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신의 재능을 삼켜라-65화 (65/250)

65화. 마약왕과 옛 제정러시아 채권

마카르는 앞에 있는 청년(?)이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다른 나라는 몰라도 러시아의 국내 유람선에, 무슨 탑승객 명단이란 말인가?

“해외 유람선도 아니고, 그런 게 러시아엔 없습니다.

아 예약자인 경우는 있을 수 있는데, 그 숫자는 미미할 겁니다. 그런데 그런 걸 왜 알려 하십니까?”

“하하, 이상하게 들리셨겠군요. 제가 한국에 스승님이 계신 데, 죽은 이의 영혼을 하늘로 돌려보내는 일을 하십니다.”

“아, 그럼 샤먼과 비슷한 거네요?”

“따지면 유사하긴 합니다.”

“아, 이제 이해되었습니다. 그들의 혼을 위로하러 가시는군요.”

“네, 그런 것도 포함되겠지요. 그건 그렇고 여기 괜찮은 숙소가 있으면 소개를 해주세요.”

“네, 그럼 지금 갈까요?”

식사도 이미 다 했던지라, 일행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숙소로 향하는 길에 꽤 큰 화장품 가게가 눈에 보였다.

태월은 생각나는 것이 있어서, 그리로 쑥 들어갔다.

여점원이 반가이 맞이하며 인사를 한다.

“어서 오세요. 특별히 찾으시는 것이 있나요?”

“30대 중반 여자분에게 선물로 줄 만한 것 추천 부탁드려요.”

“아하, 그럼 이거 쓰세요. 요즘 제일 인기 있는 천연화장품이랍니다. 러시아는 추운 곳이라 보습이 중요해요. 이 크림은 두 가지인데, 낮에 바르는 거와 밤에 바르는 거가 있습니다.

또 이것은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방법으로 만든, 할머니 레시피 샴푸여요. 그리고 이건 그곳에서 만든 치약이고요. 며칠만 지나도 없어서 못 파는 거랍니다.”

“그럼 그거 다 해서 이쁘게 포장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남자 것도 부탁드려요.”

태월이 이것을 산 이유는 가이드에게 주려는 것이다.

원래 오늘까지가 계약한 날인데 연장되었으니, 그 아내에게 구박받지 말라고 주는 선물이다.

“자자, 가이드님. 이건 아내분 거, 이건 가이드님 거. 오늘 사랑 많이 받으세요.”

“하하, 고맙습니다. 쫓겨나진 않겠군요.

그런데 이모님 것은 안 사셨네요?”

‘아니 왜 곤란한 질문을 하는 거람.’

“아, 저희 이모님은 따로 쓰는 게 있어서, 새로운 것은 안 바릅니다.”

태월의 뒤에서 뭔가 찌릿한 느낌이 다가온다.

감정이란 걸 가지고 있는 아루의 시선이다.

사실 필요가 없는 것인데도, 혼자 쏙 빼니 기분상 저러는 것이다.

아카라면 신경도 안 쓰는 경우가 되지만.

가이드가 소개해 준 숙소는 규모는 작았지만, 시설은 깨끗했다.

최근에 지어진 곳이라는데, 인테리어가 유럽풍이다.

“그럼 내일 오후 4시경에 오겠습니다.”

“네, 오늘도 수고하셨고요. 오전 내내 푹 쉬십시오. 내일 뵙지요.”

***

리스트비얀카는 이르쿠츠크에서 약 68km 떨어진, 바이칼호에 위치한 항구도시이다.

바이칼의 단 하나의 출구이며 안가라강의 시작점이 바로 이곳 리스트비얀카다.

주말이면 이르쿠츠크 시민들이 자주 찾는 곳이며, 호숫가 주변에는 숙박업소와 음식점들이 많이 있다.

작은 전통 시장도 열려서 관광객들의 시선을 끌고 있다.

40분을 달려 리스트비얀카의 유람선 선착장에 다다를 수 있었다.

“이곳에서 바이칼호의 유람선들이 출발합니다.

5시가 넘어가니 저녁 식사라도 하시죠?”

“슬슬 해가 지니 저녁 느낌이 나긴 하네요.

바람도 꽤 차고. 오늘은 어디로 갈까요?”

작고 아담한 식당이었는데 의외로 사람은 꽤 있었다.

소고기 수프와 볶음밥을 시키고, 처음 보는 생선도 두 마리 시켰다.

바이칼 호수에만 서식하는 청정어 ‘오믈’이 훈제로 나왔다.

바이칼호에는 52종의 어류가 사는데, 이 중 27종이 고유종이다.

그중에서 연어과에 속한다는 오믈(omul)이다.

재래 어시장 입구에서부터 비린내를 확 풍기던 그 생선이었는데, 호기심에 시킨 거다.

