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봉인을 뜯은 상자
태월은 차를 잠시 멈추게 하고는, 관광객과 이야기 중인 노인의 말을 귀에 담았다.
“우리는 2차 대전 참전용사요. 그 보상으로 작은 아파트를 받았다오.
그런데 그걸 상속할 수 없다는 거야.
우리가 죽으면 다시 빼앗아 가겠다는 거지.
나는 그들의 결정을 절대 인정할 수 없어.”
러시아는 이미 상속으로 결론이 났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여전히 영구 임대일 뿐이란 소리다.
사회주의가 몰락한 다른 연방과 달리 이곳의 공기는 달랐다.
하지만 그 공기 안에는 달착지근한 자본주의의 냄새도 섞여 있었고, 쇳내처럼 찝찝한 민족주의도 있었다.
노인들 머리 뒤로 거대한 칭기즈칸의 간판이 보인다. 과거 위대했던 부랴트인들의 조상을, 다시 그리워하고 있을 것이다.
오늘날 울란우데에서 사회주의는 잊히는 유산이고, 민족주의는 부활하는 유산이다.
울란우데의 인구 60%는 러시아에서 이주해온 사람들이다.
그래서 당장 연방 탈퇴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부랴트 지배층은 몽골과의 적극적인 유대를 도모하는 중이다.
그것이 부랴트 민족의 성스러운 땅과 바이칼을 유지하는 길이라 굳게 믿고 있는지도 모른다. 부랴트인의 미래는 태월의 의지와는 상관없지만, 너무도 닮아있는 이들의 얼굴에서 한민족의 과거를 떠올려본다.
민속 박물관으로 향했다.
그곳에 들어가니, 사방 벽면은 벽화로 채워져 있었다.
원시시대의 움막같이 생긴 주거공간도 재현해놓았는데, 그 위에는 사슴의 두상과 뿔이 얹혀 있다.
동물 박제들도 있고, 모형들도 있다.
털가죽과 그걸 다듬는 무두질 도구들도 늘여 놓았다.
온곤이라고 써놓은 사람 형태의 나뭇조각과 천장식이 있는데, 성스러운 존재인 영혼을 의미한다고 했다.
샤먼의 의복도 진열되어 있는데, 직접 입은 사람도 있었다.
이곳에서 돈을 내면, 샤먼 의례 모습을 볼 수가 있다기에, 호기심으로 비용을 지급했다.
‘화로에 불을 지핀 후 하늘을 향해 무언가를 중얼거리네. 크게 별다른 건 없어 보이는데.’
그곳에 쓰여있는 글 중에 눈에 들어오는 게 있었다.
“헤르메스 문서?”
이 문서에는 마법의 주문과 신비 의식에서의 통과 의례 절차가 담겨 있는 문서집이라 쓰여있다. 서술에는 아스클레피오스(그리스 치유의 신)라 불리는 대화편에, 이러한 내용이 있었다. 귀신의 영혼이나 천사의 영혼을, 약초, 보석, 향수의 도움으로 조각상에 가둔다. 그리고 그 조각상이 말하고, 예언하는 기술을 담고 있었다.
‘그리스 시대에도 이런 방식이 있었네?’
빛과 어둠은 네 개 발로 발전하여 불 공기 흙 물 4 원소가 된다. 이 4 원소가 봄 여름 가을 겨울의 4계절로 발전하는 거라고 쓰여있다.
오행의 기준은 목금과 수화. 샤먼은 이 상극의 원리를, 하나의 염주에 꿰는 비법을 통찰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우주물리학의 초끈 이론과 일맥상통한다. 초끈 이론은 우주의 4대 원소를 붙잡아 매고, 대통일을 이룬다는 이론이다.
1981년 콜로라도대학의 왈바 교수는 뫼비우스 띠는 하나의 DNA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 쌍둥이로 서로 분리되어 있다고 밝혔다.
목화 금수가 서로 상극이면서, 보이지 않는 초끈에 의해서 하나의 염주가 된다.
보이지 않는 끈이 염주의 교차에서 발생한다.
“이 내용이 이해되는가 봅니다? 난 볼 때마다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 같아서, 전혀 알 수가 없던데요.”
“저도 이 내용은 처음 보는 것입니다.”
민속 박물관이라더니, 샤먼과 관계된 자료나 물건들이 많았다.
정령에 대한 이야기도 있기에. 의례를 마친 샤먼에게 물어보았다.
“흑 샤먼은 밤의 정령과 인간을 중계하고, 백 샤먼은 낮의 정령과 인간을 중계합니다.”
