그녀의 출생일은 1963년 3월 15일이고, 오늘이 1994년 2월 22일이다.
24일만 지나면 큰딸의 나이가, 만으로 31살이 된다.
“오! 뭔가 팍팍 떠오르는데?”
생각도 못 한 수확이다.
“큰딸 사진을 다 모아와. 큰딸 방에 사진들도 있을 거 아냐.”
아루가 다시 그 방에 다녀와서 모은 사진이 꽤 많았다.
어릴 때 사진들도 있었지만, 사교댄스 하면서 찍은 사진이 제일 많았다.
단지 친구들 사진이 안 보여서 의아했지만.
‘사교성이 없었나 보네? 그런데 사교댄스는 낯가림하곤 관계가 없는 건가?’
방바닥에 모아온 사진을 쭉 늘어놓았다.
“아쿠를 큰딸 알리사로 변신시키자! 아쿠에게 능력 하나 줄 수 있지?”
“응, 난 괜찮아. 뭐로 줄까. 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