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낳은 정, 기른 정
-따르릉! 따르릉!
출근을 막 하려고 일어서는 중에, 집 전화가 울렸다.
조민희는 시부모님인가 싶어 전화를 받는다.
“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얼마 전에 아드님이 우리 집 방문했었는데, 꽃 선물 잘 받았습니다.-
“아, 안녕하세요? 설희 어머님이시구나. 그런데 이 시간에 어쩐 일이세요?”
“만나서 꼭 말씀, 아니 상의드릴 게 있습니다. 실례인지 알지만, 꼭 부탁드려요.”
아들이 대접을 잘 받고 왔었다기에, 대놓고 거절하기도 뭐했다.
“네, 시간은 내보도록 할게요. 그런데 궁금해서 그러는데 무슨 일인데요? 대충이라도 알아야 그동안 마음이 편할 거 같은데요?”
“아, 그, 그게 저희 딸하고도 관계가 있어요.”
딸하고 관계있다는 말에 날짜를 정하고는 통화를 마쳤다.
‘무슨 일일까? 딸이라니? 이쁘다고 하더니, 아들이 딸을 주십시오! 라고 했으려나? 제 아빠처럼? 크. 박력 쩐다. 쩔어.’
삼천포로 빠져서 잠수까지 해보는 조민희다.
조민희는 저녁 퇴근 시간이 되자, 간단히 화장을 더 하고 회사를 나섰다.
신사역 쪽 일식집에서, 저녁 7시 반에 설희의 어머니를 만나기로 한 것이다.
-딸랑!
“어서 오세요.”
“네, 예약되어 있을 거예요. 조민희라고.”
카운터에서 예약상황을 체크한 직원이 고개를 끄덕인다.
“손님이 와 계시네요.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별실 3호라고 쓰인 룸 앞에서 노크한다.
-똑똑!
“여기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부르실 때는 벨을 눌러 주십시오.”
“네, 안내 감사합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화사한 여인 하나가 앉아 있다.
분위기상 나이는 조민희보다 많아 보였다.
외모로는 오히려 더 젊어 보였고, 30대 여배우라고 해도 될 정도로 미모가 돋보였다.
“안녕하세요? 태월이 엄마인 조민희예요.”
“어서 오세요. 홍미연입니다.”
“일단 식사 먼저 할까요? 출출해지는데.”
“호호, 그렇게 하는 게 좋겠네요.”
조민희가 테이블에 올려져 있는 벨을 누른다.
“세트 메뉴 어떠세요?”
“네, 한 번에 가져오게 하죠. 술도 한잔해야죠?”
“호호호, 저야 좋죠. 그럼 와인이나 사케? 소주? 맥주?”
“오랜만에 소주를 한잔하고 싶네요.”
노크 소리에 이어 문이 열리고, 직원이 들어섰다.
“아 여기 B 세트로 주시고요. 소주 두꺼비 한병하고요. 한 번에 가져와 주세요.”
직원이 찻물을 따라주고는 바로 나갔다.
차를 음미할 시간도 없이 뒤이어 상차림이 이어진다. 저녁 시간 피크타임이라서, 기본 상차림은 빠르게 준비되어 있었다.
“우리 아이가 음식 맛이 너무 좋았다고 해서 걱정이에요. 입이 고급이 됐을까 봐요. 호호.”
“어머, 그럴 정도는 아니에요. 아드님이 반듯하게 컸더라고요.”
“따님을 본 적은 없지만, 엄마 닮았으면 꽤 이쁠 것 같네요. 이 방에 들어올 때, 웬 여배우가 계신가 했어요.”
“어머, 태월이 어머님도 처녀 때 남자들이 줄을 섰겠어요? 지금 신랑분이 대시를 했을 거 같은데, 맞나요?”
“호호호, 맞아요. 그이가 떡하니 집에 찾아와서는….”
가볍게 수다를 떠는 사이에, 식사 겸 술상이 차려졌다.
“따님은 몇 살 때 낳으신 거예요?”
“35살 때요.”
“어머, 그런데 이렇게 젊으세요? 저보다 5살은 언니신데, 오히려 더 젊어 보이세요.”
“어휴, 아니에요. 저보단 훨씬 매력 있으신데요? 웃음이 특히 이쁘시네요.”
사실은 홍미연은 보기보단 나이가 많다.
호족의 영매술을 잇기 위해 30년의 연공을 하며, 그에 맞는 후손을 낳으려 했다.
그래서 40살이 되어서야 딸을 낳은 것이다.
나이를 속이려 줄인 게 아니라, 조민희와의 나이 차가 많으면 그녀가 불편해할까 봐서다.
술이 몇 잔 들어가고 술병이 3개 정도가 비었을 때쯤, 조민희는 기분 좋게 취해 있었다.
홍미연과 언니 동생 하면서, 어느 정도는 벽을 허물었다.