괜히 물었다는 생각이 들었고, 머리만 복잡해지는 태월이다.
단지 헤르메스 문서라는 것을, 자세히 알아봐야겠다고 여길 뿐이다.
아르바트 거리란 곳을 가봤는데, 로마 신화와 관련된 동상도 보였다.
“헤르메스 문서에 이어 로마 신화라….”
“훈족이 로마를 점령했던 시기가 있었죠. 그래서 부랴트에도 로마 신화와 연관된 것들이 들어 온 거고요.”
훈족은 중앙아시아 몽골 지역의 유목민으로, 3세기에 기후 변화로 인해 서쪽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기마 민족이었던 이들은 창과 활을 사용한 기마 전투에 매우 강력했다.
이주하는 경로에 있던 다른 종족들이 합류함으로써, 훈족의 인구는 확 불어났다.
이 인원으로 동로마제국을 점령했었다.
“저기 맥주 통 같이 생긴 건 뭘 파는 데죠?”
“러시아 전통 음료인 크바스입니다. 하나 드셔 보세요. 한 잔 정도는 괜찮을 겁니다.”
‘음료 먹는데 한 잔 정도란 말을 왜 쓰지?’
가이드가 권하는 대로 두 잔을 사서, 아루에게도 하나를 건넸다.
“윽, 무슨 맛이 이래? 이거 술이잖아.
김빠진 맥콜로 만든, 저 알코올 맥주 맛?”
더 먹고 싶은 생각은 안 들어, 그 옆에서 팔고 있는 탄산음료를 사서 마셨다.
“응? 난 맛있는데? 기분도 조금 좋아지고.”
아루가 처음으로 술맛을 알게 된 거 같다.
시내 곳곳엔 특이하게도 우물펌프가 있었다.
한국의 과거 시골에서 쓰던 그 펌프와는 모양이 다른 일자형이다.
손잡이를 잡고 아래위로 휘적휘적하니, 물이 빠르게 솟아오른다.
물맛은 그냥 밍밍하니 그저 그랬다.
공산주의 기념비 아래에 한글도 적혀있었는데, 신기하다는 생각이 든다.
“부랸트 고려인들이 새긴 걸로 보이네요?”
“여기에 몽골 출신들도 꽤 있다는데, 고려인과 외모는 그리 차이가 나지 않지요?”
“네, 본인이 밝히지 않으면, 저희도 잘 구별 못 합니다.”
울란우데를 관광하며 시간을 보낸 지 나흘째 되던 날, 세르게이에게서 연락이 왔다.
아마도 보너스 욕심에 서두른 것 같았다.
“하하, 잠도 줄여가며 조사했습니다.
그 당사자는 2년 전에 돌아가셨지만, 다행히 아들이 하나 있더군요. 1921년생까지 확인했으니 확실할 겁니다. 그리로 가실까요?”
“오, 고생하셨네요. 네, 바로 가도록 하죠.”
당사자가 없다니 아쉽긴 해도, 그 아들이라면 가지고 있을 것 같았다.
가문의 인장이 흔한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차로 삼십 분가량을 달려 도착한 곳은, 울란우데 외곽 초원의 길목에 있는 마을이었다.
붉고 푸른 칠을 한 집이라 특이했는데, 의외로 집은 규모가 있었다.
초저녁이라 밥을 짓고 있는지, 굴뚝에 연기가 나고 있다.
세르게이가 앞으로 나서며 문을 두드린다.
-쾅쾅쾅!
“계십니까? 안에 아무도 안 계시나요?”
안쪽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며 청년 하나가 나온다.
대문을 조금만 열고선 얼굴만 내밀고 있다.
“누구신데, 그리 문짝 부서지게 두드려 대는 거요? 무슨 일이오?”
“여기, 니콜라이 코마로프 댁 아닙니까?”
“어? 그건 우리 할아버지 이름인데, 왜 찾는 것이죠? 재작년에 돌아가셨습니다만.”
태월이 앞으로 나서며 용건을 말했다.
“니콜라이 코마로프 1921년생 맞으신 가요?”
“그렇긴 한데. 용건부터 말하세요.”
“대한민국에서 왔습니다. 아버지에게 전하세요. 가문의 인장을 가지고 왔으니, 맡긴 물건을 내어 달라고요.”
화들짝 놀라며 눈이 동그래지는 청년이다.
“아, 잠, 잠깐 안으로 들어오세요.”
문을 열어서 태월의 일행이 들어서게 해준다.
앉아서 쉴 수 있는, 손님방으로 안내했다.
그리고 나선 부리나케 저택 안쪽으로 내달린다.
