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알혼섬과 물의 아기
그 한 글자에는 기운이 남아 있었다.
‘기운을 느끼지 못했다면, 제대로 된 방향도 잡지 못하고 이 언덕 전체를 파내야 했겠네.
그 당시 영혼을 다루는 주술사가 이 글자를 새긴 것 같은데….’
가이드가 눈치채지 못하게, 아루의 독사진을 그 자리에서 확대해서 찍었다.
글자가 잘 보이도록 해서….
그리고는 주변 경관을 다시 한번 카메라에 담았다.
어떤 고고학 학자가 칭기즈칸의 무덤은 아무도 알지 못하게 평야에 묻었을 거고.
그 위를 수백의 기병이 말을 타고 다니게 해서, 흔적을 없앴다고 하더니 그 추측이 사실이 되었다.
하보이 곶으로 향하는 일정은 이어졌다.
호수 쪽으로 큰 직사각형 모양의 구멍이 뚫린 바위가 보였는데, 그곳이 하보이 바위였다.
그 구멍을 통천문이라고 부른다는데, 그곳에서 하늘을 보게 돼서 그리 부르는 것 같다.
근처에는 작은 규모의 성황당이 있었고, 색색의 천에 휘감겨 있다.
“어머, 여기 누가 돈을 잔뜩 흘렸나 보네?”
아루가 이런 상황을 처음 접해서인지, 돈을 주우려 하고 있었다.
“하하, 그거 주우면 안 되는 거예요. 소원을 빌고자 동전을 던진 거거든요? 노 터치!”
들었던 동전 몇 개를 아쉬워하며 내려놓던 아루가 갑자기 어디론가 향했다.
태월이 가려고 하는 목적지인, 그 하보이 바위로 아루의 발은 움직였다.
‘뭐가 있는 건가?’
태월도 그 뒤를 따라가 본다.
“호호호, 소원을 들어줬나 봐?”
갑자기 한국말을 하는 아루다.
‘갑자기 무슨 소원? 쟤 소원이 뭐였지?’
바위의 통천문 가까이 이르렀을 때, 어떤 기운이 호수에서 솟아나는 걸 태월도 느꼈다.
차갑고 상쾌한 그러면서도 맑디맑은….
‘어? 이런 느낌은 아루가 깨어났을 때 느낌과 흡사한데? 호, 혹시?’
아루가 바위 아래쪽 비탈로 내려가고 있다.
둘을 지켜보던 가이드가 위험하다고 소리를 치고 있었고.
그런데 아루가 호숫가에 닿자,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갑자기 그 주변에서 안개가 생겨나며, 주변을 감싸기 시작한다.
태월이 안개를 헤치며 다가서자, 눈앞에서 신비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호수 속에서 물결무늬를 이룬, 어른 두 주먹만 한 푸른색 구슬이 떠오르고 있다.
아루가 정령의 기운을 써서 물가로 유인 중이다.
태월은 아루의 옆으로 다가가, 가까이 온 그 푸른색 구슬을 영혼 에너지로 감싸 당겼다.
그 순간 도깨비 문신이 튀어나오며, 덥석 삼켜버렸다.
“하아, 이 문신이 또 이렇게 먹어버리네?”
“호호, 나도 저렇게 삼켜졌었잖아.”
“저건 정체가 뭐야? 크기도 아루 때보다도 두 배는 큰걸?”
“쟤는 물의 정령 즉, 수령이야. 내가 있던 산과는 크기 자체가 다르잖아. 그래서 그런 걸 거야. 크기는 두 배지만, 힘은 나보다 몇 배는 강할걸? 초장에 군기를 잡아야지, 안 그럼 다루기 힘들어.”
아루가 아카랑 친하게 지내더니, 군대도 안 갔다 온 것이 군기 타령을 하고 있다.
밖에서는 가이드가 태월과 아루를 찾느라, 소릴 치고 있었다.
안개 때문인지 못 찾고 있기에, 태월이 우선 가이드를 안심부터 시켰다.
그래야 물가에 다가선 태월과 아루를 이상하게 보지 않을 것이다.
“저 여기 있어요! 금방 나갈 테니 가까이 오지 마세요. 거기서 기다려요.”
“휴! 다행이네요. 네 알았습니다. 조심해서 천천히 올라오세요.”
몇 분 정도가 지나자, 도깨비에게서 기다리던 반응이 나왔다.
-우 에엑!
문신이 커다란 입을 벌리더니 토해냈다.
물결무늬가 있던 구슬이 무늬가 사라졌다.
그리고 단순한 푸른색에서, 반투명한 푸른빛으로 일렁거리고 있었다.
“응? 여기가 어디? 넌 누구?”
“여긴 바이칼 호수고 넌 물에서 이제 막 태어난 아기야.”