“언니? 따로 할 말이 있어서 보자고 한 거 맞죠? 에이 우리 사이에 말 못 할 게 어딨어요. 편하게 말해봐요.”
“호호, 진짜 말하면, 화내고 이 방을 바로 나갈 것 같은데?”
“에이, 저 흉봐도 안 나갈게요. 약속할게요!”
“흉볼 일은 없고 오히려 고맙다고 말해주고 싶어. 태월이가 잘 컸더라고.”
“아휴, 자기 애를 잘 키우는 거야 누구나 다 같은 거 아닌가요?”
“글쎄, 난 그러지 못했거든….”
한 잔의 술을 더 따라, 그대로 마시는 홍미연이다.
“어머, 언니 무슨 사연이 있으신가 보다.”
“아이를 낳았었어. 잔인한 살인귀들에게 쫓기면서 몸도 많이 다쳤었거든.”
“네? 그, 그래서요? 설마, 드, 드라마 이야긴 아니죠?”
“나를 보호해주던 가족들이 하나둘 죽어 갔어.
하복부에 하혈은 계속되었고, 살인귀들에게 휘두른 칼에 상처는 더욱 깊어졌지.
그래서 산에 올라갔어. 달이 필요한 날이었거든. 정상에서 겨우 아이를 낳았을 때는, 내 몸도 이미 반쯤은 저세상에 가 있었어.
아이까지 쌍둥이가 나올 게 뭐람. 한 아이의 생명도 장담 못 하던 차에….
포기하려 했을 때쯤, 등산객이 나타났었어.”
“어, 언니! 서, 설마?”
“그들이 아이를 살리겠다 싶어서, 나중에 태어난 동생만 데리고 겨우 몸을 피했어.
어찌 되었든, 내가 못난 엄마잖아. 살려주고 키워준 공덕을 잊고, 이제야 알았다고 매몰차게 데려올 생각까진 못해. 아니 그렇게 하고 싶어도, 그 아이는 그걸 바라지 않을 거야. 난 그 아이가 누구보다도 행복했으면 좋겠어.”
“그, 그러면 잊고 살지! 왜! 왜! 나타나셨는데요? 저도 몰랐으면 되는 거 아니었나요?”
“내 딸이 그 아이를 좋아하더라고. 또 그 아이도 우리 딸을 싫어하진 않았고. 동생, 흥분하지 말고 들어. 내가 아이를 살려준 그 공덕 때문에, 아이를 달라고 하진 않겠다고 전제를 뒀지? 기억하지?”
“네. 그, 그랬죠.”
“그럼, 문제는 없는 거잖아? 마음을 우선 편하게 가져.”
홍미연의 이야길 듣고 보니, 강제로 떼어놓을 생각은 없는 것 같다.
비로소 날이 서 있던 마음이 가라앉았다.
“우리 딸이 맑은 영혼이긴 한데, 성격이 특이하거든. 막는다고 자기 하고픈 것을, 그만둘 애가 아니야. 자기는 아들이 우리 딸을 만나는 걸 어떻게 막을 거야?”
“그, 글쎄요. 생각해보진 않아서….”
“태월이도 나이답지 않게 과하게 성숙하지?”
“네, 그, 그런 면이 많긴 했어요.”
“설희도 그래. 둘이 태어날 때 집안에 내려오던 귀한 것을 복용시켰어.
그걸 먹이면 애가 영특해지고 몸이 건강해져. 더불어 여러 가지 기운을 다룰 수 있게 돼.
그 약을 만든다고 백 명이 십 년을 고생했어.
얼마나 대단한 약인지 느낌이 오지?”
이건 월령주를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월령주는 천년에 걸쳐 축적한, 임종 전의 영매술사 선조들이 모은 영매력의 정화다.
영혼에 관련된 영매력이기에, 거기에는 선조들의 정신력도 깃들 수밖에 없다.
좋은 점이긴 하지만, 어찌 보면 부작용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 두 아이의 정신연령이 높은 이유를 설명해야 했다.
이렇게 그녀가 이해할 수 있는 범위에서 각색하는 홍미연이다.
“그 당시 그걸 먹이지 못했다면, 두 아이와 나는 살아나지 못했을 거야. 그래서 두 아이는 영특해졌던 거고. 특이한 능력들이 나타난 거야. 태월이 그림도 특이했지?”
“아, 그래서 아들이 그런 게 가능했던 거네요. 귀신을 보니 어쩌고 해서 많이 놀랐었어요.”
“딸도 같은 능력을 지녔어. 나도 그렇고.
그렇다고 인간에게 피해를 주는 일은 없어. 오히려 선한 덕을 쌓는 일이지.”
“아, 그, 그랬구나.”
“내가 왜 이리 장황하게 설명하는 줄 알아?
우리가 생각하는 또래의 나이로 보면 안 돼.
거의 어른에 준하는 정신을 가진 애들이야.