20분 정도가 지나자, 50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사내가 앞장서서 오고 있다.
“대한민국에서 왔고, 우리 가문의 인장을 가지고 있다는 게 어느 분이요?”
“안녕하세요. 박태월이라고 합니다.
왕호정 님이 제 사조 되시는 분의 함자입니다.
혹, 아십니까?”
“아이고, 정말 잘 오셨소. 알다마다요.
제 아버님을 구해주신 은인이신데. 당연히 기억하지요. 다른 분들은 식사하면서 기다리시고, 당사자만 저를 따라오도록 하세요.”
일행을 그 방에 남겨 두고, 그 남자의 뒤를 따랐다.
상대의 영혼이 그리 탁하지 않았기에, 편하게 나선 것이다.
마침 식사하려던 참이었는지, 저녁상이 펼쳐진 곳으로 데리고 갔다.
그곳엔 6명이나 되는 그의 식구들이 앉아 있다가, 살짝 일어선다.
“자자, 우선 들면서 이야기합시다. 다들 앉도록 하지.”
“네, 마침 시장하던 참인데, 잘 먹도록 하겠습니다.”
“하하, 러시아어가 하도 유창해서, 오늘은 러시아어로만 대화하기로 합시다.”
그 사내는 자신의 식구들을 일일이 소개해 주며, 그들에게도 태월의 이름을 알려준다.
그리고 이곳에 온 이유도 넌지시 말해주었고.
“아, 아버지! 드디어 가문의 인장을 찾게 되었군요. 하하, 긴 세월 기다린 보람이 있었네요.”
“어머, 정말 잘되었구나. 박태월 님이라고 했지요? 정말 감사드립니다.”
“어허, 인사의 순서가 틀렸어! 아버님 생명의 은인 후손인데 그거부터 했어야지. 다시 한번 집안을 잇게 해준 것에 감사를 드리네. 아버님도 그렇고 인장도 그렇고….”
다들 일어서서 고개 숙여 인사를 올린다.
“아, 저도 나중에 알게 된 것이니, 과례는 비례라 하지 않습니까? 이 정도면 되었습니다.”
태월의 겸양에 다들 자리에 앉았다.
한국이 궁금했었는지, 식사하면서 이것저것 물어보기도 한다.
식사가 끝나자 그의 안내에 따라 서재로 왔다.
그곳에 있던 금고 하나를 열더니, 작은 함을 하나 꺼내 올린다.
그런데 함에는 한지로 봉인을 해놓았다.
“이건 우리도 무엇이 들어있는지는 모릅니다.
아버님도 굳이 알려고 하지 않았었고요. 이제 가져가시면 됩니다.”
태월은 품속에서 손바닥 절반만 한 목곽을 꺼내,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물건이 교환되었다.
“오늘 하루 묵고 가시지요? 은인의 후손이 멀리서 오셨는데….”
“아, 아닙니다. 제가 오늘 밀린 일들이 좀 있어서요. 아쉽지만 다음을 기약하겠습니다.”
“허, 그럼 할 수 없군요. 그럼 잠시 기다리세요. 이거라도 드려야겠네요.”
다시 금고를 열더니, 그 안에서 오래된 책자 하나를 꺼내온다.
“이건 왕 선사님에게 드리려 한 고서인데, 후손이라 하니 대신 전하겠습니다. 이것은 은인에 대한 작은 선물입니다. 부랴트 샤먼에게 내려오던 고서 원본입니다.”
“아, 감사히 받겠습니다.”
좋은 선물을 받은 것 같아, 기쁨을 숨기지 못하는 태월이다.
스승의 유언을 해결할 수 있었던 보람도 함께해서였지만.
태월 일행은 세르게이와 함께 문화원으로 돌아왔고, 바로 그 자리에서 정산을 끝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럼 다음에 기회 되면 또 뵙지요.”
“아 뭘요. 이런 일이 직업인데요. 감사합니다.”
“하하, 저도 두 분 덕분에 두둑이 챙겼네요.”
“흠흠, 이 세르게이 덕분인 건 알고 있지?”
“그래 덕분이다!”
그들과도 헤어져 숙소로 돌아와, 함의 봉인을 뜯어냈다.
달랑 16절지 크기의 가죽 한 장이 들어있었다.
“이게 대체 뭐지? 지도 같은데?”
태월의 말대로 옛날 시대의 지도 같았다.
그리고 지도 윗면에는 작게 한자가 적혀있었다.
‘成吉思汗 陵祕圖’
“성길사한 능비도? 칭기즈칸 비밀무덤?”
성길사한은 칭기즈칸의 한자식 이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