태월이 대답을 해주자, 잠시 생각에 잠기는 물의 아기 정령이다.
시간이 조금 흐르자 고개를 들고선, 뒤쪽에 있던 아루를 쳐다보았다.
“하하, 물의 아기 안녕? 난 불의 정령 아루야.
앞으로 이 언니가 험난한 세상에서, 널 잘 보살펴 줄게. 언니! 해 봐.”
아카랑 접근법이 전혀 다른 아루다.
‘그런데 험난한 세상은 또 뭐람?’
태월은 아루의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언니? 그게 뭐야?”
“그냥 너보다 먼저 태어나서, 이렇게 세상을 살고 있으니 언니라고 해야 해.”
“알았어. 언니!”
아직 성별도 없는데 언니라 한다.
“태월? 아기 이름을 지어야 해. 아카식 레코드에 기록되어야 하잖아.”
“음, 물이 라틴어로 아쿠아잖아. 아쿠라고 짓자. 어때?”
“좋은데? 아루! 아쿠! 호호.”
태월이 물의 아기 앞으로 가 섰다.
“이제 너의 정식 이름은 ‘아쿠’란다.”
물의 아기가 몸을 부르르 떨더니, 빛을 내뿜었다.
아루 때와 똑같은 반응이었다.
이제 아카식 레코드엔 ‘아쿠(수령)’로 적혀졌을 것이다.
“아쿠는 내가 한국에 가면, 요괴의 능력을 넘겨줘야겠어. 미리 그걸 해버리면 곤란한 일이 많을 거 아냐?”
“그야 그렇지! 당장 가이드도 이상해할 거고, 여권도 없으니 공항 출국 때도 문제가 되지.”
정령 상태서는 일반 사람들의 눈엔 안 보이니, 오히려 그게 나을 것이다.
“그런데 이 안개는 왜 생긴 거야?”
아까부터 의문이 들었던 게, 이제 생각난 태월이다.
“물의 기운과 불의 기운이 만나면 이런 조화가 일어나기도 하잖아? 주변을 가리려고, 의도적으로 기운을 끌어낸 거거든.”
아루가 기운을 거두어들이자, 안개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태월과 아루는 가이드가 기다리고 있는, 바위 쪽으로 올라오게 되었다.
아쿠는 둥둥 떠서 태월의 왼쪽 어깨 위에 있는 상태다.
“이거 가끔 안개가 끼긴 하는데, 갑자기 생긴 건 처음 봅니다. 여기가 샤먼들이 영성을 충전하는 곳으로 알려진 곳이죠. 그래서 이런 신기한 현상이 일어났나 보네요.”
아루와 아쿠가 만나 생긴 현상이지만, 그리 생각하게 내버려 두었다.
그곳에서 여러 장의 사진을 찍은 후에, 원래 있던 후지르 마을로 향했다.
하보이 곶을 갈 때는 급한 마음에, 그냥 지나쳐왔던 곳들이 있다. 이번엔 둘러볼 생각이다.
선녀와 나무꾼을 닮은 사간후순을 구경한 후, 삐시안카에 다다랐다.
과거 소비에트 연방 시절에 강제수용소가 있던 삐시안카.
수용소가 있던 자리는 관광객을 위한 숙박 시설로 탈바꿈해 있다.
삐시안카를 지나 하란취에 이르렀다.
하란취 마을 앞 호수 가운데에는, 사자바위와 악어바위가 있다.
그중 악어바위는 악어섬이라고 불리는데, 바이칼에 사는 갈매기의 주요 산란지라고 한다.
그래서 새의 배설물로 하얗게 보이는 것이다.
“아니? 원래 갈매기는 바다에 사는 거 아니었어요?”
“하하, 원래는 그렇긴 하죠. 그런데 이 바이칼호가 워낙 커서 바다처럼 보이는지, 갈매기가 상당히 많답니다.”
“그럼 호수 갈매기라 해야 하네요.”
“물이 정말 맑은 것 같아요. 이 깊은 바닥이 다 내려다보이다니….”
“세계 어디를 가도 호수가 자정작용 하는 곳은 드뭅니다. 바이칼호는 그만큼 특이하지요.”
“그런 시설이라도 있나요? 지도로만 보면, 이르쿠츠크 도시와 가까운데요?”
“주변에서 가장 큰 도시인 이르쿠츠크는, 지도만 보면 바이칼호 근처로 보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수십 ㎞의 거리가 있고, 바이칼의 물이 빠져나가는 안가라강 유역에 있죠. 그래서 호수의 오염과 관련이 없는 것이죠.”
호수란 것은, 물이 고여있는 상태라 생각했다.
물도 고이면 썩는 법인데, 이해가 순간 안 되는 태월이다.
“호수의 물은 갇혀 있는 거 아닌가요?”