연어와 맛은 비슷한데, 기름기가 적고 비린내가 좀 나긴 했다.

관광객 중에 여자들은 냄새로 인해 잘 먹지 못한다는데, 아루는 입맛에 맞는지 한 마리는 혼자 다 먹었다.

식당을 나와 재래시장에서 약식의 천도재를 위해 몇 가지를 샀다.

“이제 어디로 갈까요?”

“사고 지점으로 갈 수 있나요?”

“뭐, 어려운 일은 아니죠. 일단 차에 타십시오. 십여 분 정도면 도착할 겁니다.”

어제의 선물 효과 때문인지, 그전처럼 이것저것 묻진 않았다.

빙판을 가로질러 달려 나가는데, 오늘따라 바람이 상당했다.

차창 밖으로 바람 소리가 윙윙대는 게, 귀신 울음소리 같기도 하고.

장소가 가까이 다가오는지, 태월의 기감에 여러 가지가 잡힌다.

“이제 도착했습니다.”

“마카르 씨는 차 안에서 쉬시기를 바랍니다. 상차림을 간소하게 할 것이기에, 손은 그리 필요치 않거든요.”

“아하, 그럼 잠시 눈 좀 붙이겠습니다. 오랜만에 집에 갔더니 할 일이 많더군요. 늦게까지 일을 했더니….”

“네, 일이 끝나면 그때 깨울 테니 푹 쉬세요.”

태월은 차에서, 캠핑용 테이블과 음식 상자 등을 꺼내 차 옆에 두었다.

차 안을 보니 그새 눈을 감고 자는 마카르 씨가 보인다.

“이제 잡아볼까?”

자신들 주변에 차량까지 나타나고 사람까지 내리니, 그들이 관심을 보였다.

몸을 한 바퀴 돌리니, 15명의 악귀와 그들에게 붙잡혀 있던 5명의 귀신이 보인다.

씩 한 번 미소를 지어준 태월은 왼손을 뻗었다.

“가랏! 싹 먹어 치워!”

-슈 아악! 꿀꺽! 꿀꺽! 꿀꺽…!

-크헉, 컥, 컥!...

도깨비는 악귀 외엔 먹지 않기에 부담 없이 휘둘렀다.

아루는 공간이동을 통해, 도망가는 놈을 불 벽으로 잠시 막아준다.

순식간에 열다섯을 정리해 버렸다.

악령까진 없어서인지 싱거운 사냥이었다.

아쿠는 그런 장면을 처음 봐서인지, 몸이 흔들려 보였다.

십여 개의 장면들이 태월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잠시의 시간이 지나 의식이 돌아온 태월은, 풀려난 다섯의 귀신에게로 다가갔다.

“안심하세요. 그대들의 천도를 도와줄 샤먼입니다. 아 그전에 사연들을 들을 수 있을까요? 혹여 남아 있는 미련이 있으면 도와줄 수 있고요. 거기 여자분들부터 말해주세요.”

다섯 중, 여자 귀신은 셋이었다.

외형적인 나이로는, 하나는 50대와 20대 그리고 10대로 보였다.

셋은 닮았으며, 살아있을 적에는 꽤 미인이란 소리를 들었을 듯했다.

특히나 그 20대는….

‘하긴 소비에트 연방엔 미인들이 흔하다고 했었으니, 딱히 특별할 게 없는 건가?

음, 30대가 없나 보네. 좀 아쉽군.’

“우린 가족이에요. 전 마르가리타고, 여긴 첫째 알리사 그리고 둘째 안나.

이 아이들의 아빠가 이곳 바이칼에 뿌려졌어요. 친인척도 없는 처지라, 이 성스러운 호수에 남기를 원했죠. 그런데 유람선 침몰 사고로 저희까지 세상을 떠나게 되었네요. 처음엔 너무 힘들었어요. 그 후 저 악귀들에게 잡혀서 아이 아빠에게 가지 못하니, 그게 더 아프더라고요. 지금 생각하면 침몰 사고가, 우리 가족이 함께하라는 신의 배려가 아닐까 싶기도 하네요.”

“그럼 남은 미련은 없는 거네요? 그런데 지인이나 이웃들은, 그대들을 그리워하지 않을까요?”

“다른 가족은 없어요. 지인들은 우리가 이곳에서 죽을 걸 모를 거예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이르쿠츠크로 이사 온 지 한 달밖에 안 되었어요. 아직 이웃을 알지 못한 상태고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이르쿠츠크까지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이용한다고 해도, 무려 4일 즉 96시간이 걸리는 거리다.

“시신은 어떻게 되었나요?”

“저희는 바이칼호 아래에 남겨져 있어요.”

“도와드릴 일은 따로 없나요?”