그걸 어른들이 명분도 없이, 억지로 막는다고 해결될까? 오히려 그랬다간 부모와 멀어질 거야. 스스로 독립해버릴 거란 소리지.”
홍미연은 조금 과장된 소지가 있음에도 밀어붙였다.
진짜로 그런 일이 벌어져서는 안 되기에, 사전에 방지하려는 목적이었다.
그리고 당당하게 데려가진 못하더라도, 종종 아들을 만나고는 싶었다.
그게 서로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 현재의 최선이라고 여겼다.
“아들을 데려가지 않는다고 약속할게. 그 대신 우리 딸이 아들을 이성으로 만나게 해선 안 돼. 그러려면 출생의 비밀은 알게 해야 해.”
“아이들이 놀라지 않을까요?”
“지금은 놀랄 수밖에 없겠지만, 더 깊어진 후에 알면 놀라는 걸로 끝나지 않잖아?
태월인 내가 봤을 때, 아직 이성의 눈은 뜨지 못했어. 이때가 최고의 기회야. 이를 놓치면, 다들 불행해져.”
홍미연의 명료한 설명에 점점 고개를 끄덕이는 조민희다.
술이 한 잔 두 잔 더 들어가자, 서로를 부둥켜안고 울기도 했다.
“언니, 그게 최선일 거 같네요. 낳아줘서 고마워요. 잘 키울게요.”
둘이 손을 꼭 잡고 있다.
“아니야 동생, 길러줘서 정말 고마워. 동생 남편에겐 어떻게 말하려고?”
“호호, 우리 신랑은 제가 또 꽉 잡고 있잖아요. 합리적인 이야기니까 응할 수밖에 없어요.
어쩌면 더 좋아할지도 몰라요.”
“응? 아니, 왜?”
“지금은 덜하지만, 예전엔 친부모가 나타나서 아들을 데려갈까 봐 항상 불안해했거든요.
이젠 안심해도 되잖아요?”
“호호, 이젠 안심하라고 전해줘. 나도 아들이 행복한 게 최선이니까.”
홍미연의 아들 사랑에 대한 본심이었다.
두 여자는 그날 3차까지 달렸다.
다음 날 기운을 다루는 홍미연은 멀쩡했지만, 조민희는 압구정 아파트 거실에서 대자로 뻗었다. 그리고 출근을 오후에 했다.
그리고 주말이 되자, 두 가족이 만났다.
태월과 설희는, 단순하게 친구 가족과의 상봉 정도로 생각했다가 충격을 받게 되었다.
홍미연의 입에서 그날의 참혹하고 슬펐던 사연들이 쏟아지자, 박승철이 제일 많이 울었다.
그리고 태월도 울고 설희도 울었다.
홍미연은 아들을 안고 정말 미안하다며, 눈이 퉁퉁 불도록 울어댔다.
둘 중 하나를 살릴 수밖에 없었던 사연이기에, 원망을 버린 태월이다.
이 중에 가슴 상처가 가장 큰 것은, 버려진 태월이가 아니라 설희였다.
일주일간이나 일어나지 못하고 몸살을 앓았다.
남자친구가 졸지에 오빠가 되었으니 왜 안 그렇겠는가.
“몸은 좀 괜찮아졌어?”
“으응, 태, 아니, 오빠는? 아, 이거 이상하다.”
“글쎄, 난 더 좋은데? 친구는 헤어질 수 있지만, 가족은 헤어질 수 없잖아. 오래오래 서로 아껴주면 더 좋다고 생각하는데?”
“아, 기분 상해. 내 첫 뽀뽀를 오빠에게 해주다니. 내 순정을 돌려줘!”
“키티? 그럼 내가 뽀뽀해줄까? 나 처음인데.”
그 말을 하면서 아카가 입을 쏙 내민다.
설희의 이마가 찡그려지더니, 베개를 들고 냅다 후려갈겼다.
-퍽!
“아, 아파, 왜 또 날 때리냐?”
“어머, 오빠, 미안!”
그렇게 어린 날의, 다르게 보면 어리지 않은 두 남매의 애틋함은 이렇게 지나갔다.
태월의 본격적 여름 방학은 관악산에서 이루어졌고, 틈틈이 홍미연이 설희를 데려왔다.
셋은 올림픽 경기장에서 응원도 하고 환호도 질러댔다.
가을을 지나 겨울 방학엔, 큰스님이 있는 건곤암에서 지냈다.
태월은 퇴마를 하러 다녔고 설희도 합류했다.
더불어 이젠 조금 더 성숙해진 아카도 자기 몫을 해내며 따라다녔다.
이제 곧 졸업이고 4월이 첫 검정고시다.
“그런데 관악산은 언제가?”
“응? 거긴 왜?”
“거기 아기가 곧 나올 건데?”
아카가 이상한 말을 하고 있었다.
“갑자기 웬 아기 타령이야?”