“300개가 넘는 강에서 물이 유입되죠. 또 흘러나가는 물은 안가라강을 거쳐 예니세이강으로 흘러나갑니다.
특히 안가라강은 단 하나밖에 없는 배수로로 강물이 워낙 거세다 보니, 그 추운 시베리아에서도 겨울에 얼지 않아요.
배수로 기능으론 최고의 강인 셈이죠.”
“그럼 정화시설은 따로 하는 게 없나요?”
“새우가 하고 있죠! ‘에피스추라’라는 새우를 닮은, 특유의 소형 갑각류가 호수 바닥에 많이 살아요. 이들이 호숫물의 오염물질을 여과해서, 호수를 깨끗하게 유지하고 있습니다.”
“와, 자연 자체 정화네요?”
하란취를 떠나, 후지르 마을로 가는 길에 있는 부르한 바위도 구경했다.
이곳 알혼섬에는 색색의 천으로 감아놓은 장승들을 종종 볼 수 있는데, 이걸 세르게라고 했다.
부르한 바위 오른쪽에는 탱그리 13형제의 기둥이 있다.
탱그리 13명의 아들이 모인다는 곳으로, 실제로 6년마다 이곳에서 큰 행사가 열린다고 한다.
바로 그 앞에는 넓은 터가 있다.
그런데 이곳 사람들은 이 아래에, 칭기즈칸 묘가 있다고 여긴단다.
마르코폴로가 남긴 글에 있는 부르한 칼둔이란 지명이, 부르한과는 앞 단어가 같긴 하다.
그런데 묘하게 몽골 북동부의 헨티산맥 일대에, 부르한 칼둔 산이 실제로 있다.
‘Great Burkhan Khaldun Mountain’
그런데 마르코 폴로가 말한 지명과 거의 같은데도, 고고학자들은 그 지명을 못 찾았다고 발표했다.
그곳에 실제 칭기즈칸 무덤이 있다면, 태월이 찾은 무덤은 가짜 무덤이 되겠지만.
후지르 마을에서 하룻밤을 보낸 후, 태월과 아루는 바이칼 호수를 건너 이르쿠츠크에 도착했다.
이제 다시 그 머나먼 한국으로 장시간 가야만 했다.
기차 시간이 여유가 많았기에, 점심을 먹을 겸 식당에 앉아 있다.
“알혼섬에 부랴트족들이 많이 보이는데, 그 땅의 소유는 부랴트 공화국이 맞나요?”
“부랴트 공화국이 독립했고, 바이칼 호수의 대부분을 차지하고는 있습니다.
그러나 알혼섬 자체는 행정구역상 이르쿠츠크주에 속합니다.”
“아, 부랴트 공화국 수도인 울란우데서도, 알혼섬 관광 행사를 많이 열기에 그곳과 관련 있는 줄 알았네요.”
“그게 애매하긴 합니다. 사실 알혼섬 주민들이 부랴트족이 많거든요. 그래도 행정적인 건 이르쿠츠크에서 처리하고 있으니….”
“알혼섬의 땅도 파나요?”
“팔기는 하겠지요. 그런 생각이 있으시다면, 오히려 이르쿠츠크 소유인 게 다행이라고 여기셔야 합니다.”
“네? 왜요?”
“부랴트 공화국은 민족주의가 강한 상태입니다. 그래서 그때 레닌 두상 동상에서 시위하던 그 노인분들 경우를 보십시오. 토지 공개념이 강한 곳이 현재의 부랴트 공화국입니다.
러시아가 개방 정책을 지금 시행하는 중이지요. 그래서 이곳 이르쿠츠크주에서 계좌개설도 가능하지요. 이곳에서 땅을 사면 등기도 해드립니다.”
태월의 눈이 반짝 빛났다.
“허어, 그럼 지금 가능하단 소리네요? 계좌부터 만들까요?”
“외국인이 계좌 만들려면 준비 서류가 필요합니다. 첫 번째는 여권과 비자고요. 두 번째는 출입국 신고서입니다. 세 번째는 거주등록증인데 입국 후 7일 이내에 해야 합니다.
아, 그러고 보니 오늘이 7일째시네요?”
“이야, 진짜 다행이네요? 날짜도 그렇고, 서류는 거주등록증만 있으면 다 되겠는데요?”
여권엔 관광비자가 세트로 따라다니니 문제가 없었다.
출입국 신고서는 비행기에서 내릴 때 받아뒀던 것이고.
“하하, 어차피 기차 시간까지는 6시간이 남았으니, 그럼 이민국이나 주민센터로 가볼까요?
거기서 거주 등록 신고서 양식을 작성하면 됩니다.”
“네, 그건 그렇게 하고요. 혹시 알혼섬 자체도 살 수 있나요?”
“네?”
“알래스카도 미국에 팔았었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