“아이들 아빠가 보육원에서 자랐어요. 저희 재산을 정리해서 그곳에 기부했으면 합니다.”

남은 가족이 없는데, 무슨 권리로 태월이 정리할 수 있겠는가?

“그럼 이르쿠츠크에서도 가족이 죽은 것을 모르는 거네요?”

“네, 유람선을 타는데, 신분을 기재하지 않잖아요. 집도 멀지 않아서 편하게 탔거든요.”

“그 유언은 최대한 가능한 쪽으로 해볼게요.”

“그럼 집 주소부터 알려드리게요.

통장이 3개가 있을 건데, 비번은 xxxxxx.

그리고 비상 열쇠는 화분을 들어내면 바닥에 있어요. 그리고 그 외 정보는 서랍장을 찾아보시면, 어느 정도 아실 수 있을 거예요. 이렇게 해서 어느 정도 가능할지 모르지만, 최대한으로 해주세요.”

마르가리타가 불러주는 주소를 머릿속에 암기해버렸다.

기억력이 원래 좋긴 했어도, 폴더란 것을 만들고 나서부터는 더 쉬워졌다.

재산 정리가 불가능하면, 통장에 예치된 현금이라도 찾아 보낼 생각이다.

“두 따님은 부탁할 일이 없나요?”

“전 엄마가 이야기한 걸로도 족해요.”

“전, 친구 아샤에게 영원히 기억하겠다고 알려줬으면 해요. 제 일기장에 뒷면에 보시면, 연락할 방법을 알 수 있을 거예요.”

둘째 딸 안나의 부탁이다.

모녀의 사연은 이제 끝났다.

“거기 남자 두 분은 어찌 됩니까?”

“아, 난 글르코프요. 전직 KGB 해외 담당이고 주 지역은 멕시코요. 소련이 해체되고 실직을 하게 되었다고 알려졌지요. 실은 스스로 그만둔 것이오. 마약 때문이오.”

“네? 마약을 하셨나요?”

“아, 그런 뜻이 아니라. 마약 카르텔의 스위스 비자금을 찾아내서, 비밀번호를 바꿔 버렸소.

그 후 다른 데로 옮겨버렸소.

원주인이 이제 찾지도 못할 것이오.”

“원주인이 누군데요?”

“미겔 앙헬 펠릭스 가야르도, 멕시코 과달라하라 카르텔의 수장이던 자요. 미국에 들어가는 마리화나의 1/3을 공급하던 자요. 정치권을 등 뒤에 둔 미겔 앙헬은, 모든 플라자를 규합하고 멕시코의 첫 마약왕이 되었지요.”

“그 사람은 어디 있는데요?”

“1989년부터 미국 교도소에 복역 중인데, 의심이 많은 자라 비자금을 밝히지 않았을 거요. 뭐 밝혔다고 해도 이젠 찾지도 못하지만.”

“그런데 갑자기 그 이야기를 하시는 이유가?”

“아버지가 있어요. 요양소에 있는데, 다음 달이면 예치 요양비가 만료돼요. 그리고 요양원에서는 다른 돈은 그리 필요가 없지요. 이 돈을 줄 테니, 돌아가시기 전까지만 돌봐주시오.

어차피 이 돈은 공중에 붕 뜬 돈이오.”

“좋아요. 그럼 개인 요양사를 고용해서 돌보도록 할게요.”

“아, 아니요. 별도 요양을 하게 되면, 외로워져서 더 힘들 거요. 거기 새로 생긴 친구들과 있도록 놔두는 게 더 나아요. 명절 때나 생일 때만 좀 챙겨주시면 되오.”

“그 외는 없습니까?”

“그렇소. 다른 가족은 이제 없구려.”

이제 남은 사람은 한 사람이다.

“아저씨는 뭐 필요한 것 없습니까?”

“나도 돈이 될 것이 좀 있긴 해. 옛 러시아제국 채권을 헐값에 샀었거든.”

제정러시아 채권을 보유한 국가들이 있었다.

그중 프랑스를 예로 든다면.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의 몇십 년 동안, 프랑스인들은 약 530억 유로(약 72조 원) 상당의 돈을 러시아 채권에 투자했다.

주로 제정러시아 정부의 보증으로, 러시아 철도 회사들이 발행한 채권에 많이 투자했다.

하지만 사회주의 혁명 지도자 레닌은 혁명을 성공시키고 난 뒤인 1918년, 제정러시아 차르 정부의 채무 변제를 거부하는 포고령에 서명했다.

이후 제정러시아 채권은 ‘휴짓조각’이 될 위기에 처했다.

이걸 이 사람이 헐값에 쭉 샀었다는 이야기다.

“엥? 그걸 왜 아직 교환하지 않으셨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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